83. 소산 광인(疎山 光仁, ?∼?)무주 소산의 광인 선사는 키가 작고 모습은 볼품없었어도 말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동산 양개 선사의 문하에 있을 때 설촉(날카롭게 물어뜯음)기가 있었다고 운문이 말한 내용이 에 실려 있다. 소산수탑(疎山壽塔)소산 선사를 위해 한 스님이 수탑(승려가 생전에 세우는 자기의 탑)을 만들고 나자 이
80. 월주 건봉(越州 乾峰, ?∼?) 월주의 건봉 화상은 법을 동산 양개 선사로부터 이었다. 건봉법신(乾峰法身) 〔건봉일로(乾峰一路)〕 건봉 선사에게 어느 때 한 스님이 묻기를 “시방 박가범에 일로 열반문이라 하니 미심쩍도다. 노두는 어디 있는 것입니까?” 하였다. 건봉 선사가 주장자를 점기하여 획일획하여 말했다. &ldquo
78. 취암 영삼(翠巖 令參, ?∼?) 명주 취암의 영삼 영명(永明) 선사는 길주 사람으로 보복 종전(保福 從展), 장경 혜릉(長慶 慧稜), 운문 문언(雲門 文偃)과 함께 설봉 의존의 법사(法嗣)이다. 취암 선사의 전기는 자세히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가 농책(籠冊)에 돌아와 입적했다는 사실만 전할 뿐이다. 그 외에는 다음의 학인접득 모습 이외는
76. 나산도한(羅山道閑 ?∼? 靑原下) 복주의 나산 도한 선사는 장계 사람으로 속성은 진(陳)씨이다. 귀산(龜山)에 출가하여 나이가 들어 수구(受具)했다. 여러 곳을 편력하여 처음엔 석상 선사(石霜 禪師)를 뵙고 이어 암두 화상 곁으로 가 그 법을 이었다. 그리고 청량산으로 들어가 주석했다. 민사는 도한 선사의 법미(法味)를 흠숭하여 나산에 청해서
"온 세상이 다 약인데 그대들은 대체 무언가?"운문중유일보(雲門中有一寶) [운문일보 雲門一寶]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수시하기를 "이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고 그 속에 하나의 보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몸속에 있다. 등롱(燈籠)을 들고 불전(佛殿)에 갔다가 산문(山門)에 올려놓은 채 들고 돌아왔지."라고 했다. 《벽
운문은 설봉산 밑의 설봉장(雪峰莊)에서 여장을 풀었다. 운문은 설봉선사를 뵈러가는 한 승려를 보고 “오늘 한 질문을 의존대화상에게 올려보시라. 대중이 모인 자리에 화상이 상당하게 되면 앞으로 나아가 화상의 팔을 잡고 ‘이 늙은이, 머리 위의 철가(鐵伽)를 왜 벗지 않는가’하고 추궁해 보시라.”하곤 가르쳤다. 이 승
혜초문불(慧超問佛) [법안답혜초 法眼答慧超] 한 스님이 법안화상에게 정중히 물었다. “저는 혜초라고 하는 중입니다. 감히 화상께 묻겠습니다. 부처란 본래 어떤 것입니까?” 법안은 이 말에 부처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네가 바로 혜초였군.”했다. 《벽암록》 제7 법안호리(法眼毫厘) 법안화상이 수산주(修山主)에게 물
71. 나한계침(羅漢桂琛 862∼928 靑原下) 무상에게 출가한 계침 역방 중 사비에 깨달음절강성 상산(常山) 출신의 나한계침 선사는 속성은 이(李)씨다. 어릴 적에 본부(本府)의 만세사(萬歲寺)에 들어가 무상대사(無相大師)를 따라 출가 득도했다. 처음에는 계율을 배웠으나 뒤에 남종(南宗)의 선을 배우고자 운거(雲居) 설봉(雪峰) 등 선사들을 찾아
선사는 어느 날 상당하여 한 승려를 불러내 단상에 세워놓고 대중을 향하여 “이 중에게 절하라.”고 명했다. 대중이 모두 절하고 나자 선사는 “이 중에게 무슨 좋은 점이 있어 대중으로 하여금 절하게 했는가?”하고 물었다. 아무도 이에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또 어느 때 민의 부인이 사람을 시켜 스님의 옷을 보내왔다.
