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전생에 중국의 승려라 믿었던 영국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존 블로펠드(John Blofeld, 1913~1987)로 어린 시절 우연히 마주친 자그마한 불상에 매혹되어 밤마다 불상에 꽃을 바치는 의식을 행했다. 그 불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블로펠드는 케임브리지대학에 다니는 동안 동양에 관한 여러 서적들을 섭렵하면서 불교에 심취했다. 그는 불교야말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궁극적인 통찰이자 가르침이라고 믿었다. 결국 그는 20대 초반에 중국으로 건너가 선불교의 가르침을 접하게 되고, 이후 《The Zen Teaching of Huang Po: On The Transmission of Mind》 라는 자신의 첫 번째 책을 출간하게 된다. 책의 내용은 《전심법요》와 《완릉록》을 영어로 번역한 것으로 두 책 모두 황벽 희운(黃蘗希運, ?~850)의 가르침이 담긴 선어록이었다.

그렇다면 블로펠드는 왜 수많은 선사들을 젖혀두고 황벽을 서구에 처음으로 소개한 것일까? 그가 생각하기에 황벽은 소위 ‘선의 황금시대’를 대표할만한 이라고 여겼고, 그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그가 중국에서 만났던 승려와 학자들의 견해나 영향이 있었다. 황벽은 백장의 제자이자 임제의 스승으로, 두 뛰어난 선사의 사상적 계보를 잇는 다리라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블로펠드가 황벽의 《전심법요》와 《완릉록》을 선택한 진짜 이유는 그 텍스트에서 어떤 동질감을 발견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작가가 책을 쓰는 계기는 애착을 느끼는 대상을 만났을 때이고, 그 애착은 자신의 모습을 대상에 투영할 수 있을 때 생겨난다.

배휴·종밀의 그림자로 ‘순혈주의’에서 배척

한국에서 황벽은 조주나 임제에 비해 대중적으로 유명하거나 인기가 높은 선사라 할 수 없다. 당연히 《전심법요》나 《완릉록》 또한 다른 선어록에 비해 그리 읽히지 않는다. 황벽을 읽을 바에는 마조나 백장을 한 번 더 보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이도 적지 않다. 황벽의 어록에는 여타 선사들의 가르침과 차별되는 독특한 한 방이 없기 때문이다. 도는 닦아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본래 부처로서의 성품을 곧장 바라보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황벽의 설법은 중국 선불교의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가르침이다. 우리는 《전심법요》나 《완릉록》에서 마조 이후 이어져온 매우 익숙한 선불교의 핵심사상을 만나게 된다.

“오늘날 도를 공부하는 이들은 이 마음의 본체를 알지 못해 마음에서 불필요하게 다시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한다. 그것은 형상에 붙들린 수행으로 모두 그릇된 가르침일 뿐, 지혜의 도리가 아니다.”

“중생과 부처는 본디 차별이 없으니, 단지 무심(無心)이면 곧 구경각(究竟覺)이다. 만약 도를 배우는 이가 곧바로 무심하지 못한다면 오랜 세월 수행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깨달음을 이룰 수 없고, 삼승의 수행방편에만 얽매여 해탈하지 못한다.”

이처럼 황벽의 어록은 전문가의 입장에선 심심한 책이지만, 초심자들의 입장에선 선사상의 핵심을 파악하기 쉬운 장점을 가지고 있다. 블로펠드나 서구인들에게 황벽은 그러한 존재였을 것이다. 종파적 입장에서 보자면 《전심법요》와 《완릉록》은 치명적 결함을 지니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을 빌리자면 그 책에 배휴라는 불순물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배휴(裴休, 791~870)는 황벽의 가르침을 문답식으로 정리해서 《전심법요》나 《완릉록》을 편찬한 이로 당나라 재상이자 신심이 깊은 재가자였다. 비록 그의 저작이 황벽 문하의 제자들과 함께 논의하고 감수를 거쳐 나온 것이라고 해도 저술의 주체가 배휴였기에 순혈주의에 경도된 이에게는 선불교의 정수를 담은 책이라 여기긴 어려웠을 것이다. 황벽의 선어록에 관한 의심은 배휴가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의 가르침을 받은 이력이 있다는 점에서 더 불거진다. 선과 교를 회통한 종밀은 선불교에서는 대표적 지해종사(知解宗師)로 낙인찍힌 인물이 아니던가. 배휴가 유자이자 재가자, 또 종밀과의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세 가지 요인은 《전심법요》나 《완릉록》이 한국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블로펠드에게 황벽의 어록이 지닌 이러한 약점들은 도리어 자신과의 동질감을 더 크게 만들었을 것이다. 《전심법요》는 선불교의 국외자(局外者) 격인 재상 배휴가 정리한 덕분에 중국에서 황벽의 위상이 더 높아졌고, 그 책이 다시 서구의 교육을 받고 자란 블로펠드란 이방인에 의해 번역되면서 중국의 선불교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8세기 무렵 불교사상을 과감히 수용하면서 힌두철학을 부흥시키고, 결과적으로 인도에서 불교를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 베단타 사상가인 샹카라는 이렇게 말했다.

“흰색만 계속 더해서는 더 밝은 흰색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오늘날 선불교의 위기는 세계적으로 도래한 종교의 위기와 무관치는 않지만, 특히 적통과 계보를 따지는 폐쇄적 순혈주의와 오직 자신의 가르침만이 참이고 진리라는 독선에서 심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단이나 불순물이라고 여겨온 것들이 도리어 자신을 살찌울 영양분임을 선불교는 망각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황벽이 인기가 없는 이유를 배휴에 대한 종파적 배척만으로 돌릴 생각은 없다. 다이내믹한 기질을 지닌 한국인에게 황벽의 어록이 와 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선사로서의 파격이나 독자적 개성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매번 흰색에 흰색을 더하는 안일함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믿는 오늘날의 불교계와 학계가 되돌아보아야 할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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