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김구의 〈나의 소원〉은 춘원 이광수가 대필한 것’이란 주장이 역사학계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독립운동의 대부가 자신의 핵심철학을 피력한 명문이 실은 일제 부역 경력이 있던 이광수의 〈나의 나라>와 내용이나 흐름이 유사하고, 문화강국에 대한 강조는 일본 메이지유신 당시 유행한 ‘아름다운 나라’란 개념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논증은 합리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백범일지》를 이광수가 윤문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김구의 아들이 증언한 바 있지만, 윤문과 대필은 그 성격이 엄연히 다르다. 청소년 시절, 국어교과서에 실린 〈나의 소원〉을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고 또 읽었던 입장에서는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선서(禪書)를 읽으면서도 나는 이런 종류의 충격을 받아왔다. 처음에는 선전(禪典)에 나오는 선사들의 말과 일화를 일점일획의 보탬이나 거짓도 없이 기술해 놓은 것이라 믿다가, 불교를 학문으로 접근하다보니 그것이 최소한의 사실을 바탕으로 후대의 편집과 가필이 교묘하게 더해진 창작물임을 알게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덕산 선감(德山 宣鑑, 782~865)이 노파와 나누었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답도 가공의 것임을 눈치 채게 되었다.

떡 파는 노파와의 일화, 허구인가?

덕산은 《금강경》에 대한 독자적인 주석서까지 쓴 탁월한 교학승으로 ‘주금강(周金剛)’이란 미칭(美稱)으로 불렸다. 그는 남방의 선사들이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혼내주기 위해 길을 떠났다가 우연히 시장에서 떡 파는 노파를 만났다. 그가 자신은 《금강경》에 통달한 사람임을 밝히고 점심을 달라고 하자, 노파가 물었다.

“《금강경》에는 과거 마음도 존재하지 않고, 현재의 마음도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시려고 점심(點心)을 달라고 합니까?”

여기서 덕산은 무너져버린다. 그런데 잠깐만. 덕산에게 학승으로서 한계를 자각케 해주고 선승으로서 변신을 예비하는 결정적 사건이자 덕산이란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이 일화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충격을 받은 독자라면 이렇게 항의할지도 모른다. ‘덕산의 이 일화를 인용하는 수많은 법문과 강의, 신문칼럼과 서적은 다 무어란 말인가? 대체 무슨 근거로 함부로 허구라 말하는가?’

판단의 근거는 이렇다. 덕산이 입적 후 100여 년이 지난 기록에선 이 일화가 전혀 보이지 않다가 사후 300여 년 즈음에 만들어진 《오등회원(五燈會元)》 등의 선서에서 우후죽순으로 나타난다. 대체로 한 인물에 대한 기록은 그의 활동시기와 시간적으로 가까울수록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의 기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이야기가 세월이 흘러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후대에 만든 가공물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저런 기록을 끌어 모아 매끄럽게 편집하는 데 능한 《전등록》에서조차 덕산이 용담 숭신(龍潭 崇信, 생몰미상)을 찾은 계기는 다음처럼만 기록하고 있다.

덕산은 검남(劍南) 사람으로 성은 주(周) 씨다. 소년 때 출가해서 스무 살에 구족계를 받았다. 율장을 정교하게 연구했고, 성상(性相)으로 모든 경전의 핵심을 관통했다. 항상 《금강반야경》을 강설해서 ‘주금강’이라 불리었고, 그 후로는 선종을 탐방했다. 동학들에게 말하길, “한 터럭이 바다를 삼키어도 바다의 성품은 어그러짐이 없고, 검불 부스러기를 칼끝에 던지더라도 칼끝의 예리함에는 변함이 없다. 배움의 경계이든 해탈한 경계이든 간에 오직 나만 알 뿐이다.”고 했다. 덕산은 용담을 만나 물었다. “오랫동안 용담에 오기를 바랐는데, 막상 와보니 연못도 보이지 않고, 용도 보이지 않는군요.” 용담이 답했다. “자네가 몸소 용담에 왔잖은가.” 이에 덕산은 할 말을 잃었다.

