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봉산 바로 아랫동네에서 잠시 살던 시절이 있었다. 덕분에 호젓한 도봉계곡 쪽 숲길로 산책하는 호사를 자주 누렸다. 산책의 반환점은 도봉서원이었다. 당시 대규모 발굴조사와 정비작업 때문에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도봉서원이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는 것 정도는 안내판을 읽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몇 해 전(2017년), 도봉서원에서 의외의 소식이 들려왔다. 발굴과정에서 불교유물이 출토된 것이다. 유자들이 멀쩡한 절을 파묻고 그 위에 서원을 세운 일은 비일비재인지라 서원 터에서 불교유물이 나왔다고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지만, 그 유물이 지금껏 탁본으로만 전해지던 ‘영국사 혜거국사비’의 실물 비편(碑片)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길이 62㎝, 폭 52㎝, 두께 20㎝의 돌조각은 그간 학계에서 떠돌던 영국사(寧國寺)의 위치나 혜거(慧炬) 국사의 이명(異名)에 관한 진지한 헛소리들을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밀어 넣는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이 비편에 새겨진 251자는 탁본의 영국사가 충북 영동의 절이 아닌 도봉산 자락의 절이란 사실과 영국사에 주석했던 혜거는 갈양사의 혜거(惠居)국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임을 밝혀주었다. 또한 혜거가 도봉산 영국사를 비롯해 인근 망월사나 회룡사에도 그 이름과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을 종합해보면 고려 초기 도봉산을 거점으로 선불교를 펼쳤던 인물임이 분명해진다. 하지만 혜거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 글에서 혜거는 법안 문익(法眼 文益, 885~958)이란 낯선 이국의 승려를 독자 앞으로 끌어오기 위한 마중물이기 때문이다. 도봉산의 맹주 혜거가 중국 유학 시절에 배운 스승은 다름 아닌 법안 문익이었다.

법안 문익은 선종 오가 가운데 가장 늦게 성립된 법안종의 종조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는 그가 선종 오가라는 틀 자체를 창시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역사는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든 아니든 늘 먼저 분류하고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자의 것이니까. 그는 《종문십규론》에서 최초로 오늘날 선종오가의 기준이 되는 문파(門派)와 가풍을 언급했다.

“육조의 가르침을 청원 행사와 남악 회양이 계승하였고, 행사 아래에서 석두 희천이 나왔고, 회양에게서 마조가 나왔다. 다시 마조와 석두 아래에서 각기 분파가 배출되었다. (중략) 덕산과 임제(임제종), 위앙(위앙종), 조동(조동종), 설봉과 운문(운문종) 등에 이르러 각자의 문파를 이뤄서 여러 가풍이 생겨났다.”

“조동은 북치고 노래하며(제자의 질문에 스승이 답하는 것으로) 작용을 이루었고, 임제는 주객의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기틀을 이루었다. 운문은 상자와 뚜껑처럼 서로 들어맞거나 때론 그 흐름을 완전히 끊어버렸으며, 위앙은 모나고 원만함으로 그윽하게 들어맞았다.”

하지만 《종문십규론》이 쓰인 본래의 목적은 따로 있다. 법안은 선종의 풍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열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했다.

첫째, 깨닫지 못했으면서 주지나 원로가 되어 남의 스승을 자처하는 것.

둘째, 무리를 지어 문중을 지키는 것에만 골몰하며 다른 가르침을 배척하는 것.

셋째, 새로운 가르침을 펴서 대가인 척 행세하면서도 자신의 말의 맥락조차 모르는 것.

넷째, 스승의 말이나 남의 말만 베끼고 자신의 독자적 안목은 전혀 없는 것.

다섯째, 이(理)와 사(事)의 원융한 도리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을 떠벌리는 것.

여섯째, 스승의 지도와 도반의 탁마를 거부하고 자신의 소견만으로 다 안다고 설치는 것.

일곱째, 스승의 말만 앵무새처럼 되뇌이며 스승을 능가하려 하지 않는 것.

여덟째, 가풍을 옹호하고자 경전의 구절을 마구잡이로 인용해 억지로 끼워맞추는 것.

