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나한계침(羅漢桂琛 862∼928 靑原下)

 무상에게 출가한 계침
 역방 중 사비에 깨달음


절강성 상산(常山) 출신의 나한계침 선사는 속성은 이(李)씨다. 어릴 적에 본부(本府)의 만세사(萬歲寺)에 들어가 무상대사(無相大師)를 따라 출가 득도했다. 처음에는 계율을 배웠으나 뒤에 남종(南宗)의 선을 배우고자 운거(雲居) 설봉(雪峰) 등 선사들을 찾아 역방했다. 궁극엔 현묘산의 사비선사(師備禪師)를 따라 참문했다. 이윽고 현오(玄奧)함을 회득(會得)하고 대사(大事)를 밝혀 그 법을 이었다.
뒤에 장목왕공(漳牧王公)이 한 정사(精舍)를 지어 지장원이라 이름하고 선사를 청하여 개당연법(開堂演法)케 했다. 또 장주의 나한원에 주석하면서 사방에서 모여드는 운납들에게 불법의 대의를 지니도록 가르쳤다. 천성(天成) 3년 민성의 옛터에 이르러 범우(梵宇)를 두루 유력하고 돌아와서는 갑자기 병을 얻어 며칠 안좌했지만 이윽고 입적했다. 선사의 나이 62세, 법랍 40세였다. 후당 명종으로부터 진응선사(眞應禪師)란 시호를 받았다. 그의 법사로는 유명한 법안문익(法眼文益)이 있다.

지장종전(地藏種田)
지장이 수산주(修山主)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수가 대답하기를 “남방에서 왔습니다.”하였다. “요즘 남방 불법은 어떠한가?” 다시 물으니 수는 “상량(商量)이 철철 넘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지장은 “내 여기 논에 씨 뿌려 곡식을 거두어 주먹밥을 먹는 것만 하겠는가?” 수가 다시 “삼계(三界)를 어찌 하시렵니까?”고 물었다. 지장이 말했다. “그대 무엇을 삼계라 말할 수 있는가?” 《종용록》 제12

지장친절(地藏親切)
지장이 법안에게 물었다. “상좌는 어디로 가는가?” 법안이 “이곳저곳을 행각하려 합니다.”하자 지장이 “무엇 때문에 행각하려 하는가?” 다시 물었다. 법안은 “잘 모르겠습니다.”하였다. 이에 지장은 “모르는 것도 불법에서는 친절한 것이라.” 했다. 이 말에 법안은 활연히 대오했다. 《종용록》 제20

72. 청량문익(淸凉文益 885∼958 法眼宗)

금릉 청량원의 문익(文益)선사는 여항(余杭) 사람으로 속성은 노(魯)씨이다. 당의 희종황제 광계 원년에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정지통원(定智通院)의 전위선사(全偉禪師)에 의해 삭발, 월주의 개원사(開元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는 또 명주 육왕사(育王寺)의 희각사(希覺師)에 따라 심지(心地)를 배우고 동시에 유학(儒學)을 찾고 시문(詩文)놀이도 즐겼다. 그러나 그도 잠시. 어느 날 심기일전해 모든 잡사를 벗어나 남복주(南福州)로 가 장경혜릉(長慶慧稜)선사를 찾았다. 여기에서 그는 공부에 깊이를 한층 더했다. 후년에 소주(紹州) · 법진(法進) 두 선사와 함께 행각에 나섰다. 행각 중 눈이 내려 발이 묶이게 되자 지장원에서 쉬어간 일이 있었다. 이때 지장원의 주인이었던 나한계침선사가 문익에게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문익이 행각하고 있다고 하자 나한은 다시 “행각하는 게 어떠합니까?”고 물었다. 문익이 “아직 모르겠다”고 하자 나한이 “모르는 것도 불법에서는 친절한 것이다”고 답했다.

▲ 삽화=강병호 화백

또 행각에 나선 세 사람이 조론(肇論)에 대해 의논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조론 중 ‘천지와 나는 동근(同根)’이라는 대목에 가서 나한이 문익에게 “산하대지와 상좌와는 같은 것이요, 다른 것이요?”하고 물었다. 문익이 “다른 것입니다.”하고 답하자 나한은 양손가락을 세웠다. 문익이 이번엔 ‘같은 것’이라고 답하자 나한은 재차 두 손가락을 세웠다.
눈이 그쳐 세 사람은 나한선사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떠나기로 했다. 나한이 일주문까지 전송하기 위해 나왔다. 헤어짐에 있어 나한선사가 마당에 있는 돌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돌은 마음 안에 있는가, 마음 밖에 있는가?” 이에 문익이 “마음 안에 있습니다.”고 답했다. 나한은 “행각하는 사람이 무슨 이유로 조각돌을 마음 안에 두고 돌아다니는가?”고 되물었다. 문익은 무엇인가 답하고자 했으나 딱히 답할 수 없었다. 문익은 행각을 접고 지장원에 머물며 이 문제를 풀기로 했다. 날마다 그의 견해를 나한선사에게 올렸으나 한 달이 넘도록 이렇다 저렇다 어떠한 답도 들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나한이 낙담해 있는 문익을 불러 말했다.

나한: 불법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문익: 저는 말에 궁하고 이론이 다했습니다.
나한: 만약 불법을 논하고자 한다면 일체견저(一切見底)로다.

이 한마디 말을 듣고 문익은 대오했다. 이후 나한계침을 모시고 수행하기를 몇 해, 이윽고 그 오당(奧堂)에 들어가서 의법(衣法)을 이었다.
문익선사는 깨달음 후에도 천하의 총림을 역람하고자 선사에게 청하여 행각의 길에 올랐다. 먼저 임천주(臨川州)로 가 숭수원(崇壽院)에 살면서 법당(法撞)을 걸었다. 선사의 덕망을 듣고 몰려오는 자가 족히 5백명이 넘었다고 한다. 한편 남당주(南唐主)의 서경(徐璟)은 문익선사의 도풍을 그리워하여 금릉의 보은선원(報恩禪院)으로 선사를 맞이하였다. 선사는 뒤에 이곳에서 청량원으로 주석처를 옮겨 후학을 제접했다.

어느 날 선사는 상당해 말했다.
“출가한 사람이 그저 때에 따라 절후(節候)가 되면 얻으리라. 한(寒)은 곧 한이요, 열(熱)은 곧 열이라. 불설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당연히 시절인연을 봐야 하리라. 고금에 방편이 적지 않다.” 선사는 또 삼계유심(三界唯心)을 칭송하여 그 뜻을 잘 파악하길 당부했다.
선사의 종풍은 전봉상주(箭鋒相拄)와 같은 모양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법안종의 특색이 되었다. 문익선사는 금릉에 있으면서 조석으로 현지를 더욱 드높였기 때문에 여러 곳의 총림이 한결 같이 그 풍화에 따라 법을 배우고자 몰려들었다.

주나라 세종 현덕 5년 7월 17일 병을 얻었다. 국왕이 친히 예문을 보내왔다. 윤 7월 5일 머리를 깎고 몸을 깨끗이 씻은 후 대중에게 알리고 결가부좌하여 입적하였다. 선사는 입적하였음에도 마치 얼굴모습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세수 74세, 법랍 54세였다. 시호는 대법안선사(大法眼禪師)라 하기도 하고 대지장대도사(大地藏大導師)라고도 불렸다. 선사는 실로 법안종의 개조(開祖)로서 사법제자가 63인이나 되었다.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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