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적 선사는 정오에 이르러 승좌해서 대중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게를 남겼는데 이것이 임종게다.

연만칠십칠 무상재금일 年滿七十七 無常在今日
일륜정당오 양수반굴슬 日輪正當午 兩手攀屈膝
내나이 일흔일곱 죽음이 오늘에 왔네.
둥근 해는 한가운데 떴는데 두 손으로 굽은 무릅을 안아보네.

이 게를 남기고 선사는 양팔로 무릎을 껴안은 채 입적했다. 지통선사(智通禪師)란 시호가 내려졌다.
위앙종은 영우선사가 계셨던 ‘위산’과 스님이 있었던 ‘앙산’의 머리글자를 따서 ‘위앙’이라 명명한 것이다.

삼좌설법(三座說法)
앙산화상이 꿈에 미륵불 계신 데 가서 세 번째 자리에 앉았는데 한 스님이 백퇴(白槌 선원 등에서 대중에게 고할 때 정숙하게 하기 위하여 치는 기구)하면서 말하기를 “오늘은 세 번째 앉은 스님의 설법이 있겠습니다.”하였다. 앙산화상이 곧 일어나 백퇴를 치고 말씀하시기를 “마하연의 법은 4구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절(絶)하니 똑똑히 들으라.”하였다. (꿈에서 깨어나 이 사실을 위산스님께 아뢰니 “그대는 이미 성인의 경지에 들어갔다”했다. 이에 앙산스님은 곧 절을 올렸다 한다.) 《무문관》 제25 《종용록》 제90

앙산불증유산(仰山不曾遊山)
앙산화상이 찾아온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스님이 아뢰되 “여산에서 왔습니다.”하니 앙산화상이 또 “그렇다면 오로봉(五老峯)에는 가 보았겠네?”물었다. 스님이 “아직 못가봤습니다.”하니 앙산화상이 “그대는 여산에 살면서 어찌 산놀이도 못했는가.”하고 말씀하셨다. 운문선사가 이 말을 듣고 “그 말은 모두 자비심에서 한 말이지만 너무 친절했다”고 한다. 《벽암록》 제34

앙산심경(仰山心境)
앙산화상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느 곳 사람인가?” 스님이 말하기를 “유주(幽州)사람입니다.” 앙산화상이 또 물었다. “그대는 그 곳 생각을 하고 있는가?” 스님이 답하기를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하자 앙산화상은 “생각하는 주체는 마음이며 대상은 경계이다. 그 곳에는 산하대지와 누각과 사람 짐승들이 있는데 생각하는 것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는가?” 물었다. 스님이 아뢰기를 “저의 이 경계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하니 앙산화상이 “너는 그래도 믿음의 신위까지 갔으나 깨달음의 경지는 아직 얻지 못했구나.” 하였다. 스님은 “달리 시교할 것이 있습니까?”물으니 화상이 이르시길 “다른 뜻이 있거나 없거나 그대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대가 이해한 정도에 의하면 단지 현묘함만을 얻었을 뿐이니 자리를 잡고 앉아 옷을 풀어 헤치면 뒷날 스스로 알게 되리라.”하였다. 《종용록》 제32

▲ 삽화=강병호 화백

중읍선후(中邑獮猴)
앙산스님이 중읍(中邑)에게 물었다. “불성의 참뜻이란 어떤 것인가?” 중읍이 말하였다. “내 그대를 위해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할 것이네. 방에 영창이 여섯 개 있는데 그 안에 원숭이 한 마리를 넣고 밖에서 사람들이 성성(狌狌 족제비)이라 말하면 곧 이에 응한다. 이와 같이 여섯 개의 창에서 한꺼번에 부른다면 함께 답하는 것과 같다.” 앙산이 이에 말하기를 “원숭이가 잠들었을 땐 어떠한가?” 중읍은 곧 선상을 내려와 파주(把住 수도자를 지도함에 붙잡아 있게 함)하면서 “족제비, 내 너와 같이 상견하다.”하였다. 《종용록》 제72

앙산수분(仰山隨分)
한 스님이 앙산화상에게 물었다. “화상스님께서는 글자를 아십니까?” 앙산화상이 “조금 알지.”하니 스님이 오른 쪽으로 한 번 돌고 나서 “이것은 무슨 자(字)입니까?”함에 앙산화상은 땅바닥에 열십(十)자를 썼다. 스님은 또 왼쪽으로 한 번 돌고 나서 “이것은 무슨 글자입니까?”하고 물었다. 앙산화상은 십자를 만(卍)자로 만들어 보였다. 스님이 또 원상을 그리고 두 손으로 마치 아수라가 일월(日月)을 손바닥에 놓은 모양을 하면서 “이것은 무슨 글자입니까?”함에 앙산화상은 원상을 그리어 만자를 둘러쌌다. 중이 누지(樓至)의 세(勢)를 지음에 앙산화상은 “그렇고 그러니 그대는 잘 지녀라.”하였다. 《종용록》 제77

53. 향엄지한(香嚴智閑 819∼914 潙仰宗)

 그림의 떡 허기 못채워
 지니고 있던 책 모두 불살라

등주(鄧州) 향엄(香嚴)의 지한(智閑)스님은 청주사람으로 어릴 적부터 세상을 싫어했다. 일찍이 부모를 하직하고 백장회해(百丈懷海)선사에 의탁해 출가했다. 백장선사가 입멸한 이후에는 위산영우선사에게 갔다. 위산선사는 지한이 법기(法器)임을 알고 그 지광(智光)을 격발(激發)해 보고자 질문을 던졌다. “그대에게 내 평생 공부한 학해(學解) 및 경권등 책자에서 얻은 지식을 묻지 않겠다. 그대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기 전 동서를 분간하지 못했을 때 본분사를 한마디 일러보라. 내가 너에게 수기하리라.” 이 말씀에 지한은 까마득하여 무엇이라 얼른 대답할 수 없었다. 한참 생각한 끝에 몇 번 견해를 말씀드렸지만 위산화상은 지한의 대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한은 하는 수 없이 “그렇다면 위산화상께서 말씀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했다. 위산화상은 “내 견해를 설하더라도 그대의 안목에는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다.”며 말을 끊었다.
지한은 자기 방에 돌아와서 위산화상에 대한 물음에 대응할 어구를 이제껏 배워온 책에서
뒤져 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스스로 탄식하여 말하되 “그림의 떡은 허기를 채울 수가 없구나.”하였다. 그리하여 가지고 있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울면서 말했다.
“금생에 불법을 깨닫지 못한다면 늘 밥이나 축내는 중이 될 수 밖에 없다.” 지한은 심사숙고한 끝에 위산화상을 하직하고 남양 무당산에 들어가 혜충국사의 유적을 보고 이윽고 거기에 주석하게 되었다.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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