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자신이 속한 국가나 민족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나 소속감, 자긍심 등이 민족주의의 전제라고 한다면 나는 결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나도 한때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부지런히 외우고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선명해지는 건 같은 땅에 같은 국적으로 살
서울 도봉산 바로 아랫동네에서 잠시 살던 시절이 있었다. 덕분에 호젓한 도봉계곡 쪽 숲길로 산책하는 호사를 자주 누렸다. 산책의 반환점은 도봉서원이었다. 당시 대규모 발굴조사와 정비작업 때문에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도봉서원이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는 것 정도는 안내판을 읽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몇 해 전(2017년), 도봉서원에서 의외의 소식이 들려왔다. 발굴과정에서 불교유물이 출토된 것이다. 유자들이 멀쩡한 절을 파묻고 그 위에 서원을 세운 일은 비일비재인지라 서원 터에서 불교유물이 나왔다고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지만, 그 유물이 지금껏 탁본으로만 전해지던 ‘영국사 혜거국사비’의 실물 비편(碑片)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교수신문>이 2020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를 선정했다. 아시타비란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뜻의 신조어로 ‘내로남불’이란 시쳇말 (時體-)을 한자로 조어한 것이다. 한국의 교수집단이 세상에 대해 이러한 일갈을 내지를 자격을 갖추었는지는 논외로 하자. &ls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김수영의 시 〈풀〉은 오랫동안 권력의 억압에 맞선 민초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되어왔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런 해석의 독재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이제 풀은 생태적 존재나 숙명의 극복원리, 더 나아가 여성의 성욕과 절정의 희열로 읽기에 이르렀
몇 해 전, ‘김구의 〈나의 소원〉은 춘원 이광수가 대필한 것’이란 주장이 역사학계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독립운동의 대부가 자신의 핵심철학을 피력한 명문이 실은 일제 부역 경력이 있던 이광수의 〈나의 나라>와 내용이나 흐름이 유사하고, 문화강국에 대한 강조는 일본 메이지유신 당시 유행한 ‘아름다운 나라’란 개
《삼국지연의》에는 조조가 갈증과 피로로 지친 병사를 북돋우기 위해 기지를 발휘하는 장면이 나온다. ‘얘들아, 조금만 더 가면 매실나무 밭이야. 거기서 마음껏 매실을 따먹으렴.’ 이 이야기는 망매지갈(望梅止渴)이란 고사성어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주인공은 조조가 아닌 사마의의 손자이자 삼국을 통일한 사마염일 가능성이 크다. 《삼국지연의》
영화 〈넘버3〉에서 검사 마동팔(최민식 분)은 자신을 매수하려는 조직폭력배인 서태주(한석규 분)에게 이렇게 말한다.“내가 한 마디 충고하는데, 네가 앞으로 뭘 하든, 하지 마라.”한국영화사를 통틀어 이보다 선(禪)의 정신을 단박에 드러내는 대사가 또 있을까. 불교적 소재와 주제를 내세운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나 김기덕의
불(火)의 씨앗이란 뜻의 불씨란 말이 있다. 불씨는 한국인의 언어생활에서 보통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전쟁의 불씨, 재난의 불씨, 위험의 불씨 등 하나같이 부정적인 단어와 말뭉치를 이루어 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생활의 측면에서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화로의 불씨가 끊어지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속담도 있고, 이사할 때 새 집에 가장 먼저 가스레인지 류(類)의 화기(火器)가 들어와야만 평탄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 세대가 아직 이 땅에 살고 있다. 이때 불씨는 인간의 일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대우받는다.불교는 ‘불씨’와 꽤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정도전이 조선을 유교국가로 만들어보겠다고 각 잡고 쓴 불교비판서 《불씨잡변》에서 ‘불씨(佛氏)’는 석가모니를 지칭한다. 또 대승불교에서 ‘중생은 모두 불성(佛性)을 지닌 존재’라고 말할 때 불성은 불종성(佛種性)에서 출발한 것이다. ‘종(種)’은 씨앗이니, 중생은 성불(成佛)의 씨앗을 품은 ‘불씨〔佛種〕’인 것이다. 선가에서 법맥 전수의 은유로 쓰는 ‘전등(傳燈)’이란 말도 등을 밝히는 불〔火〕의 씨를 이은 것이고, 그때 불씨란 불(佛)의 혜명(慧明)과 상통한다. 그 가운데서도 불씨와 각별한 인연을 지닌 선사가 있으니 그가 바로 위산 영우(潙山 靈祐, 771∼853)이다.