아홉째, 이치나 운율도 모르면서 함부로 게송을 지어 도인인 척하는 것.

열째, 자신에 대한 비판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남만 헐뜯으며 싸우는 것.

그는 글의 마지막에 남을 비판했으니 자신도 남의 비판과 질정을 달게 받겠다며, 그래서 같은 길을 가는 수행자들이 서로 대화하고 탁마하자며 마무리했다.

자신이 속한 시대나 집단이 혼탁하다고 모두가 법안처럼 비판과 대화에 나서는 건 아니다. 이는 용기 이전에 인식의 문제다. 문제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 어찌 문제점을 논할 것인가?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건전한 비판은 개인이 그 집단을 자신과 완전히 동일시함으로써 소멸한다. 개인이 집단에 완전히 종속되는 순간 집단이 저지르는 악행과 비리마저도 대의를 위한 것이라 옹호하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꼿꼿한 개인이자 청렴한 수행자로서 기품을 잃지 않았던 법안의 눈에는 어그러져 가는 당대의 선풍이 선명히 보였고, 그는 대승의 가르침과 보살의 정신으로 폐단을 바로잡고자 분투했다. 그는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식정(識情)을 제거하기 어렵다’며 올바른 선법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교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외부로 향한 창을 열어젖히지 않고 내부의 공기만 돌려서는 자체 정화가 일어나지 않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법안이 이렇듯 선종의 외부자로서 시선을 견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출가 후에도 유학을 깊이 공부해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나 자유(子遊)에 비견될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갖추었다는 것과도 무관하지않다. 그가 《종문십규론》에서 펼친 불교비판이 마치 유자가 불교를 비난하는 것처럼 가혹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의 말은 준엄하다 못해 비판의 대상에게 확탕지옥에 몸을 담그는 것 같은 뜨거운 고통을 안겼을 것이다.

“어찌 세속의 명망만 바라고 스승의 법을 이어서 주지란 자리를 훔치는 것인가.”

“요즘 승려들은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을 자비라 여기고, 방탕함을 보살의 덕행이라 하면서, 불법의 계율을 파괴하고, 승려로서 지녀야 마땅한 몸가짐을 내팽개친다.”

“입으로는 해탈의 원인인 수행을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귀신이나 할 일을 희롱하니, 본디 부끄러움 자체를 모르는데 어찌 죄를 피하겠는가. 이러한 무리는 늘어놓아서 후학을 위한 경계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종문십규론》의 열 가지 비판은 단 하나의 문제로 수렴될 수 있다. 법안은 선가의 가장 큰 병통은 진리를 모르면서도 자기가 모르는 줄도 모르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이 뭔가 알고 있다는 거대한 망상과 착각에서 비롯한다고 여겼다. 마치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의사 가운을 훔쳐 입고 자신이 의사라 믿으면서 다른 환자를 진찰하는 형국이라고 할까. 이는 소크라테스철학에서 지혜를 향한 출발인 ‘무지(無知)의 지(知)’가 결여된 상태이다. 자신이 모른다고 생각하는 중생에겐 배움의 가능성과 깨달음의 길이 열려있다. 그러나 자신이 뭔가를 안다고 착각하는 중생을 다시 올바른 앎의 길로 되돌리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법안의 깨달음에 관한 신중한 태도는 그를 깨달음으로 이끌어준 스승 나한 계침(羅漢 桂琛, 867∼928)을 만났을 때 형성되었을 것이다. 계침이 인사를 올리는 법안에게 물었다.

“수좌는 어디로 가는가?”

“여기저기 떠돌며 행각하는 중입니다.”

“그대가 행각하는 뜻은 무엇인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에 가까우니라.”

《전등록》은 구구하게 이어지는 대화를 실은 다른 기록들과 달리 바로 여기서 법안이 확연히 깨달았다고 전한다. 양 무제의 ‘그대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받은 달마가 ‘모른다.’라고 단호하게 답한 것처럼, ‘모른다’는 걸 알아야 비로소 지혜와 깨달음의 활로가 열리는 진리의 세계란 얼마나 오묘하고 깊은 것인가.

강호진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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