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석상경제(石霜慶諸 807∼888 潙仰宗)

"한 알은 어디서 나왔나?"
"쌀 속에 벌레가 있다!"
 
담주 석상산(石霜山)의 경제(慶諸)선사는 노릉신감 사람으로 속성은 진(陳)씨다. 열세 살 때 홍정(洪井)의 서산소란(西山紹鑾)에 의해 출가, 스물 세 살 때 수구(受具)했다. 처음에 비니(毗尼)의 가르침을 배웠고 뒤에 대위산의 법회에 가서 미두(米頭)가 되었다. 어느 날 쌀 창고에서 키질을 하고 있는데 위산화상이 들렀다.
위산: 시주물을 떨어뜨리거나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라.
석상: 그런 일 없습니다.
위산: (땅바닥을 살펴본 뒤 한 알의 쌀을 집어 들고)그대는 떨어뜨리거나 버리는 일이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어디서 얻어온 것인가?
석상:…
위산: 이 한 알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백과 천알도 다 이 한 알로부터 나온 것이다.
석상: 백 천 알이 이 한 알에서 나왔다면 이 한 알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위산선사는 이 물음에 껄껄 웃으시며 방장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위산은 상당해서 “쌀 속에 벌레가 있다.”고 대중에게 알렸다.
석상은 다시 도오선사(道吾禪師)를 찾아 가르침을 접하고 마침내 심인을 얻어 대법을 이었다. 뒤에 장사의 유양가방(劉陽家房)에 세속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동산양개선사가 이를 알고 희주의 석상산에 살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석상산에 살기를 20년. 당의 담종황제가 자의(紫衣)를 하사하였다.
희종황제 광계 4년에 시적하니 시호를 보현대사(普賢大師)라 하였다.

간두진보(竿頭進步)
석상스님 말하기를 “백척간두에서 어떻게 걸을 것인가. 옛 어른들이 말하기를 백척간두에서 앉을 수 있는 사람이라도 아직 진(眞)이 되지 못하리라. 백척간두에서 모름지기 한 걸음 내디뎌보라. 시방세계에 전신(全身)을 드러내리라.”하였다. 《무문관》 제46

62. 조산본적(曹山本寂 840∼901 曹洞宗)

무주조산(撫州曹山)의 본적(本寂)선사는 천주포전(泉州蒲田)사람으로 속성은 황(黃)씨이다.
어렸을 땐 유학을 공부했다. 19세 때 출가하여 복주 복당현의 영석산에 들어가 삭발염의한 뒤 25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그리곤 동산양개선사를 찾아갔다.
동산: 그대의 이름은 무어라 하는가?
조산: 본적입니다.
동산: 본적이 그대의 이름인가?
조산: 말하지 않겠습니다.
동산: 왜 말하지 않는가?
조산: 본적이라 이름붙이지 않겠습니다.

▲ 삽화=강병호 화백

동산선사는 조산이 예사 법기가 아님을 눈치 챘다. 그리하여 그를 거두어들이자 조산은 수년간 동산에 머물면서 수행이력을 쌓았고 그 법을 이었다.
하루는 동산선사를 하직하고 떠나려했다.
동산: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조산: 불변이(不變異)한 곳으로 갈까 합니다.
동산: 불변이라, 굳이 갈 것 없지 않느냐?
조산: 떠나는 것도 불변이입니다.
동산 곁을 떠난 조산은 무주조산의 숭수원(崇壽院)에 살았고 또 뒤에 하옥산에서 살았다. 이 두 곳의 법석은 매우 번성하여 수행납자들이 구름같이 모였다. 후세에 조동의 종명은 실로 양개가 살았던 동산(洞山)과 본적이 살았던 조산(曹山)의 머릿글자를 한자씩 따서 명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본적선사의 종풍이 당시 총림 사이의 추중(推重)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원복원년(元復元年)의 여름밤, 시자에게 “오늘이 몇 월 몇 일인가?”물었다. 6월 15일이라 대답하자 “조산 일생동안 행각 가는 곳마다 오직 90일을 한 여름으로 했다.”는 말을 남기곤 다음날 아침 진시에 시적했다. 세수 62세 법랍 37세였다. 문인들이 진골을 받들어 탑을 세웠다. 칙명으로 원등대사(元燈大師)의 시호가 내려졌다. 탑은 복원(福圓)이라 한다.

청세고빈(淸稅孤貧)
조산선사에게 어느 날 청세(淸稅)라는 스님이 말하기를 “제가 대단히 외롭고 배고픕니다. 선사께서 한 턱 내십시오.”하였다. 이때 조산선사는 “세사리(稅奢梨 사리는 스님을 높여 부르는 말)야.”하고 불렀다. 청세가 응답하니 “청원백가의 술을 석 잔이나 마시고도 아직 입술도 젖지 않았다고 하느냐.”고 말했다. 《무문관》 제10

조산법신(曹山法身)
조산선사가 덕상좌(德尙座)에게 물었다. “부처님의 참법신은 아직 허공과 같다. 물체에 따라 형태를 나타내는 것은 물 속의 달과 같다. 그러한 참된 도리를 설할 것인가.” 덕상좌가 말했다. “나귀가 우물을 보는 것과 같다.” 이에 다시 조산선사가 말하기를 “매우 맞는 말인 듯하나 난 그저 팔성(八成)을 말했을 뿐이다.” 덕상좌는 이에 대해 “선사는 또한 어떠한가?”하니 조산선사는 “우물 속의 나귀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종용록》 제52

조산효만(曹山孝滿)
한 스님이 조산선사에게 물었다. “상복(喪服)을 걸치지 않았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산선사가 말하기를 “오늘은 효만(孝滿 부모상이 끝나는 것)이로다.”했다. 스님이 또 묻기를 “효만 뒤는 어떠합니까?”하니 조산선사가 “전주(顚酒 휘청거릴 정도로 마시는 술)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종용록》 제73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