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현사사비(玄沙師備 831∼908 靑原下)

복주현사(福州玄沙)의 사비종일(師備宗一)선사는 속성은 사(謝)씨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낚시를 즐겨서 한동안 향리와 남태강에서 어부생활을 하다가 나이 30세에 홀연히 출가의 뜻을 세워 부용(芙蓉)의 영훈화상(靈訓和尙)에게 출가했다. 출가 후 예장 개원사의 도현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깨달음을 향해 남들이 흉내내지 못할 각고의 수행을 쌓았다. 뒤에 설봉의존(雪峰義存)선사에게 사사하며 고행을 계속했다. 설봉선사는 고행정근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비두타(備頭陀)’로 불렀다. 하루는 행각하는 도중에 돌에 걸려 넘어지면서 발을 다치게 되는 순간 홀연히 깨달았다. 행각을 수습하고 설봉선사에게 되돌아와 마침내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그러나 현사는 깨달음 후에도 설봉선사 곁을 떠나지 않고 선사의 화도(化導)를 도왔다. 현사는 운문문언을 사형으로 하고 장경 보복과는 동문의 벗으로서 서로 친하게 지내며 종지를 연구하였다. 또 능엄경을 보고 심지(心地)를 발견한 바 있었다. 응기민첩(應機敏捷)하여 스스로 여러 경전의 참뜻을 꿰고 있었다. 따라서 현학(玄學)의 무리들이 해결 못하는 의문이 생겼을 땐 스님을 청익하여 그 분별을 구하기 예사였다.

 사비선사 문하 제1좌인
 나한과 그 제자 문익 배출

현사는 처음에 매계(梅溪)의 보응원(普應院)에 살았고 뒤에 현사로 옮겼다. 전국의 총림에서 그 종풍을 그리며 모여 든 학도가 항상 800명을 넘어 당을 가득 채웠으므로 문을 닫을 수 없었다 한다.
현사는 어느 날 스승인 설봉선사에게 한통의 편지를 올렸다. 설봉선사가 편지를 뜯어보니 백지만 석장 봉입되어 있을 뿐 아무 내용도 쓰여 있지 않았다. 설봉선사가 심부름 온 승려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그 승려가 “모르겠습니다.”하니 선사는 “군자는 천리동풍(千里同風)이란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야.”했다. 심부름 간 승려가 돌아와 현사에게 이 일을 전하니 현사가 말하길 “산두(山頭) 늙은이는 아직 차과(蹉過)도 모르는군.”했다. 승려가 “선사께서는 어떠합니까?”하자 선사는 “진한 봄날이 아직 춥다. 무엇이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이라 말했다.
또 어느 날 밤 나한계침(羅漢桂琛)과 방장에서 이야기 할 때의 일이다. 밤이 깊어 시자가 모든 문을 닫았다. 선사가 나한을 보고 “문을 모두 닫아버렸는데 어떻게 나갈 것인가?”하니 나한은 “누군가를 불러서 문을 만들지요.”했다. 선사의 문하 제1좌는 이 나한계침으로 평소 상량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나한은 훗날 그의 법사로 법안종의 비조인 청량문익(淸凉文益)을 배출하고 있다.

▲ 삽화=강병호 화백

현사삼종병인(玄沙三種病人) [현사접물이생 玄沙接物利生]

현사선사가 대중에게 물었다.
“이곳저곳 중들이 남들을 돕는다고 하는데 갑자기 세 가지 병신이 찾아오면 어떻게 교화할 것인가. 장님에겐 쇠뭉치를 쥐고 털채를 세운 들 보일 리가 없고 귀머거리에게 입이 아프게 지껄여봤자 들릴 리 없으며 벙어리에겐 아무리 말을 하려고 한들 말할 리 없으니 대체 어떻게 교화할 것인가? 그런 사람들을 교화할 수 없다면 불법의 영험 따위는 없지 않은가?”
한 스님이 그 뜻을 알 수 없어 운문선사에게 그 문제를 물었다. 운문선사는 “먼저 절을 하라.”했다. 스님은 그러면 가르침을 내릴 줄 알고 절을 하고 일어났다. 그러자 운문선사가 죽장으로 치려했다. 스님은 재빨리 뒤로 피했다. “넌 장님이 아니었군.” 운문선사가 말하면서 다시 앞으로 나오라고 불렀다. 스님이 다가오자 운문선사는 “넌 귀머거리도 아니었군.”하고는 “어때, 알겠는가?”하고 물었다. 스님이 모르겠다고 하자 “허, 벙어리도 아니군.”하고 운문선사는 내뱉듯 말했다. 그제서야 스님은 비로소 눈앞이 조금 트였다. 《벽암록》 제88

64. 미호선사(米胡禪師 ?∼?)

경조(京兆)의 미호선사는 미칠사(米七師)라고도 하는데 그의 생애에 관련된 자료는 배우 빈약하다. 단지 그에게 아름다운 수염이 있었다는 것과 설봉을 이었다고도 하고 위산을 이었다고도 하는 설만이 전해지고 있다.

65. 대룡지홍(大龍智洪 ?∼? 靑原下)

정주 대룡산의 지홍홍제(智洪弘濟)선사는 백조지원(白兆志圓)선사의 법을 이었다. 덕산의 계통에 속하는 존숙(尊宿)이다. 대룡의 생애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내용이 없다.

대룡견고법신(大龍堅固法身)]

한 스님이 대룡선사에게 물었다. “이 몸이 죽으면 없어지지만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법신이란 어떤 것입니까?” 대룡선사가 답했다. “산꽃은 비단같이 피어있고 골짜기 물은 가득하여 남색 같다.” 《벽암록》 제82

66. 투자대동(投子大同 ?∼914 靑原下)

서주 투자산의 대동선사는 서주 회령 사람으로 속성은 유(劉)씨이다. 일찍이 낙하(洛下)의 보당만(保唐滿)에 의해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웠고 성해(性海)의 이치를 밝혀냈다고 한다. 뒤에 취미(翠微)의 무학선사(無學禪師)를 따라 주로 척전의 종풍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천하를 주유한 뒤 고산(故山)에 돌아와 암자를 짓고 살았다. 어느날 조주선사가 이곳에 내방했는데 시장에 물건사러 가는 투자스님과 중도에서 마주쳤던 것이다. 조주선사는 투자가 물건사러 가겠다면 자신은 빈집을 지키겠노라 말하고 투자의 암실로 가서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곧 투자스님이 기름병을 들고 돌아오는 것을 본 조주선사는 “투자선사는 훌륭한 사가(師家)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겨우 기름장사하는 늙은이가 아닌가?”하고 말했다. 그러자 투자스님은 “기름사려, 기름사려.”하고 소리쳤다 한다.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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