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어느 기자가 성철선사를 찾아가 인터뷰하는 영상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스님의 인격형성에 영향을 끼친 서책은 무엇인가요?”

“제일 내가 영향을 크게 받은 조사스님들 보면, 《조주록》하고 《운문록》이야.”

문장의 주술 호응이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성철이 평생의 스승으로 삼은 선사가 조주와 운문이었음은 알 수 있다. ‘산은 산, 물은 물’ 같은 운문의 법어가 성철의 선사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면,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의 청빈한 삶은 수행자로서 성철의 지남(指南)이었다. 조주는 80세에 이르러서야 겨우 관음원이라 작은 암자의 주지가 되었고, 변변하게 끼니를 때우거나 두루마기조차 걸칠 여력이 없을 정도로 살림이 궁핍했다. 하지만 조주는 한 번이라도 시주를 청하는 일이 없었다.

나는 성철스님이 주석했던 80년대 백련암을 기억한다. 전각이라곤 허물어져가는 원통전(관음전) 하나였고, 복전함 비슷하게 생긴 물건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던 기개 높은 도량이었다. 누더기 옷을 입고 살면서도 절에 돈을 가져오는 대신 그 돈으로 진짜 부처인 가난한 이웃을 공양하라는 성철의 가르침은 조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상에 대한 회향의 차원까지 확장시킨 것이라 하겠다.

성철만 조주를 존경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의 선수행자들이 가장 많이 들고 있는 ‘무(無)’자 화두는 다름 아닌 조주구자(趙州狗子.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란 질문에 조주가 ‘없다’라고 답한 것)에서 나온 것으로, 조주구자는 대표적 선서인 《무문관(無門關)》의 첫 번째 공안이자, 《무문관》이란 제목 자체가 바로 조주의 무(無)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벽암록》의 100개의 공안 가운데 조주의 공안은 12개에 달한다. 옛 사람들은 조주를 존경을 담아 고불(古佛)이라 불렀고, ‘천하의 조주’라고도 칭했다. 현대에 들어서도 조주의 명성은 여전하다. 불자뿐만 아니라 웬만한 사람 가운데 조주의 공안을 접하지 못한 이는 찾기 힘든데, ‘뜰 앞의 측백나무[庭前柏樹子]’나 ‘차나 한잔 마시게[喫茶去]’는 책이나 신문칼럼에서 빈번히 인용되는 문구이다.

사실 조주의 말은 한 번 듣는 순간 잊기가 어렵다. 일상에 터 잡은 간결한 말이기도 하려니와 그 말을 끝없이 되씹

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그래서 조주의 선을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고 한다. 입과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선이란 뜻인데, 사람을 깨치게 하는 절묘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뜻이다. 영어에 ‘read my lips’라는 속어가 있다. 문자 그대로는 내 입술을 읽으란 뜻이지만, 상대에게 말귀를 좀 알아먹으란 종용의 의미를 담고 있다. 조주의 구순피선은 이처럼 불법에 대한 말귀가 꽉 막힌 이조차도 안목을 갖추게 만드는 언하변오(言下便悟)의 법문이었다. 예를 들어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절묘한 조주의 질문을 받는 순간, 말문은 막히고 알음알음은 떨어져 나간다. 또 내 마음이 곧 부처이기에 부처를 밖의 형상에서 찾지 말라는 심상(尋常)한 말을 조주는 연금술사처럼 바꾸어 놓는다.

“금으로 된 부처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하고, 흙으로 만든 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하지만, 진짜 부처는 내 속에 앉아 있네.”

조주의 언어적 재기(才氣)는 이미 스승인 남전선사를 처음 만났던 일화에서부터 도드라져 있다. 조주는 스승을 찾는 행각 중에 남전이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서서 인사를 했다. 남전은 조주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오는 길인가?”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그래, 상서로운 형상[瑞像]은 보았는가?”

“그런 것은 보지 못했고, 다만 누워계신 여래만 보았습니다.”

남전은 자신을 여래라고 띄워주는 조주가 기특해서 묻는다.

“그대는 스승이 있는 사미인가?”

“스승이 있습니다.”

남전은 오랜만에 보는 법기(法器)가 스승이 있다는 말에 실망하며 말을 잇는다.

“스승은 어디에 있는가?”

“한 겨울 날씨가 추우니, 화상께선 귀하신 몸을 잘 보전하시길 바랍니다.”

조주는 자신의 스승이 바로 남전 당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조주를 알고 나면 조주에게 매혹당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조주를 좋아하는 것과 조주의 언어를 이해하고 조주의 삶을 실천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조주의 언어는 입구는 넓지만, 출구는 한없이 좁은 길과 같다. 조주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려던 한 동학은 관련 문헌을 다 번역해 놓고도 끝내 갈피를 잡지 못해 중도에 그만 두었다. 백일법문 당시 성철이 수좌들에게 조주의 무(無)자 화두가 공부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고 말린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철이 조주의 언어에 매료된 것이 아니라, 조주의 치열한 삶을 존숭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성철의 법어가 조주의 언어와는 결이 사뭇 다른 비장하고도 묵직한 언어로 채워진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주의 언어와 조주의 삶,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하는 오늘날 불교계의 현실은 무엇 때문인지 나는 짐작조차하기 어렵다.

강호진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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