만약 천황 도오(天皇 道悟, 748~807) 선사가 오늘날 한국에 살았다면 분명 김영민의 칼럼을 좋아했을 것이다. 몇 해 전,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란 <경향신문> 칼럼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말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
나는 고양이에 별 흥미가 없다. 고양이를 주인으로 모시며 스스로를 집사라고 자처하는 애묘인들의 행동은 내겐 딴 세상 이야기일 뿐. 그런데 나 같은 사람도 살다보니 세 마리의 고양이는 피할 수 없었다.첫째는 애드가 앨런 포의 소설 속 문학적 고양이, 둘째는 선어록에 등장하는 선불교의 고양이, 셋째는 슈뢰딩거가 사고실험으로 만들어낸 과학적 고양이다. 전혀 관계
선종의 법맥을 살피다보면 실존인물인지 의심스러운 이가 한 둘이 아니지만, 파조타처럼 근본이 없는 이도 드물다. 어쩌면 파조타는 선종에서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서 응축한 가상의 캐릭터일 가능성이 높다.
청소년기에 접어들자 집안에는 불교서적이 중년의 뱃살처럼 나날이 늘어났다. 선어록이 마음의 양식으로서 내장지방을 이루었다면, 승려들의 법문과 에세이는 피하지방이었다. 내장지방과 피하지방의 비율은 1:2. 일반불자치고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이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심취해 백련암을 다니면서 만 배 기도를 밥 먹듯 하던 내 어머니의 열정이 빚어낸 찬란한 결과
단하천연(丹霞天然, 738~824)은 당시 마조와 쌍벽을 이루던 석두희천 아래에서 법을 이은 선사이다. 그런데 단하의 출가는 석두가 아니라 마조와 인연이 깊다. 단하가 친구인 방거사와 함께 불법에 귀의하게 되는 계기가 유명한 선불장(選佛場) 일화인데, 《조당집》에 의하면 그 일은 한 승려와 우연히 만나 차를 마시다 일어난다.“수재(秀才)는 어디로 가시오?”“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길입니다.”“공부가 아깝구려. 어찌해서 부처 뽑는 시험장(選佛場)에는 가지 않는 거요?”“거기가 어딥니까?”승려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묻는다.“알겠소?”“모르겠습니다.”
오래 전, 어느 기자가 성철선사를 찾아가 인터뷰하는 영상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스님의 인격형성에 영향을 끼친 서책은 무엇인가요?”“제일 내가 영향을 크게 받은 조사스님들 보면, 《조주록》하고 《운문록》이야.”문장의 주술 호응이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성철이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선사가 조주와 운문이었음은 알 수
12세기 중국에서 발간된 《조정사원(祖庭事苑)》은 선어록에 등장하는 2400여 개의 고사와 숙어를 모아 그 출전과 뜻을 풀어놓은 사전이다. 여기에 ‘거사(居士)’에 대한 설명도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거사란 보통 네 가지 덕(德)을 갖춘 이를 칭하는 것이다. 첫째 벼슬을 구하지 않고, 둘째 욕심이 적고 덕을 쌓으며, 셋째 재
자신이 전생에 중국의 승려라 믿었던 영국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존 블로펠드(John Blofeld, 1913~1987)로 어린 시절 우연히 마주친 자그마한 불상에 매혹되어 밤마다 불상에 꽃을 바치는 의식을 행했다. 그 불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블로펠드는 케임브리지대학에 다니는 동안 동양에 관한 여러 서적들을 섭렵하면서 불교에 심취했다. 그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는 마조의 법을 이은 선사다. 그를 다루는 글이나 강의에서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구절이 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굶는다.’는 말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라는 성경의 구절과 겹쳐지면서 노동자부터 자본가에 이르기까지
석두는 남종선이 확립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로, 강서(江西)에 마조가 있었다면 호남(湖南)은 석두였다.
마조가 마조로 불리게 된 것은 본인의 덕이 아니다. 혜능과 신회의 관계에서 보았듯 스승의 이름은 후대의 뛰어난 제자가 드높이는 것이다. 마조 아래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백장회해, 방거사 등 출가와 재가를 가리지 않은 선불교의 거목들이 모두 그의 문하였다.
“1924년, 나는 《중국선학사(中國禪學史)》의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혜능까지 써내려가다가 펜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송고승전》에서 신회가 북종(北宗)과 대결한 기록을 보았고, 또 종밀의 저서에서는 ‘797년 칙명이 있어 신회를 7조로 했다.’는 부분을 읽었다. 어떻게든 신회에 관한 자료를 찾아야 했다.&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