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중국에서 발간된 《조정사원(祖庭事苑)》은 선어록에 등장하는 2400여 개의 고사와 숙어를 모아 그 출전과 뜻을 풀어놓은 사전이다. 여기에 ‘거사(居士)’에 대한 설명도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거사란 보통 네 가지 덕(德)을 갖춘 이를 칭하는 것이다. 첫째 벼슬을 구하지 않고, 둘째 욕심이 적고 덕을 쌓으며, 셋째 재산이 엄청나고, 넷째 도를 지키며 스스로 깨달은 이다.”

원문은 ‘居士凡具四德 乃稱居士’라 하여 네 가지 항목을 모두 만족해야 거사라고 불릴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각각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첫 번째, 벼슬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늘날 절집에서 남성재가자를 유교식으로 처사(處士)라 부르는 것과 맞닿아 있다. 처사란 자발적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는 유자(儒者), 즉 세상과 출세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 묻힌 독립적 지식인을 지칭하지만, 실제로는 관직으로 나아가지 못한 유생을 일괄해서 부르는 말로 쓰였다. 두 번째, 욕심이 적고 덕을 쌓음은 종교에 관계없이 수신(修身)하는 이를 뜻한다. 세 번째, 재산이 많은 대부호는 불교경전에서 ‘장자’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부처님께 기원정사를 지어 바친 급고독장자나, 죽림정사 땅을 헌납한 칼란다장자가 대표적인데, 말 그대로 백만장자이다. 네 번째, 도를 지키고 스스로 깨달았다[自悟]는 부분에 이르면 우리는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사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네 가지의 요건을 다 충족하지 않더라도 거사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일까? 유마거사와 함께 대표적 거사로 손꼽히는 방거사(龐居士, ?~808)란 존재 때문이다. 만약 위의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거사라 한다면, 작은 집에서 대나무조리를 만들면서 생계를 이어간 방거사는 거사가 아닌 셈이 된다.

사실 초기불경에 나오는 장자와 거사는 막대한 부를 지니고 불교에 귀의해 물질적으로 붓다와 승가를 외호하는 재가남성이었다. 그러나 《유마경》이나 《화엄경》에 이르면 거사는 단순한 조력자의 이미지를 넘어 성문승(붓다에게 직접 불법을 배운 승려)보다 더 높은 대승의 깨달음을 지닌 이를 상징하게 된다. 대승불교 이후로 거사란 명칭의 무게중심은 재력이나 출가여부 보다는 무분별과 공(空)에 대한 깨달음으로 옮겨 간 것이다. 방거사가 선종 법맥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법맥에는 작위적 요소와 편집이 적지 않게 들어가 있지만, 적어도 깨달음의 계보를 뜻한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석두와 마조 사이의 방거사

법맥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방거사는 선종의 법맥도에서 보통 마조 아래에 배치된다. 《조당집》에 방거사가 마조의 법을 이었다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덕전등록》에는 방거사가 마조와 인연을 맺기 전, 석두를 먼저 찾아가 깨달음을 인가받는 장면이 나온다.

방거사를 단순히 마조의 문하로 묶어두기엔, 석두의 제자들과 만남이 유달리 많은 것은 사실이다. 특히 석두의 대표적 제자이자 불상을 쪼개 장작불로 쓴 것으로 유명한 단하선사는 방거사와 함께 과거시험을 보러 가다가 불법에 귀의하는 ‘선불장(選佛場)’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방거사와 석두의 인연을 기술한 《경덕전등록》은 방거사가 마조를 만나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구절[居士言下頓領玄要]을 덧붙여 놓음으로써 후대까지 많은 논란을 낳았다. 특히 조선후기의 선사들은 이 기록을 근거 삼아 방거사가 석두에게 얻은 것은 여래선이고, 마조에게 얻은 것은 조사선이라고 위계를 정해버렸다. 마조가 석두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른 선사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던 사실이 있다. 조선 땅에서 마조와 석두의 우열을 논하는 것 자체가 제국인들 사이에 일어난 싸움에 괜스레 끼어들어, 그것도 유력한 주류를 옹호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려했던 서글픈 식민주의적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석두의 제자들은 마조에 대한 비하의 의미로 ‘마조는 잡화를 파는 가게, 석두는 순금을 파는 가게’로 비유했다. 이에 대해 마조 쪽에선 ‘석두는 금덩이만 팔지만, 자신들은 온갖 것을 다 팔뿐만 아니라 필요하면 금까지 판다’고 되받아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을 안다면 굳이 어느 편을 들어 하나만이 옳다고 국집(局執)할 이유가 없다. 방거사는 재가자로 산 덕분에 이러한 계파 간의 알력에서 자유로웠고, 경계를 넘어 여러 스승과 도반을 만나며 깨달음의 폭과 깊이를 더해나갈 수 있었다. 이는 석두가 방거사에게 ‘출가를 하겠는가, 재가자로 남겠는가?’라고 묻자 ‘제가 좋을 대로 하렵니다.’라고 답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방거사의 생과 사상은 ‘요사범부(了事凡夫)’라는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해야 할 일을 마친 평범한 사람이란 뜻이다. 여기서 일[事]은 일대사(一大事), 즉 깨달음의 성취이다. 그럼에도 그는 현인이나 성인(聖人)이란 말 대신 스스로를 범부라 칭했다. 그에게 ‘신통묘용’이란 그저 물을 나르고 땔감을 옮기는[運水與搬柴] 등의 일상적 노동과 평범한 삶 속에 깃든 것이었다. 그가 열반에 들자 강호의 사람들은 승속을 가리지 않고 “선문의 방거사는 유마거사와 같다.”며 애도했다고 《경덕전등록》은 전한다. 그러나 이제 강호의 도는 바닥에 떨어졌고, 거사는 장자여야만 하는 시절로 회귀해버렸다. 큰돈을 시주하는 남성재가자는 ‘거사님’이라 불러주지만, 절에서 일하는 남성노동자는 오로지 ‘김처사’, ‘박처사’라고 부르는 시대인 것이다. 계급과 자본이 없이는 방거사 조차 거사라 불리기 힘든 이 세상에서 나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방거사님, 아니 방범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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