어쩌면 “항상 《금강반야경》을 강설해서 ‘주금강’이라 불리었고, 그 후로는 선종을 탐방했다.”라는 문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 비약처럼 느껴질 것이다. 마치 ‘늘 옆집 처녀를 사랑했던 한 남자는 그 후로는 다른 남자를 찾아다녔다.’와 같은 느낌이랄까? 대부분은 교학승에서 선승으로의 급격한 전환을 보충할 어떤 연결고리를 찾기 마련이다. 그러나 선불교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있는 이라면 이러한 서술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전등록》이 덕산의 변화를 입증할 깨알 같은 근거를 심어두었음에 혀를 내두를지도 모른다. 왜 그런가?

남종선의 개조인 육조 혜능이 오조 홍인 아래로 들어간 계기가 《금강경》의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이란 구절 때문이고, 또 혜능이 홍인에게 전법의 징표로 받은 것도 《금강경》임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금강이 훌륭한 선사가 되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이행(移行)이자 귀결인 셈이다.

하지만 눈빛만 보아도 이심전심이던 선의 황금시대(7~10세기)를 훌쩍 지나버린 시절에 선서를 편집한 이들은 기존의 내용만으로는 호소력이나 감동이 부족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는 균형과 정합성으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양식이 몰락한 후 뒤를 잇게 된 바로크 양식이 과장된 기교와 드라마틱한 변화에 집착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들은 기어코 덕산과 노파의 문답을 가공해서 공백이라 여겼던 부분을 메웠던 것이다. 사실 그들에겐 잘못이 없다. 뜨겁고 화려했던 시절의 광휘가 다 사그라진 이후였기에 남은 재라도 뒤적거리며 그 불씨를 찾아보려고 애썼을 뿐.

용담이 덕산에 깨달음을 전하다

덕산은 결국 용담의 제자가 되는데 깨달음을 전하는 과정이 매력적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것을 선가에서는 전등(傳燈)이라 부르는데, 용담과 덕산은 이를 직접적 행위로써 드러냄과 동시에 그 행위를 말소시킴으로써 전등이 지닌 심층적인 의미도 함께 보여준다. 《전등록》은 이 장면을 다음처럼 전한다.

어느 날 저녁, 덕산은 용담이 있는 방 밖에서 묵묵히 앉아 있었다. 용담이 물었다.

“어찌해서 돌아가지 않는가?”

“캄캄합니다.”

용담은 초에 불을 붙이고 덕산에게 건넸다. 덕산이 받으려 하자 용담은 갑자기 입으로 불어서 촛불을 꺼버렸다. 덕산이 이에 절을 하자 용담이 물었다.

“무엇을 보았는가?”

“오늘 이후로는 천하의 노장님들의 말씀을 의심치 않겠습니다.”

보통 경전에서 하나의 초에서 타오르던 불이 다른 초로 옮겨 붙는 비유는 업의 상속이나 윤회를 설명하는 장치이다. 만약 덕산이 스승이 얌전히 건넨 불을 받아들었다면 선가의 전등이 지닌 의미는 모두 휘발되어 버렸을 것이다. 스승은 불을 붙인 다음 다시 불어서 끈다. 불을 끈다는 것은 말 그대로 분별망상의 불꽃이 모두 꺼진 상태의 니르바나, 곧 열반이다. 결국 이 일화는 선가의 전등이 ‘꺼진 불’로써 제자의 마음의 불(혜명)을 밝히는 역설적 구조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조당집》은 덕산이 대중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누가 내 얼굴을 그릴 수 있는가? 있다면 나오너라. 내가 그를 알고자 하느니라.”

그때 두려워서 나서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덕산의 면목을 안다고 나서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덕산을 그리며 끄집어내는 상투적 설명들-‘임제의 할(喝), 덕산의 방(棒)’, ‘말해도 30방, 침묵해도 30방’-이 진정으로 덕산의 면목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 글 또한 덕산의 매서운 방망이를 피해가긴 힘들 것 같다.

“아야, 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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