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화 = 강병호 화백

80. 월주 건봉(越州 乾峰, ?∼?)

월주의 건봉 화상은 법을 동산 양개 선사로부터 이었다.

건봉법신(乾峰法身) 〔건봉일로(乾峰一路)〕

건봉 선사에게 어느 때 한 스님이 묻기를 “시방 박가범에 일로 열반문이라 하니 미심쩍도다. 노두는 어디 있는 것입니까?” 하였다. 건봉 선사가 주장자를 점기하여 획일획하여 말했다. “이에 있다.” 후에 그 스님이 운문 스님에게 가르침을 청하니, 운문 스님이 선자를 점기하여 말하기를 “선자 발조하여 삼십삼천에 올라가 제석천의 콧구멍에 축착한다. 동해의 잉어를 한 대 치면 비가 분(盆)을 기울이는 것과 같다.”고 했다. - 《무문관》 제48, 《종용록》 제 61

81. 청림 사건(靑林 師虔, ?∼?)

균주 동산(筠州 洞山)의 제3세 사건 선사는 처음에 협산에서 와서 동산 양개 선사로 갔다.

양개: 요즘 어디 있었느냐?
사건: 무릉의 본에 있었습니다.
양개: 무릉의 법도에 이곳과 닮은 것이 무엇이냐?
사건: 호지(胡地) 겨울에 대죽순을 뽑으리라.
양개: 다른 시루에 향반(香飯)을 지어 이 사람을 공양하리라.

여기서 사건은 양개 선사의 방을 나왔다. 양개 선사는 사건이 나간 뒤에 “저 제자가 앞으로 천하를 주살(走殺)하게 되리라.”하고 칭찬했다.

사건은 양개 선사 밑에서 수행한 후 산남부의 청좌산(靑銼山)에 가 주암(住庵)하기를 10년에 이르렀다. 어느 날 갑자기 양개 선사의 유언을 되새겨 “정말로 군몽(群蒙)을 이롭게 하리라. 아니 소절(小節)에 구애하지 않으리.”라고 말하고, 수주에 이르러 대중의 청을 받고 토문의 소청림난야에 살았기 때문에 청림이라 호했다.

청림사사(靑林死蛇)

한 스님이 청림 선사에게 물었다. “학인이 길을 걸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청림 선사는 “대로에서 죽은 뱀〔死蛇, 불도의 진리를 말함〕과 만나리.”라고 대답했다. 이어 청림 선사는 그 스님에게 당두(當頭)하는 일이 없도록 권했다. 이에 스님은 “당두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청림 스님은 “역시 회피할 곳이 없다.”고 답했다. 스님이 또 물었다. “정말 그러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청림 선사는 “도리어 잃어버린다.”고 했다. 스님은 “미심스럽지만 어느 곳으로 가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선사가 말하기를 “풀이 무성하여 찾을 곳이 없다.”했다. 스님이 “화상도 또한 모름지기 제방해서 비로소 얻을 것입니다.”하니 청림 선사가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이는 으뜸의 독기(毒氣, 의식 분별 이전의 내면에 계당하는 것을 이름)”라고 감탄했다.

82. 용아 거둔(龍牙 居遁, 835∼923, 曹洞宗)

담주 용아산의 거둔 증공(居遁 證空) 선사는 무주 사람이다. 출가하여 수구한 후 처음 역방에 올라 취미(翠微) 선사에게 갔으나 한 달이 넘도록 하나의 교시도 내리는 바가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그 뜻을 물었다. 그러자 취미 선사는 “뭘 싫어하나 보군.”하고 따졌다. 거둔은 또 동산 양개 선사를 찾았으나 양개 선사마저 “어째서 노승을 괴득(怪得)하지 못하는가.”나무랐다.

그 뒤 재차 취미 선사에게 가서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의 참뜻을 물었다. ‘조사서래의’는 선승 사이에서 빈번히 취급되는 말로서 ‘불법의 참뜻’, ‘성체제1의’ 등과 같은 맥락의 뜻으로 쓰인다. 이에 취미 선사는 선판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선판을 갖다 주자 취미 선사는 용아 스님을 후려쳤다. 선판에 맞은 용아 스님은 “칠테면 더 쳐보십시오. 그러나 조사서래의는 없지 않습니까?”하고 말했다.

용아 스님은 다음에 임제 의현 선사를 찾아가 똑같이 ‘조사서래의’의 참뜻을 물었다. 임제 선사는 방석을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시킨 대로 방석을 갖다 주자 취미 선사와 마찬가지로 방석으로 후려쳤다. 용아 스님은 “칠테면 더 쳐보십시오. 그러나 조사서래의는 없지 않습니까?”라며 같은 말을 했다. ‘조사서래의’를 획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뒤에 한 중이 용아 스님을 보고 “스님이 행각할 때 두 존숙께서 ‘조사서래의’를 가르쳐 주시던가요?”하고 물었다. 그때 용암 스님은 “가르쳐 주기는 했는데 ‘조사서래의’는 없었다.”고 답했다.

이렇게 해서 용아 스님은 대덕들을 역방하고 다녔으나 미오를 풀지 못한 채 양개 선사 밑에 머물며 대중들과 함께 참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용아 스님은 양개 선사를 향하여 “조사서래의는 어떤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이전부터 획득하지 못했던 숙제를 제기한 것이다. 양개 선사는 용아 스님을 보고 말했다. “동수(洞水)가 역류하는 것을 기다려 그때 그대에게 말하리라.”고 답했다. 이 한마디 말을 듣고 용아는 비로소 ‘조사서래의’의 뜻을 깨달았다.

그 뒤 양개 선사 밑에서 복근(服勤)하기를 8년, 이윽고 호남의 마(馬) 씨의 청에 따라 용아산으로 가서 법당을 걸고 평생을 보냈다. 스님이 임종할 때가 되어 크나 큰 별이 하늘에서 방장 앞에 떨어졌다고 하는 기서(奇瑞)가 있었다고 한다.

용아서래무의(龍牙西來無意)

용아 선사가 취미 화상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무엇 하러 왔습니까?”하고 물었다. 취미 화상은 “선판을 좀 갖다 주게나.”하고 말했다. 용아가 선판을 갖다 주니 취미 화상은 다짜고짜 그것으로 후려쳤다. 용아는 “칠테면 치십시오. 그런다고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알 수는 없습니다.”했다.

용아 선사는 또 임제 화상에게 “달마가 중국에 무엇 하러 왔습니까?”하고 물었다. 임제 화상도 “저 방석 좀 갖다 주게.”했다. 용아가 방석을 갖다 주니까 임제 화상 역시 그것으로 철썩 때렸다. 용아는 “때릴 테면 때리십시오. 그런다고 달마가 서쪽에서 온 목적이 해결되진 않습니다.”하였다. - 《벽암록》 제20

송운 스님 | 선학원 총무이사·아산 보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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