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9. 계〔禁戒〕를 깨뜨리면 천신(天神)의 몸〔天身〕을 받을 수 없으나, 청정한 계를 잘 보호하고 지니면 천신(天神)의 몸을 받을 수 있느니라. - 《대집경(大集經)》760. 계를 지니면 항상 단정하고 엄숙하며 계를 깨뜨리면 항상 추잡하고 비루(鄙陋)하니라. - 《천청문경(天請問經)》761. 계는 큰 배의 선장이라 능히 생사의 바다를 건네주며, 계는 맑고 시원한 못이라 모든 번뇌를 씻어주며, 계는 두려움을 없애주는 술법〔無畏術〕이라 나쁜 독〔邪害毒〕1)을 없애주며, 계는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도반이라 능히 험악한 길을 지나게 하며
진표의 수행과 미륵보살의 현응진표(眞表)는 완산주(完山州) 만경현(萬頃縣)에서 태어났다.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裏)이다.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으로 성은 정 씨(井氏)이다. 나이 열두 살에 이르자 금산사(金山寺) 숭제 법사(崇濟法師)의 문하에 들어가 불법을 배웠다.숭제 법사는 사미계법(沙彌戒法)을 주면서 “나는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선도 삼장(善道三藏)에게 수업을 받은 후에 오대산으로 들어가 문수보살의 현신에 감응하여 오계(五戒)를 받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진표가 “삼
“평양에서 만난 사람들”참여정부는 2007년 10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아 시대 등을 국정 목표로 제시한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임기 막바지에 교류의 물꼬를 열었다.1950년 전쟁 이후, 남측 대통령이 경기도 파주 도라산 관측초소에서 최초로 군사분계선(분리선)을 넘어 육로로 방북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2일 방북길에 앞서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이 다녀오게 될
일제 강점기 간행된 불교계의 잡지는 불교계의 ‘개혁’과 ‘유신(維新)’이라는 최대 관심사를 주제로 소개하고 있었다.1) 조선 시대의 극심한 탄압에 시달렸던 불교의 낙후성을 지적하고, 변화하는 시대상을 선도할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1931년 창간된 《선원(禪苑)》지는 선학원(禪學院)의 기관지이다. 선학원은 일본 불교의 침투와 불교계의 왜색화 경향에 항거한 수좌들이 과거의 것만으로 이해한 선(禪)을 중심으로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수호하고, 선풍진작을 위해 창설하였다. 《선원》지는 창간된 이후 선학원의 설립 정신을 불교계에 소개하고,
제2장 지계(持戒)제1절 총설(總說)751. 계는 모든 선법(善法)의 계단〔梯磴〕1)이며 또한 모든 선법의 근본이니 땅이 모든 나무들이 생겨나는 근본이 되는 것과 같으니라. - 《열반경(涅槃經)》752. 계는 해탈을 바르게 따르는 근본인 까닭에 이름이 해탈근본2)이어서 이 계에 의지하면 모든 선정과 고를 멸하는 지혜를 얻으니 그러므로 비구는 마땅히 청정한 계를 지니어 훼손하지마라.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청정한 계를 수지한다면 선법을 얻으나 청정한 계를 수지하지 못한다면 모든 공덕이 생겨나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계가 제일의 안은공덕(
“금강산의 속살을 보다”“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이란 노랫말처럼 금강산은 근세기에 이르기까지 산천 유람의 최고 명승지로 꼽혔다. 그 이름도 열세 가지에 이를 만큼 유명하다.휴전선 북쪽의 금강산은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뉜다. 계절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金剛), 개골(皆骨), 열반(涅槃), 풍악(楓嶽), 기달(怾怛)의 다섯 가지로 기록됐다.조선 초기부터 공식 기록된 금강산은 꽃과 새싹이 온산에 뒤덮이는 봄을 가리킨다. 녹음이 짙게 드리우는 여름에는 신선이 사는 ‘봉
신라와 중국의 불교 교류불교는 중국을 통해 전래되었기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수행자들은 그곳에 가서 공부하는 것을 희망하였다. 신라의 수행자 역시 통일 전부터 중국으로 건너가 불법을 공부하며 양국의 불교 교류에 크게 공헌하였다.그런 수행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원측(圓測)이었다. 진평왕 35년(613) 신라 왕손으로 태어나 15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법상(法常)과 승변(僧辯)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지혜가 뛰어났던 까닭에 6개 언어에 능통하여 중국에 그 이름을 떨쳤다. 그런 명성을 들은 당 태종은 직접 도첩을 하사하였다. 장안에 머물며
3.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의 각종 활동선학원은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나서 여러 가지 구호사업과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1932년 11월 12일 부인선우회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간부였던 우봉운(禹鳳雲)이 재만동포 구호사업을 발의하였다. 우봉운은 1922년 창립된 조선불교여자청년회 회장을 지낸 인물이었으며, 당시 이 회에서는 매월 강연회, 토론회, 부인강좌 등을 실시하여 여성계몽운동을 실시하고 있었다.10) 이 날 부인선우회 주최로 열린 정기총회에서 재만동포 구제를 위하여 현금 7원 정도와 의
