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시십마(雪峰是什麽)

“설봉과 나는 함께 배우고
깨우쳤지만 방법은 달라”


설봉화상이 암자에 살고 있을 때 두 스님이 와서 절했다. 이 둘을 본 설봉화상은 문을 밀어 열고는 활개 치듯 달려 나가면서 “그래, 무슨 일이냐?”하고 물었다. 스님들도 역시 “그래, 무슨 일입니까?”하고 되물었다. 설봉화상은 그만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가 버렸다. 두 스님은 그 후 암두화상에게 찾아갔다. 암두화상이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하니 “영남(嶺南)에서 왔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럼 설봉화상을 만났느냐?”고 묻자 “네, 만났습니다.”라는 스님들의 대답에 암두화상은 “무슨 말을 하더냐?”고 다시 물었다. 두 스님은 거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암두화상이 “그리고 또 뭐라고 하더냐?”고 재차 묻자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숙인 채 암자로 돌아갔습니다.”고 대답했다. 암두화상은 “아, 애석하구나. 그때 그에게 말후(末後)의 한마디를 했어야 할 걸. 그랬으면 천하의 어느 누구도 설봉을 감당 못했을 텐데.”하고 탄식했다. 스님들이 하안거가 끝날 무렵이 되자 다시 이전 이야기를 꺼내면서 물었다. 그러자 암두화상은 “왜 좀 더 일찍 묻지 않았느냐”하고 나무랬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공안이어서 늦었습니다.”고 말하자 암두화상은 “설봉과 나는 함께 배우고 깨우쳤지만 방법은 다르다. 말후의 한마디를 알고 싶다지. 그게 바로 이것이야.”했다. 《벽암록》 제51 《종용록》 제50

60. 암두전할(巖頭全豁 828∼887)

악주암두(鄂州巖頭)의 전할선사는 천주가씨(泉州柯氏)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청원 의공(誼公)을 뵙고 삭발했다. 또 장안의 보수(寶壽)에 가서 계를 받고 경률(經律)을 배웠다. 후에 선원에서 설봉(雪峰) 및 흠산(欽山)과 벗이 되었다. 한 때 대자산(大慈山)에 있어서는 환중선사(寰中禪師)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있었다. 곧 대자산을 떠나서 임제선사(臨濟禪師)곁으로 갔으나 이미 임제선사는 입적하신 뒤였다. 발을 돌려 위산(潙山)의 법사인 앙산(仰山)선사의 문을 두들겼다. 앙산의 방에 들어서자 마자 암두는 방석을 들고 “화상”하고 불렀다. 앙산선사가 불자(拂子)를 집어들려 하자 암두는 “매우 좋은 일입니다.”라며 인사했다.

▲ 삽화=강병호 화백

뒤에 또 덕산선사를 배알했다. 암두는 방석을 들고 법당에 올라가서 이리저리 살폈다. 덕산선사가 “어찌 되었는가?”하고 물으니 암두스님이 일할했다. 덕산선사가 이르시기를 “노승이 어디가 나빠서 할을 받았는가?”하자 암두스님은 “양중(兩重)의 공안”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해서 암두는 덕산선사 문하에서 설봉과 함께 수행이력을 쌓아 이윽고 덕산선사의 인가를 받고 법을 잇게 되었다.

암두는 덕산문하에서 설봉 · 흠산의 두 벗과 함께 종지(宗旨)를 상량(商量)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어느 때 설봉이 한 그릇의 물을 가리켰다. 그때 흠산은 “물 맑으면서 달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러자 설봉은 “물 맑으면서 달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반대로 말했다. 두 사람의 뜻이 양단으로 갈라지는 것을 본 암두는 갑자기 물그릇을 발로 차버렸다.

암두가 설봉과 함께 덕산선사의 곁을 떠나려고 하직인사를 올렸다.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라는 덕산선사의 물음에 “하산 후 스승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간 취한 소득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코자 합니다.”고 하였다. 이후부터 암두는 악주에 주석하였는데 그의 가르침을 배우려는 학승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때마침 당 무종의 폐불정책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던 터라 암두도 피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득이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나룻배의 뱃사공이 되었다. 강가 기슭에 한 개의 판목을 걸어놓고 손님이 와서 두들기면 움막에서 나와 배를 띄웠다. 이렇게 해서 겨우 굶주림을 면하였다고 한다. 뒤에 또 동정호반의 와룡산(臥龍山)에 초암을 짓고 살았다.

암두스님의 종지(宗旨)에 ‘3단(三段)의 의(義)’라는 것이 있다. 암두는 이에 대해 말하길 “제1단의 의는 이우(伊宇)의 3점을 말하는 바 제1에 동쪽으로 가서 1점을 쳐 여러 보살의 눈을 뜨게 한다<点開>. 제2에 서쪽으로 가서 한 점을 쳐 여러 보살의 명근(命根)을 점한다. 제3에 상방(上方)을 향하여 1점을 쳐 여러 보살의 꼭대기에 점한다. 이상을 제1단의 의라 한다. 또 나의 교의(敎意)는 마혜수라(摩醯首羅 색계의 정상인 천신의 이름)의 면문을 벽개(劈開 가는 금이나 흠이 생겨 갈라짐)해서 일쌍안(一雙眼)을 수립하는 것과 같다. 이상은 제2단의 의다. 나의 교의는 도독고(塗毒鼓)를 쳐 한 번 소리가 나면 이를 듣는 자는 모조리 상망(喪亡)한다. 이것이 제3단의 의다.”라고 했다.

당 광계년간(光啓年間)에 도적들이 일어나 주민들을 괴롭히는 터라 대중들은 모두 피난했다. 그러나 암두스님만은 편안하게도 암실에 단좌하고 있었다. 하루는 도적들이 몰려와 물건을 찾았지만 어느 승가와 마찬가지로 도적들이 만족할만한 물건이라곤 없었다. 도적들은 성을 내며 스님에게 칼을 대 죽였다. 스님은 신색자약한 큰 음성을 내어 일후(一吼)하곤 세상을 떠났다. 스님의 고함소리는 십 수백 리까지 들렸다고 한다. 광계 3년 4월 8일의 일이다. 이때 스님의 세수 60세다. 문도들이 뒤에 다비하니 사리가 49과가 나와 탑을 세워 봉안했다. 희종황제가 청엄대사(淸嚴大師)란 시호를 내렸다.

암두배할(巖頭拜喝)

암두가 덕산선사를 찾아갔다. 문턱에 걸터앉아 물었다. “범부냐, 성인이냐?”하니 덕산선사가 할했다. 암두는 곧 절했다. 동산선사가 이를 듣고 말하길 “만약 이것이 활공(豁公)이 아니었다면 크게 승두(承頭)하기 어렵지 않았으리.” 이에 대해 암두 말하길 “동산 늙은이는 호악(好惡)을 모른다. 그때 나는 한 손은 들어 올리고 한 손은 누르고 있었다.”고 했다. 《종용록》 제22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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