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 설봉선사가 찾아왔다. 투자스님은 암자 앞의 한 개의 돌을 가리키며 “삼세의 제불이 모두 이 안에 있으리.”라고 말했다. 설봉선사는 이 말을 듣고 “모름지기 이 안에 있지 않은 자가 있다는 것을 알지어다.”하였다. 투자스님은 “모르겠다. 칠통(漆桶 번뇌와 망상)이로다”고 응했다. ‘불회칠통(不會漆桶)’은 사람들을 만날 때 투자스님이 항상 쓰는 상투어였다. 설봉선사가 어느 날 떠나려 하자 투자스님은 문 앞까지 전송했다. 헤어짐에 있어 투자스님은 새삼스레 “설봉좌주!”하고 불렀다. 설봉이 고개를 돌려보니까 “여행길 조심해 가십시오.”하고 친절히 인사했다. 투자의 상량은 늘 친절하였는 바 그의 사람 접화방식은 늘 이렇듯 친절했다고 한다.
스님이 투자산에 살기를 30여년. 사방에서 몰려와 참문(參問)하는 운납이 항상 방을 가득 채웠다. 중화(中和)연간에 도적들이 일어나 천하를 어지럽히고 있을 때 한 폭도가 있어 스님에게 칼을 들이 댄 일이 있었다. 그때 스님은 “나는 여기 있으면서 설법하는 사람이다.”하고 태연히 미동도 않고 앉아있자 폭도는 그 덕과 기에 눌려 오히려 배복하며 의복을 벗어 보시했다고 한다.
건화(乾化) 4년 4월 6일 입적했다. 시호는 자제대사(慈濟大師)라 한다.

투자일체불성(投子一切拂聲) [투자일체성 投子一切聲]
한 스님이 투자선사에게 “이 세상의 모든 소리가 부처님의 목소리라 하는데 정말입니까?”하고 물었다. 선사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님이 “그럼 똥 누는 소리나 주발에 뜨거운 물 따르는 소리도 부처님의 목소리입니까?”하고 다시 물었다. 이때 선사가 스님의 머리를 한 대 딱 쳤다. 그래도 스님은 또 물었다. “조잡한 말도 정중한 말도 모두 제1의 진리에 맞지 않는다 했는데 그러합니까?” 선사가 이번에도 “그렇지.”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님은 “그럼 선사를 한 마리의 당나귀라고 불러도 되겠군요.”하고 말했다. 투자선사는 그 스님을 다시 한 번 탁 내리쳤다. 《벽암록》 제79

67. 보복종전(保福從展 ?∼928 靑原下)

장주 보복원의 종전선사는 복주사람으로 속성은 진(陳)씨이다. 15세 때 설봉의존을 따라 득도하고 18세 때 본주의 대중사(大中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오(吳)와 초(楚)나라를 오가면서 역방행각한 뒤에 돌아와 설봉선사를 모시고 있었다. 어느 날 설봉선사가 보복을 불러 물었다. “깨닫고 돌아왔는가?” 이에 보복이 선사 가까이 가려하자 설봉선사가 주장자로 가로막았다. 이때 보복은 약간이나마 깨닫는 바가 있었다.
보복은 설봉선사 밑에 있으면서 구도에 남다른 열정을 불살랐다. 동학(同學)의 장경혜릉(長慶慧稜)과 법형(法兄)인 현사사비(玄沙師備)와 함께 옛 선사의 공안을 열기해서 종지를 상량하길 즐겼으며 유산(遊山)하는 도중이라도 종지를 상량할 만큼 열정적으로 구도에 매진했다.
양(梁) 정명(貞明) 3년 장주의 자사 왕흠승(王欽承)이 보복선원을 세워 스님을 청해 거기에 머물게 했다. 개당식 당일 왕 자사가 무릎 꿇고 세 번 청하여 스님을 상당케 했다고 한다. 가르침을 배우러 온 납자들은 7백 명을 밑돌지 않을 정도로 늘 북적였다.
당(唐) 천성(天成) 년 3월 21일 입적했다. 《전등록》에 실려있는 법사(法嗣)가 19명에 달하고 있다.

보복장경유산차(保福長慶遊山次) [보복묘봉정 保福妙峰頂]
보복과 장경이 산놀이를 갔을 때 보복이 산꼭대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묘봉정(妙峰頂)일세.” 그러자 장경은 “그렇긴 하네만 애석하게도 아직 멀었네.”하였다. 뒤에 경청선사(鏡淸禪師)에게 ‘묘봉정’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만약 손공(孫公=장경)이 아니었다면 공연히 온 세상이 아무 것도 모르는 엉터리 같은 놈들로 가득 차게 돼버렸을 걸세.”하고 쏘아붙였다. 《벽암록》 제23

▲ 삽화=강병호 화백

68. 장경혜릉(長慶慧稜 ?∼932 靑原下)

 '말 일' 대의단 삼아 정진

복주장경의 혜릉선사는 항주염관 사람으로 속성은 손(孫)씨이다. 13세 때 소주 통현사(通玄寺)로 출가하여 수계한 뒤 제방선원을 역방했다. 처음에 영운(靈雲)선사를 뵙고 “불법의 참뜻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영운선사는 “나귀 일이 끝나기도 전에 말 일이 닥쳤구나.”하고 답했다. 혜릉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 말은 대의단(大疑斷)을 일으켜 늘 혜릉의 머리에 남아있었다. 그는 이 대의단을 풀기 위해 설봉의존과 현사사비의 두 선사 사이를 20여 년간 오갔다. 이 기간 동안 일곱 장의 방석이 모두 닳아 못쓰게 됐음에도 대의단은 풀리지 않았다. 혜릉은 죽을 각오를 다지며 더욱 근수(勤修)를 쌓았다. 그런 어느 날 발을 말아 올리려고 하다 부딪혀 홀연히 깨달았다. 혜릉은 게송을 지어 말했다.
“야대차(也大差). 발을 말아올리고 천하를 본다. 누군가 무엇으로 종지를 알게 되는가 묻는다면 털게(拂子)를 들어 입을 치겠다.”
그때 설봉선사가 혜릉이 깨달았다는 사실을 현사선사에게 이야기해도 수긍하려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설봉선사가 여러 스님을 친히 문신하던 중 혜릉에게 말했다.
“현사선사는 그대의 정오(正悟)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그대 만약 진실로 정오를 얻었다면 지금 대중들에게 일러보라.” 그러자 혜릉은 곧 게송으로 “만상 가운데 독로(獨露)의 몸, 오직 스스로 수긍하고 옛날 잘못 찾은 것을 지금 되돌아보면 불 속의 어름이로다.”고 말했다. 설봉은 현사선사를 뒤돌아보며 “이 정도면 되었지 않은가?” 물었다. 그러자 현사선사 역시 혜릉의 깨달음을 인가했다.
천우(天祐) 3년 천주(泉州)의 자사 태부 왕연빈(王延彬)이 청함에 따라 초경사(招慶寺)에 주석했다. 뒤에 대민사의 초청으로 장경에 돌아와 초각대사(超覺大師)로 이름 지어 살았다.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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