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에 별 흥미가 없다. 고양이를 주인으로 모시며 스스로를 집사라고 자처하는 애묘인들의 행동은 내겐 딴 세상 이야기일 뿐. 그런데 나 같은 사람도 살다보니 세 마리의 고양이는 피할 수 없었다.

첫째는 애드가 앨런 포의 소설 속 문학적 고양이, 둘째는 선어록에 등장하는 선불교의 고양이, 셋째는 슈뢰딩거가 사고실험으로 만들어낸 과학적 고양이다. 전혀 관계가 없을 것처럼 보이는 세 고양이는 의외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 상식으로는 다가설 수 없는 역설적 존재, 즉 죽음과 삶이 중첩적으로 겹쳐지면서 공존하는 수수께끼라는 점이다. 그 가운데 두 번째 고양이가 지닌 매력은 자기주장과 신념이 강한 이들일수록 자기부정에 도달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두 번째 고양이의 신묘한 발자국을 뒤쫓다보면 우리는 남전이란 선사와 만나게 된다.

남전 보원은(南泉普願, 748~835) 마조의 법을 이은 제자이자, 조주의 스승이다. 마조와 조주가 워낙 유명한데다 선종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겼기에 남전은 샌드위치처럼 끼어서 정당한 평가받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실은 정반대다. 남전이 마조와 조주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위상은 높아져갔다. 《송고승전》은 마조의 빼어난 두 제자는 백장회해와 서당지장이라 기록했지만, 후대에 편집된 《전등록》에서는 남전이 슬며시 끼어들어 세 명이 각축을 벌이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셋 가운데 깨달음에 있어서는 남전이 단연 1등으로 묘사되기에 이른다. 마조 왈, ‘경(經)은 장(藏, 서당지장)에 들어가고, 선(禪)은 해(海, 백장회해)로 돌아가는데, 보원만이 사물의 경계에서 벗어났구나.’라고 했던가.

마조의 제자이자 조주의 스승

남전이 오로지 잘난 아비나 뛰어난 아들 덕에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것은 아니다. 《조주록》에 의하면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라는 희대의 명구는 남전의 가르침이다. 그러니 조주의 트레이드마크인 ‘차나 한잔 마시게.’는 남전의 평상심, 다시 말해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의 정신 속에서만 선(禪)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물론 남전의 평상심이 번뇌와 오욕칠정으로 뒤덮인 범부중생의 평상심과 같다고 해선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그 둘이 전혀 다른 것도 아님이 선의 가르침이다.

남전이 선종사에서 자신만의 이름을 또렷이 새기게 된 계기는 ‘남전참묘(南泉斬猫, 남전선사가 고양이를 베어죽이다)’의 일화에서 비롯한다. 이 사건은 수좌들의 공부거리인 공안(公案)으로서 《벽암록》과 《무문관》을 비롯해 웬만한 선서(禪書)에는 빠짐없이 실려 있다. 여러 선서를 바탕으로 남전참묘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남전 문하에 한 승려가 고양이를 절에 두고 길렀는데, 어느 날, 다른 승려가 고의인지 실수인지 고양이의 다리를 부러트렸다. 이 일로 두 승려 간에 시비가 일어났다. 남전의 제자들은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에 나누어 살면서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시비는 진영 간의 물러설 수 없는 다툼으로 번졌다. 이때 남전이 나타나 한 손엔 날카로운 칼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고양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말해보아라. 제대로 된 한 마디를 이르는 놈이 있다면 이 고양이를 살려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베어버릴 것이다.”

대중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남전만 바라보았다. 이에 남전은 칼로 고양이의 몸을 두 동강내버리고는 자리를 떠났다. 저녁이 되어 낮에 출타했던 제자 조주가 돌아오자 남전이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조주는 스승의 이야기를 듣고선 신발을 머리에 이고 방을 나가버렸다. 이에 남전이 말했다.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고양이 일화는 양극단 견해를 벤 것

이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일까? 만약 사실이라면 고양이를 죽인 남전의 행위는 도덕적 비난가능성을 넘어 오늘날에는 동물보호법 위반 및 재물손괴죄로 기소될만한 상황이다.

설령 사회적 비난과 법적 처벌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중시해온 불교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그 본질을 훼손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선어록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기술된 것이라 강변해 온 이들조차도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주장을 슬며시 뒤엎는 기적이 생겨난다. 그 고양이는 실제가 아니라 번뇌의 상징이고, 남전이 고양이를 죽인 것은 양극단의 견해를 베어서 중도의 길을 보여주었다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화가 지닌 공안으로서 가치는 고양이를 죽인 것과는 일말의 상관도 없다.

여기서 화두로 삼아야 하는 건 단 한 줄이면 족하다. ‘한 번 말해 보거라.’

고양이는 번뇌의 상징이라기 보단 생사의 큰 문제는 방기해두고 소소한 이득과 욕망에 집중해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에 가깝다. 남전은 고양이가 아니라 우리의 멱살을 잡아끌어 절벽 끝에 세워둔 채 묻고 있는 것이다. ‘자, 생사의 대처(大處)에서 너는 결정적으로 무슨 한 마디를 내뱉을 수 있는가?’

삶의 본질을 꿰뚫는 송곳 같은 시인 김승희는 <벽과 함께>에서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

“면벽과 벽과 벽돌… 그 모든 벽돌이 지나고 나면/새벽이 올 줄 알았어, (중략) 벽과 벽과… 모든 벽들이 끝나고/갑자기 나타난 것은 새벽이 아니라/절벽이었어,/벽이 기르고 있던 것은 새벽이 아니라/절벽인 것을/우린 오늘 아침 너무 늦은 시각에야/비로소 알게 되었다면”

선사와 시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삶의 비밀은 이렇다. 우린 모두 절벽 끝에 서있는 위태로운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걸 너무 늦게 알아차리면 안 된다는 것. 갑자기 일상이란 벽 속에 몰래 묻어놓은, 죽은 동시에 살아있는 검은 고양이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미아옹(迷兒翁, 여전히 삶을 헤매는 아이와 늙은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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