어느 때 설봉선사가 찾아왔다. 투자스님은 암자 앞의 한 개의 돌을 가리키며 “삼세의 제불이 모두 이 안에 있으리.”라고 말했다. 설봉선사는 이 말을 듣고 “모름지기 이 안에 있지 않은 자가 있다는 것을 알지어다.”하였다. 투자스님은 “모르겠다. 칠통(漆桶 번뇌와 망상)이로다”고 응했다. &ls
63. 현사사비(玄沙師備 831∼908 靑原下) 복주현사(福州玄沙)의 사비종일(師備宗一)선사는 속성은 사(謝)씨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낚시를 즐겨서 한동안 향리와 남태강에서 어부생활을 하다가 나이 30세에 홀연히 출가의 뜻을 세워 부용(芙蓉)의 영훈화상(靈訓和尙)에게 출가했다. 출가 후 예장 개원사의 도현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깨달음을 향해 남들
61. 석상경제(石霜慶諸 807∼888 潙仰宗) "한 알은 어디서 나왔나?""쌀 속에 벌레가 있다!" 담주 석상산(石霜山)의 경제(慶諸)선사는 노릉신감 사람으로 속성은 진(陳)씨다. 열세 살 때 홍정(洪井)의 서산소란(西山紹鑾)에 의해 출가, 스물 세 살 때 수구(受具)했다. 처음에 비니(
설봉시십마(雪峰是什麽)“설봉과 나는 함께 배우고 깨우쳤지만 방법은 달라” 설봉화상이 암자에 살고 있을 때 두 스님이 와서 절했다. 이 둘을 본 설봉화상은 문을 밀어 열고는 활개 치듯 달려 나가면서 “그래, 무슨 일이냐?”하고 물었다. 스님들도 역시 “그래, 무슨 일입니까?”하고 되
59.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2 靑原下) 복주설봉(福州雪峰)의 의존(義存)선사는 천주남안(泉州南安)사람으로 속성은 증(曾)씨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부처님을 신봉하는 독실한 불자집안으로 어릴 적부터 종소리를 듣거나 깃발이나 꽃을 보면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열 두살 때 아버지를 따라 포전(蒲田)의 옥간사(玉澗寺)를 참배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밀사백과 동산 법거량 흰 토끼새끼가 달려가자 "잠시 권세 잃은 것 같군"동산은 제1좌 조산(曹山)에게 친절한 전법을 끝내고 더욱 대중에 대해서도 자상한 지도를 하였다. 동산의 이러한 큰 가르침과 인격은 산 밖에까지 두루 미쳤다. 그 유명한 《보경삼매》는 조산에 대한 부법(付法)의 책이다. 당 대종황제 함통 10년 3월 스님은 임종에 가까워
58. 동산양개(洞山良介 807∼869 曹洞宗) 서주동산의 양개오본선사(良介悟本禪師)는 회계(會稽) 유씨(兪氏)의 아들이다. 당 헌종황제 원화(元和)2년에 태어났다. 동산은 어렸을 때 스승을 따라 《반야심경》을 염송하다가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의 말뜻에 큰 의문을 일으켰다. 이에 스승에게 그 뜻을 물었는데 스승은 그가
암두가 손뼉치고 웃으며 "누구도 덕산 못건드려"덕산탁발(德山托鉢) [설봉반두 雪峰飯頭] 설봉스님이 덕산에 있을 때 반두(飯頭 취사담당)가 되었다. 어느날 덕산스님이 바루를 들고 식당에서 나왔다. 설봉이 이를 보고 “스님, 아직 종도 울리지 않고 북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어딜 가십니까?” 덕산은 아무 말 없이 방장으로 들
56. 덕산선감(德山宣鑒 783∼865 靑原下) 노파의 물음에 눈앞 캄캄 '30봉' 유명 종풍 상징해낭주 덕산의 선감선사는 속성이 주(周)씨이다. 어릴 적에 출가하여 처음에 율장을 연구하고 또 성상학(性相學)에 정진했다. 촉에 있을 때 평소 《금강반야경》을 강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금강(周金剛)’이라 불리었다. 이른바 법상
어느날 향엄지한선사가 마당을 청소하고 있는데 비로 쓸어버린 돌멩이가 앞뜰에 나 있는 대나무에 맞아 ‘딱’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활연대오하는 순간이었다. 지한은 이 기쁨을 참을 수 없어 곧 목욕하고 향을 피워 멀리 위산화상있는 곳을 향해 절했다. “화상의 큰 자비는
혜적 선사는 정오에 이르러 승좌해서 대중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게를 남겼는데 이것이 임종게다. 연만칠십칠 무상재금일 年滿七十七 無常在今日 일륜정당오 양수반굴슬 日輪正當午 兩手攀屈膝 내나이 일흔일곱 죽음이 오늘에 왔네. 둥근 해는 한가운데 떴는데 두 손으로 굽은 무릅을 안아보네. 이 게를 남기고 선사는 양팔로 무릎을 껴안은 채 입적했다. 지통선사(智通禪師)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