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덕산선감(德山宣鑒 783∼865 靑原下)

 노파의 물음에 눈앞 캄캄
 '30봉' 유명 종풍 상징해

낭주 덕산의 선감선사는 속성이 주(周)씨이다. 어릴 적에 출가하여 처음에 율장을 연구하고 또 성상학(性相學)에 정진했다. 촉에 있을 때 평소 《금강반야경》을 강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금강(周金剛)’이라 불리었다. 이른바 법상종의 강학승(講學僧)이었다. 덕산스님은 “천겁에 부처님의 위업을 배우고 만겁에 부처님의 세행(細行)을 닦은 연후에 성불한다.”는 금강경의 ‘유정후득지중(喩定後得知中)’의 설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남쪽에서는 선종이 매우 번성하여 즉심시불(卽心是佛)이 유력하게 파급되고 있었다. 덕산스님은 이 사실을 듣고 매우 분개했다. “즉심시불을 외치는 자는 마구니이다. 감히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며 허풍을 떨다니 용서할 수 없다. 내가 그들의 소굴을 습격하여 그 종자들을 한방에 때려 부수겠다.”하곤 《금강경 청룡소》를 어깨에 메고 남방에로의 여행을 떠났다. 의기양양하게 걷는 모습이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용감한 병사와 같았다. 먼저 예주에 들렀다. 마침 길가에 한 노파가 떡을 팔고 있었다. 마침 시장하던 터라 덕산스님은 점심 요기를 할 생각으로 떡값을 흥정했다. 노파는 덕산스님이 큰 보따리를 지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대체 그 짐은 무엇이요?” 덕산스님은 우쭐한 기분으로 “금강경 청룡소요”라 대답했다. 이에 노파가 말했다. “내가 여쭈어 보는 말에 대답만 잘 하시면 떡을 거저 드리겠소.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고 했소. 그런데 스님은 어느 마음으로 점심을 들고자 하오?”
노파의 질문에 덕산스님은 눈앞이 캄캄했다. 해료(解了)와 사량(思量)으로 답할 성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허탈한 마음으로 용담(龍潭)을 향해 걸었다. 거기엔 당시 남방을 대표하는 선객의 거장 숭신선사(崇信禪師)가 살고 있었다. 덕산스님은 법당 앞에 이르러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이미 용담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용담에 이르고 보니 연못도 용도 볼 수가 없구나.” 그때 용담숭신선사가 나와 말을 받았다. “아닐세. 그대는 용담에 제대로 왔네.”그날 밤 덕산스님은 용담숭신선사와의 법거량을 통해 호되게 당했다. 그러다 밤이 깊어 선사의 방을 물러나오게 되었다. 선사가 덕산스님에게 호롱불을 건넸다. 덕산스님이 이를 받아드는 순간 선사는 재빠르게 입을 불어 호롱불을 껐다. 이 순간 덕산스님은 활연히 대오했다. 어두웠던 마음에 불빛이 충만하게 밝아오는 것이었다. 그리곤 선사에게 큰 절을 올리며 말했다. “이제부터 천하의 조사들이 하는 일에 의심을 두지 않겠습니다.”

▲ 삽화=강병호 화백

그 다음날 용담숭신선사가 상당해서 대중에게 일렀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이 있다. 이는 검수와 같고 입은 혈분과 같아서 때려도 꿈쩍하지 않으리라. 다른 날 고봉정상에 올라 나의 도를 크게 일으키리라.”
선사는 대중들에게 덕산스님을 소개했다. 덕산스님은 그날 심혈을 기울여 쓰고 소중히 짊어지고 온 《금강경 청룡소》를 법당 앞에서 불사르며 소리 높여 말했다.
“모든 현변(玄辯)에 궁할지라도 털끝 하나를 허공에 놓은 것과 같이, 세상의 추기(樞機 경론을 말함)를 다했다 해도 한 방울의 물을 깊은 골에 던지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해서 강학승이자 주금강 덕산스님은 훌륭한 선승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대 전기를 갖게 된다.

용담에 머물러 수업하기를 30년. 이윽고 그의 법을 이었다.

당의 무제(武帝)는 ‘3무1종’으로 불리는 폐불제(廢佛帝)의 한 사람이다. 그는 불교를 아주 싫어하여 만천하에 폐불의 영을 내리고 점검했다. 덕산스님은 이 난을 피하여 독부산의 석실에 숨어 있었다. 대중(大中)초에 이 폐불령이 풀렸을 때 무릉 태수 설정망(薛廷望)은 덕산에 있었던 정사를 재건해 고덕선원(古德禪院)이라 이름하고 여기에 덕산스님을 모시려 했다. 그러나 덕산스님은 독부산의 석실에서 나오는 것을 승낙하지 않고 버텼으나 태수의 여러 가지 계교와 강압에 의해 고덕선원에 주석케 되었다. 덕산스님은 이곳에 주석하면서 선풍을 크게 선양했다.

덕산스님의 종풍은 ‘30봉(三十棒)’으로 유명하다. ‘봉’은 덕산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어느 날 법회를 통해 봉을 매우 중시하는 발언을 한다.
“그대들이 바로 말하면 삼십 방을 때리고 틀리게 말하여도 삼십 방을 때리리라.” 정말로 엄격한 종풍이었다.
어느 날 임제의현선사가 덕산스님의 '30봉'소문을 듣고 낙포(洛浦)를 찾아가 물어보게 하였다. "바르게 말한 사람이 왜 삼십 방을 맞아야 하느냐 물어보라. 그래도 때리거든 시작하자마자 봉을 잡고 그에게로 밀어붙이게. 그리고 그가 어떻게 하는지 보게."
낙포는 임제가 시키는 대로 했다. 질문을 하자 덕산이 그를 때리려 했고 그 직전에 낙포는 봉을 잡아 채 그를 밀어 붙였다. 덕산은 아무 표정 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낙포가 돌아와 자초지종을 임제의현선사에게 말하니 임제는 “자네는 진심으로 덕산을 이해하였는가?”하고 물었다. 낙포가 머뭇거리자 임제는 그를 냅다 후려갈겼다.

덕산스님은 어느 날 상당해서 이렇게 말했다.
“불조(佛祖)에 대한 나의 견해는 그대들과 다르다. 부처도 조사도 없고 보리달마는 냄새나는 야만인이다. 석가모니는 마른 똥을 닦는 밑씻개요, 문수보현은 변소치는 사람이다. 삼먁삼보리와 오묘한 깨달음이란 족쇄를 벗어난 평범한 인간성에 지나지 않으며 보리와 열반은 당나귀를 매어두는 나무기둥에 불과하다. 12분교의 교학이란 귀신의 장부에 지나지 않고 종기에서 흐르는 고름을 닦아내는 알맞은 휴지일 뿐이다. 4과3현(四果三賢)과 초심십지(初心十地)는 황폐한 무덤에서 머뭇거리는 망령으로 자신조차도 구원하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그만이 할 수 있는 독설이자 놀라운 견식이 아닐 수 없다.

덕산스님이 병을 앓았을 때 한 중이 “세상에 병 앓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라 하니 “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그가 누구입니까?” 다시 물으니 “아야, 아야”라며 아픈 시늉을 냈다.

당의 함통 6년 12월 3일에 입적하였다. 세수 86세였다. 견성대사(見性大師)란 시호를 받았다.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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