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넘버3〉에서 검사 마동팔(최민식 분)은 자신을 매수하려는 조직폭력배인 서태주(한석규 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한 마디 충고하는데, 네가 앞으로 뭘 하든, 하지 마라.”

한국영화사를 통틀어 이보다 선(禪)의 정신을 단박에 드러내는 대사가 또 있을까. 불교적 소재와 주제를 내세운 배용균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나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으로도 족탈불급(足脫不及)인 경지인 것이다.

만약 이 대사를 ‘뭘 (계획)하든, (실행은) 하지 마라.’로 해석하는 이라면 선불교 근처를 서성이지 않는 편이 좋다. 상식의 수준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는 성향이라면(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선불교의 앞뒤 없는 파격 앞에선 ‘이건 배, 배, 배신이야, 배반형!’이라 소리를 지를 것이 확연하기 때문이다.

이 대사가 왜 선불교의 골수를 드러낼까? 대화의 방식과 모순의 구조,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우선 듣는 이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묶어버리는 과격한 방식이 같다. 마 검사의 충고는 사실 대화나 행위에 대한 금지가 아니다. 이는 청자(聽者)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전면적 부정에 가깝다. 듣는 입장에서는 숨이 턱 막히고 욕 말고는 마땅히 대꾸할 것도 없다. 선사들의 언어 역시 명령도 대화도 아니다. 그들의 문답도 실체나 존재성에 대한 끊임없는 지움을 내포하고 있다. 그들이 이런 무식한 방법을 쓰는 이유는 화자와 청자, 스승과 제자, 부처와 중생이라는 선명하게 분리된 이분법적 틀과 언어의 일상적 맥락을 살려두고서는 깨달음이 들어설 공간이 확보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무얼 하든, 하지마라’라는 형식상 모순구조다. 행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행위를 부정하거나 금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선불교는 이런 논리적 제약을 손쉽게 넘나든다. 문답에선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했다고 말할 수도 있고, 일을 벌려놓고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가끔 불교계에서 이런 입장을 빌려와 물리적 현상을 부정하거나 자신의 사회적, 법률적 행위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얼간이가 나오긴 하지만, 이 말은 어디까지나 한용운의 시처럼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같은 마음의 영역, 다시 말해 공(空)과 깨달음에 한정해서 가능한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한가하게 앉아있는 것’

약산 유엄(藥山 惟儼, 745-828)을 일화를 통해 이 부분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약산이 하루는 앉아 있는데, 석두가 그걸 보고 물었다.

“너는 여기서 뭘 하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一切不爲)”

“그렇다면 너는 한가하게 앉아있는 것(閑坐)이로구나.”

“한가하게 앉았다고 해도 뭔가를 하는 것이지요.”

“네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게 대체 무엇이냐?

“수많은 성인들도 그건 모릅니다.(千聖亦不識)

《선문염송》에 실린 유엄과 그의 스승의 석두 희천의 대화다. 유엄은 죽음 직전에 제자를 불러모아놓고 ‘법당이 무너진다.’라고 외치고 입적한 것으로 유명한 선사이다. 위의 문답에서 가장 뜨겁게 부딪히는 개념은 한가롭게 앉아 있다는 한좌(閑坐)와 그 어떤 것도 함이 없다는 불위(不爲)로 보인다. 유엄은 마치 ‘한좌’와 ‘불위’는 다른 차원이라고 스승에게 말하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우선 한가할 한(閑)은 여러 층위로 쓰이는 말이다. 생산성의 측면에서 한가(閑暇)하다는 것은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 부정적인 함축을 가진다. 일을 등한(等閑)시 하며, 한량(閑良)처럼 건들거리다, 결국은 쓸데없는 일(모여앉아 수다를 떠는 일도 한좌이다.)이나 벌이는 것이 한(閑)이다.

한편 도(道)의 차원에서 한(閑)은 속세의 영리를 벗어나 마음에 얽매임이 없음을 뜻한다. 선비가 벼슬을 버리고 산림에 숨어사는 것이 한거(閑居)이고, 불교에서는 울렁이는 분별을 가라앉혀 청정하고 조용한 마음의 상태에 머무는 것도 한거(閑居)이다. 특히 깨달음이 높은 선사를 한(閑)도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때 ‘한’은 깨달음을 뜻하는 무위(無爲)나 제법의 실상으로서 공(空)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석두가 유엄에게 말한 한좌는 한가하게 망상이나 펼치고 앉아있다는 비꼼이 아니다. 그것은 유엄이 말한 불위, 즉 함이 없는 자유자재한 경지를 다른 말로 부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좌와 불위가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는 유엄이 스승의 말에 꼬투리를 잡는 이유가 무엇일까. 유엄이 진실로 겨냥하는 차원은 이것이다.

‘불위를 불위(한좌)라고 규정하면 도리어 불위라 할 수 없지요.’

명민한 독자라면 이는 《금강경》의 ‘A는 A가 아니지만, A라고 부른다.(A卽非A 是名A)’라는 정형구를 살짝 뒤집어놓은 것임을 눈치 챘을 것이다. 석두는 어수룩한 척 ‘그렇다면 네가 생각하는 진정한 불위가 무엇인가.’라고 함정을 파지만, 유엄은 ‘그걸 누가 알겠느냐.’며 노련하게 피해간다. ‘불위는 불위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에 불위라 부를 뿐인데, 불위의 본질을 규정하라니요. 스승님은 제가 바보로 보입니까.’

불교계의 고수들은 이러한 공의 역설을 깨침으로써 그들의 말이 침묵과 다르지 않고, 침묵은 도리어 우레와 같은 설법이 됨을 알고 있었다. 공의 모순과 다층성을 언설의 차원에서 확장시킨 것이 대승교학의 ‘일승’이자 ‘원융’이라면, 언어도단의 파격으로 생생하게 살려온 것은 선종이었다. 45년간 인도전역을 떠돌며 수많은 언설을 쏟아낸 붓다가 열반에 이르러 자신은 지금껏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고 시치미를 뗀 것처럼, 불교인의 궁극적 목표는 뭘 하든지 함이 없는 경계의 자유인이 되는 것일 테다. 그러니 대형불사와 해외포교에 사활을 거는 일부 불교인에게 충언을 한마디 올리자면, 본인의 마음부터 장엄하시고 앞으로 뭘 하든 제발 하지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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