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두가 손뼉치고 웃으며
 "누구도 덕산 못건드려"

덕산탁발(德山托鉢) [설봉반두 雪峰飯頭]

설봉스님이 덕산에 있을 때 반두(飯頭 취사담당)가 되었다. 어느날 덕산스님이 바루를 들고 식당에서 나왔다. 설봉이 이를 보고 “스님, 아직 종도 울리지 않고 북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어딜 가십니까?” 덕산은 아무 말 없이 방장으로 들어갔다. 설봉이 암두에게 이 말을 하니 암두 가 “대소(덕산스님 같은 이)의 덕산, 아직 말후의 구를 몰랐네.”했다. 덕산스님이 이 말을 듣고 시자를 시켜 암두를 불러다 놓고 물었다. “그대는 나를 어떻게 아는 거냐?” 암두는 스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가만히 그 뜻을 말하니 덕산은 아무 말 없었다. 다음 날 승좌하였는데 다른 때와 달리 심상치 않았다. 암두가 승당 앞에 가서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며 “기쁘다, 우리 스님. 말후의 구를 알았도다. 이후 천하의 어떤 사람도 덕산스님을 건들지 못하리라.” 하였다. 《무문관》 제13 《종용록》 제55

덕산협복문답(德山挾複問答) [덕산협복자 德山挾複子]

금강경의 대가를 자처한 콧대 높은 덕산스님이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던 대위산 영우선사의 정체를 알아내고 실력을 평가해볼 양으로 찾아갔다. 덕산은 바랑을 옆에 끼고 법당에 올라가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왔다갔다하면서 둘레를 살펴보더니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어. 하기야 이따위 향내 따분한 곳에 뭐가 있겠어."하였다. 덕산은 산문 앞까지 나오다 말고 너무 경솔하지 않았나 싶어 전통법식대로 위의를 갖추고 재차 들어가 위산선사를 정식으로 만났다. 위산선사는 제자리에 앉아있었다. 덕산이 좌구를 불쑥 내밀면서 "선사!"하고만 말했다. 위산선사가 옆에 있는 불자(拂子)를 집으려 하자 덕산은 '꽥' 일할한 뒤 옷소매를 떨치고 후다닥 나와 버렸다. 덕산은 법당을 뒤로 한 채 짚신을 신자 곧 그곳을 떠나 버렸다. 위산선사는 그날 밤 수좌에게 "아까 그 새로 온 놈 어디 있는가?" 묻자 수좌가 “아, 그 놈은 법당 뒤에서 여장을 차리고 가버렸습니다.”대답했다. 위산은 “그 놈은 앞으로 인적 드문 높은 산봉우리 위에 초암을 짓고 부처를 꾸짖으며 조사를 욕하게 될 것이다.”하였다. 《벽암록》 제4

곽시과다(廓侍過茶)

곽시자(廓侍者)가 덕산선사에게 물었다. “종래의 제성(諸聖)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덕산선사가 말하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고 묻자 곽시자가 “비룡마(飛龍馬)를 칙점(勅点 천자의 칙령으로 점호하는 것)하면 파별(跛鼈 절뚝발이 자라를 뜻함)이 출두해 옵니다.”했다. 덕산은 이에 쉬러 갔다.
다음날 덕산이 멱을 감고 나왔다. 곽시자가 차를 덕산에게 건네주었다. 덕산이 마신 차는 곽시자가 등을 어루만져 주니까 쉬 내려갔다. 곽시자가 말하기를 “이 늙은이는 처음으로 별지(瞥地)하는가?”하니 덕산스님은 또 쉬러 갔다. 《종용록》 제14

▲ 삽화=강병호 화백

57. 협산선회(夾山善會 805∼881 靑原下)

예주협산(醴州夾山)의 선회(善會)선사는 광주 현정 사람으로 속성은 료(廖)씨이다. 아홉 살에 담주 용아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경론을 청습하여 그 학문이 넓었고 삼장을 두루 갖추었다. 뒤에 윤주의 학림(鶴林)에서 살았다. 어느 날 밤 도오(道吾)선사가 지팡이를 끌고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때 협산이 상당해서 한 스님과 문답을 주고받았다.
스님: 법신(法身)이란 어떤 것입니까?
협산: 법신은 무상(無相)이다.
스님: 법안(法眼)은 어떤 것입니까?
협산: 법안은 무하(無瑕)다.
이를 옆에서 듣고 있던 도오선사가 실소(失笑)했다. 도오선사로부터 웃음을 산 협산은 배움에 의심이 생겨 도오선사에게 가르침을 청했으나 도오선사는 화정현(華亭縣)의 선자화상(船子和尙)을 찾을 것을 권유했다. 협산은 곧 화정현으로 가 선자화상을 찾아 수학했다. 선자화상 문하에서 수행을 거듭하여 이윽고 그 법을 이었다. 당 함통 11년 예주의 협산에 원우(院宇)를 세워 살았다. 어느 날 한 스님이 물었다.
스님: 협산이란 어떤 곳입니까?
협산: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가파른 산 속으로 돌아오고 새는 꽃을 물고 푸른 바위 앞에 날아온다.
또 어느 날 상당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 20년동안 이 산에서 살았다. 지금까지 종문 중의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도다.”
협산은 후학을 제접하며 문도를 접화한 20년이 마치 하루 같았다. 당 중화(中和) 원년 11월 주지승을 불러 말했다.
“내 이제 곧 가려한다. 그대들이 문풍을 잘 보호하는 일에 있어서 내 살아있을 때와 같이 하라. 세인과 어울려 추창(惆愴 슬퍼하고 실망하는 일)하는 일 없도록 하라.”
이 말을 남기고 협산은 그날 밤 원적했다. 세수 77세였다. 칙령으로 전명대사(傳明大師)의 시호를 받았다. 문하에 낙포원안(洛浦元安) 반용가문(盤龍可文)등 십여 명의 뛰어난 제자들을 두고 있다.

협산위검(夾山揮劍)

한 스님이 협산선사에게 물었다. “먼지를 털고 부처님을 볼 때 어떠합니까?” 협산이 말하기를 “모름지기 칼을 휘둘러 일체를 단절하리라. 만약 칼을 휘둘지 않는다면 어부집에 살리라.” 스님이 이를 석상(石霜)화상에게 또 물었다. 석상화상이 말하기를 “도랑에 국토 없다. 어디서엔가 도랑을 만나리라.” 스님이 다시 협산에게 물었다. 협산선사가 상당하여 말했다. “문전의 시설은 노승과 같지 않으며 입리의 심담은 오히려 석상에게 백보를 비켜주리.” 《종용록》 제68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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