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는 어느 날 상당하여 한 승려를 불러내 단상에 세워놓고 대중을 향하여 “이 중에게 절하라.”고 명했다. 대중이 모두 절하고 나자 선사는 “이 중에게 무슨 좋은 점이 있어 대중으로 하여금 절하게 했는가?”하고 물었다. 아무도 이에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또 어느 때 민의 부인이 사람을 시켜 스님의 옷을 보내왔다. 그러자 선사는 심부름꾼을 향하여 “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받아주실 것을 바란다.”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잠시 뒤 심부름꾼이 다시 와 “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받았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이튿날 선사가 민부인을 만났을 때 부인은 “어제 진실로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고 인사했다. 그러자 선사는 “어제 받으신 것을 지금 봬주시겠습니까?”하니 부인이 양손을 펴 받았다는 것을 돌려주는 흉내를 내었다. 그때 옆에 있던 민이 “처의 받았음을 돌려드린 것은 스님의 뜻에 어떠한지요?”하고 물었다. 선사는 “조금 미흡한 데가 있습니다.”하였다. 이에 민이 “그렇다면 스님의 의견은 어떠하신지요?”하고 다시 물었다. 선사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민은 “대사의 불법은 심원하여 사의(思議)하기 어렵다.”고 말하며 감동했다.
당 장경 3년에 입적했다. 와태부는 탑을 세워 공양했다.

장경아라한삼독(長慶阿羅漢三毒)

 "여래의 말이란 뭔가?"
 "가서 차나 마시지요."
 
언젠가 장경선사가 “아라한에게 세 가지 독이 있다한다 해도 여래에게는 방편과 진실 같은 두 가지 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여래도 일자불설(一字佛說)은 아니지만 두 가지 말을 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보복이 “여래의 말이란 어떤 것인가요?”하고 물었다. 장경선사는 “너 같은 귀머거리는 말해도 듣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보복은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것을 보니 여래의 말을 모르는 모양이군.”하고 받았다. 장경선사는 “그래, 여래의 말이 뭐냐?”하고 되묻자 보복은 “가서 차나 마시지요.”하였다. 《벽암록》 제95

69. 구봉도건(九峰道虔 ?∼? 靑原下)

균주구봉(筠州九峰)의 도건(道虔)선사는 복주후관 사람으로 속성은 유(劉)씨다. 석상선사(石霜禪師)로부터 법을 이었다. 처음에는 구봉에서 살았는데 그를 따르는 수행자들이 매우 많았다. 뒤에 홍주에 주석하면서 그곳에서 입적했다. 대각(大覺)이란 시호를 받았다.

구봉두미(九峰頭尾)

한 스님이 구봉에게 물었다. “머리[頭]는 어떠한 것입니까?” 구봉선사는 “눈을 뜨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하였다. 스님은 또 꼬리[尾]는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구봉선사는 “만년의 잠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스님은 다시 “머리가 있고 꼬리가 없을 때는 어떠합니까?” 물었다. 이에 구봉이 답하기를 “ 끝에 귀(貴)하지 않으리라.”하였다. 스님은 또 “꼬리는 있으면서 머리가 없을 때는 어떠합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구봉은 “싫다 하더라도 힘이 없다.”하였다. 스님이 이번엔 “머리와 꼬리를 둘 다 갖고 있을 땐 어떠합니까?” 물었다. 구봉은 이에 대해 “아들 손자를 얻어 방안[室內]을 모른다.”고 답했다. 《종용록》 제66

▲ 삽화=강병호 화백

구봉불긍(九峰不肯)

구봉이 석상선사 곁에서 시자가 되었다. 석상선사가 입적하신 뒤 대중들이 수좌를 청해서 주지를 승계할 것을 바랐다. 그러나 구봉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봉이 말하길 “내가 물을 터이니 기다려라. 만약 선사의 뜻을 헤아리게 되면 선사와 같이 시봉하리라. 선사는 말씀하셨다. “‘쉬어가고 머물다 가며 일념을 만년같이 하여 가고, 번뇌망상 없이 가며 일조백련(一조白練)해서 가라’하였다. 말하라. 어느 곳의 일을 밝힐 것인가.” 좌중(座中)에서 말하길 “일색변사(一色變事)를 밝히는 것입니다.”하였다. 구봉이 이르길 “그렇다면 아직 선사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향을 피워 오라.” 좌중에서 향을 피워 말한다. “만약 선사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향연이 일어나는 곳에 갈 수 없다.”말을 끝내곤 곧 좌탈(坐脫)했다. 구봉이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좌탈입망은 없는 것이 아니니 선사의 뜻은 아직 꿈에서도 볼 수 없었다.” 《종용록》 제96

70. 대광거회(大光居誨 ?∼? 靑原下)

담주 대광산의 거회선사는 경조(京兆)사람이다. 처음 출가하여 석상선사(石霜禪師) 곁에서 수행하였는데 그 수행방식은 장좌불와(長座不臥)였다. 삼베옷에 짚신을 신고 자신의 일신은 결코 돌보지 않으며 오로지 대법을 위하는 열렬한 신심이었다. 더욱이 석상선사를 모시기를 20여년을 하면서 절대 흐트러짐이 없었다. 석상선사는 그런 그가 완숙의 경지에 있음을 간파하고 그 득도를 시험한 후 크게 안심하였다. 따라서 대중이 그를 청하면 출세주지(出世住持)케 했다.
하루는 한 승려가 나와서 물었다. “달마는 조(祖)가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에 스님은 “조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그 승려가 다시 “이미 조가 아니라면 지금에 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하니 스님은 “그저 그대들이 천거하지 않은 때문이다.”고 말했다. 승려는 또 “우리들이 천거한 뒤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하니 스님은 “지금 조로 삼기에는 모자란다.”고 했다.

대광저야호정(大光這野狐精) [대광불작무 大光佛作舞]

한 스님이 대광선사에게 물었다. “저 금우선사(金牛禪師)의 기행(奇行)에 대해 장경선사(長慶禪師)가 ‘끼니에 대한 고마움’이라고 대답했다는데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고 물었다. 그러자 대광선사는 잠자코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를 본 스님이 절을 했다. 대광선사가 “대체 무엇을 보고 절을 했느냐?”물으니 이번에는 스님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대광선사는 “이 여우 귀신같은 놈!”하고 크게 꾸짖었다. 《벽암록》 제93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