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火)의 씨앗이란 뜻의 불씨란 말이 있다. 불씨는 한국인의 언어생활에서 보통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전쟁의 불씨, 재난의 불씨, 위험의 불씨 등 하나같이 부정적인 단어와 말뭉치를 이루어 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생활의 측면에서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화로의 불씨가 끊어지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속담도 있고, 이사할 때 새 집에 가장 먼저 가스레인지 류(類)의 화기(火器)가 들어와야만 평탄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 세대가 아직 이 땅에 살고 있다. 이때 불씨는 인간의 일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대우받는다.

불교는 ‘불씨’와 꽤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정도전이 조선을 유교국가로 만들어보겠다고 각 잡고 쓴 불교비판서 《불씨잡변》에서 ‘불씨(佛氏)’는 석가모니를 지칭한다. 또 대승불교에서 ‘중생은 모두 불성(佛性)을 지닌 존재’라고 말할 때 불성은 불종성(佛種性)에서 출발한 것이다. ‘종(種)’은 씨앗이니, 중생은 성불(成佛)의 씨앗을 품은 ‘불씨〔佛種〕’인 것이다. 선가에서 법맥 전수의 은유로 쓰는 ‘전등(傳燈)’이란 말도 등을 밝히는 불〔火〕의 씨를 이은 것이고, 그때 불씨란 불(佛)의 혜명(慧明)과 상통한다. 그 가운데서도 불씨와 각별한 인연을 지닌 선사가 있으니 그가 바로 위산 영우(潙山 靈祐, 771∼853)이다.

백장의 ‘불씨’가 영우를 달구다

선종사에서 위산 영우는 그의 제자 앙산 혜적(仰山 慧寂, 807∼883)과 함께 위앙종의 개조로 말해진다. 위앙종(潙仰宗)은 위산의 ‘위’와 앙산의 ‘앙’을 따서 합친 것이니, 위산과 앙산이 새로이 연 종문이란 뜻이다. 위앙종은 선종의 주류였던 다섯 가문(五家, 위앙, 임제, 운문, 조동, 법안을 합쳐 오가라 한다) 가운데 하나로 가장 먼저 형성되었으나 가장 먼저 사라진 종파로 평가된다. ‘역시 첫 끗발이 개 끗발’이란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짚어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위앙종이란 실체가 과연 존재했냐는 것, 그리고 위앙종의 시조를 위산과 앙산으로 당연시해도 좋은가란 점이다. 그들은 위앙종이란 이름의 종파를 따로 세운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종파를 만들었다고 선언한 적도 없다. 그들은 심지어 위앙종이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왜냐면 그 명칭은 후대에 임의로 분류해서 붙여놓은 이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선종의 다섯 가문이란 명칭과 분류는 법안 문익(法眼 文益, 885∼958)이 저술한 《종문십규론》에서 시작되었다. 마르크스가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부정했듯, 위산이 살아서 위앙종의 개조란 말을 들었다면 ‘이건 무슨 소리냐?’며 화를 냈을 것이다.

위산은 법맥으로 보면 백장 회해의 제자다. 그가 깨달음을 얻게 되는 직접적 계기는 불씨였다. 《경덕전등록》에는 그 일화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하루는 위산이 백장을 모시고 곁에 서있는데 백장이 물었다.
“누구인가?”
“영우입니다.”
“화로 속에 불이 있는지 헤쳐 보거라.”
위산이 화로를 헤쳐보고 말했다.
“불이 없습니다〔無火〕.”
백장이 몸을 일으켜 화로를 깊숙이 헤쳐 불씨〔小火〕를 집어 들고 말했다.
“이것은 불이 아닌가?”
이때 위산은 깨달음이 일어나 백장에게 절을 했다.

《조당집》에는 위산이 백장에게서 받은 불씨를 다시 제자인 앙산에게로 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앙산이 위산에게 묻는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생각이 사라진 현묘함을 생각하라. 영험한 불씨〔靈燄〕의 무궁(無窮)함으로 반조하라.(후략)”

앙산은 이 말 끝에 홀연히 깨닫게〔言下頓悟〕 된다. 우리는 위산이 말한 영험한 불씨, 혹은 신령스런 불꽃〔靈燄〕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말의 유래가 어디인지는 짐작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조당집》은 불과 관련된 위산의 또 다른 일화를 전한다. 위산이 도오(道吾, 769∼835)에게 묻는다.

“불〔火〕을 보았는가, 보지 못했는가?”
“봤습니다.”
“보는 것이 어디로부터 일어났는가?”
“행주좌와(行住坐臥)는 제외하고, 다시 한 번 물어주십시오.”

이쯤 되면 위산은 위앙종의 개조가 아니라 배화(拜火) 교주라고 해야 할 판이다. 위산은 입으로만 불을 말한 게 아니라 행동도 뜨거웠다.

위산의 스승인 백장은 대위산(大潙山)에 수좌들을 불러 모아 출격자(出格者)에게 주지 자리를 주겠다고 말했다. 뻔한 도식에서 벗어난 경지를 펼쳐 보이는 이를 선발하겠다는 뜻이다. 백장은 물을 담는 정병(淨甁)을 가리키며 “이것은 정병이라 부를 수 없으니 그대들은 무엇이라 하겠는가?”라고 묻는다. 신통치 않은 답들만 나오는 상황에서 위산이 다가와 정병을 냅다 차서 날려버렸다. 이때 백장은 웃으면서 “제일(第一)수좌가 대위산을 부수어버렸구나.”라고 말했다던가. 위산이야말로 임제와 더불어 선종사에 길이 남을 불꽃남자로 손색이 없다. 비록 그 불꽃이 임제와 달리 뛰어난 후손을 만나지 못해 조계의 적자가 되지 못하고 방계(傍系)로 밀려났지만 말이다.

불꽃과 비슷한 말로는 불티가 있다. 영어로 스파크(spark)를 말한다. 선종의 스승과 제자 사이의 문답에는 무릇 불티가 일어야 한다. 불티가 팍팍 튀어야 잠자던 불씨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부싯돌에 불티를 일으키는 쇳조각을 부시라고 한다. 제자가 부싯돌이라면 스승은 부시인 셈이다. 그런데 선가에선 이런 말을 늘어놓는 것을 ‘불싯’이라 한다. Bullshit(개소리)!

강호진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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