“새로운 파트너십으로”6·15 남북공동선언 6돌을 맞은 2006년에는 남북불교계의 수장이 바뀌었다. 남측의 이지관 조계종 총무원장(2012. 1. 2. 열반)은 2005년 10월 31일 제32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선출됐다. 북측에는 성보 유영선 제4대 조선불교도련맹(이하 조불련)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2006년 5월 8일에 선출됐다. 이로써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2005. 9. 11.)의 열반과 학림당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2005.11.11.)의 타계로 공석이 된 그 자리가 매워졌다.새로운 파트너가 형성된 불교 교류에서는
746. 비유컨대 씨앗이 좋은 땅을 만나면 뿌리가 무성하고 만약 나쁜 땅에 (씨앗이) 심어지면 열매가 없으니 이 법도 역시 그리하여 만약 지혜가 있어 잘 생각할 수 있으면 여러 법〔諸法〕1)을 널리 생기게 하고 만약 어리석어서 지혜가 적으면 비록 이 논(論)을 익힐지라도 능히 통달하지 못하니 이는 ‘진선지견(眞善2)知見)’이라 이름 붙일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諸有〕은 여실한 지혜〔實智〕를 생기게 하고 선악을 분별하여 마땅히 부지런히 이 정법(正法)3)을 닦아야 하느니라. - 《방편심론(方便心論)》747. 내가 모든 중생을
신라의 구법승신라의 불교는 고구려를 통해 전해졌다. 처음에는 부족 신앙이 강해 불교가 쉽게 수용되지 못했다. 그 후 공주의 치병, 외국 사신의 공경 등을 계기로 포교할 수 있었으나 토속신앙의 저항으로 지속되지 못하였다.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다시 공인되었다. 진흥왕 12년(551) 고구려 혜량(惠亮)이 승통으로 임명되면서 승려의 출가와 수행 방법 등 신라의 교단 체계가 정립되었다. 그리고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와 팔관회(八關會) 등 중요한 불교 의례가 행해져 민심을 통일시키는 역할을 하였다.이렇게 불교의 토대
1. 신라 불교학의 우수성신라의 불교학은 왕실과 수행자들의 노력으로 초기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수행자들은 인도와 중국으로 가서 부족한 서적을 수집하고 교학 연구를 하였다. 그런 노력의 결과 삼국시대부터 화엄, 법화, 열반 등 대승 교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통일 이후에도 불교학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전쟁의 어려움이 끝난 뒤여서 국가적 지원과 연구에 대한 열의가 높아졌다. 불교계 안에서도 훌륭한 고승들이 끊이지 않고 배출되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불교를 수용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연구를 통해 독
1. ‘선원’의 간행과 지방 선원 소식 소개선학원의 기관지인 《선원》은 1931년 재기를 도모하면서 선의 중흥과 대중화를 목적으로 그해 10월 6일에 창간되었다. 이 잡지는 1931년 10월 창간호부터 1935년 10월 제4호까지 총 4권이 발행되었는데 편집 겸 발행인이 모두 적음 스님이다. 그런 까닭에 이 잡지에는 적음 스님의 생각과 선학원 운영 방침이 잘 담겨 있다고 하겠다.《선원》의 발간은 창간호(1931. 10. 6.)와 제2호(1932. 2. 1.), 제3호(1932. 8. 16.)가 간행되어 해마다 출간되었지만 제4호는
737. 지혜가 적은 이는 이 법을 알 수 없고, 지혜의 눈이 청정한 사람은 이 법을 마침내 볼 수 있느니라. - 《화엄경(華嚴經)》738. 비유컨대 땅속에 갖가지 보물이 들어간 창고가 있어서 각종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지혜롭고 총명하여 사리에 밝은 이는 땅속에 감추어진 모든 보물들을 잘 분별하여 갖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가지고 (그것으로) 부모를 봉양하며 어려운 친척을 돕고 늙거나 병들거나 가난한 이를 골고루 도와주는데, 지혜와 복덕이 없는 사람은 비록 보물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도 보물이 있는지 알지도 보지도 못하여
3. 부인선우회 창립과 활동부인선우회는 재가 여성을 선 수행 대중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근대화의 한 특징으로 이해될 수 있다.16 부인선우회의 결성은 그간의 여성들의 불교 신앙이 기복중심의 주술적인 성격이 강하였던 것에서 벗어나 선 수행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서 여성들의 불교 신앙생활 위상이 강화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17 이러한 정황은 1935년에 발간된 《선원(禪苑)》의 ‘조선불교중앙부인선원’에 이렇게 나타난다.그리하야 부인게 유지들의 무량의 노력과 김적음 화상의 일단 심월이 언제나 변함없이
엄장과 광덕의 현신성불문무왕 대에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친하여 밤낮으로 약속하여 말하였다. “먼저 극락으로 가는 사람은 모름지기 알려야 한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에 은거해 짚신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으며 처자를 끼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나무를 불태워 힘써 경작하였다.하루는 해 그림자가 붉은빛을 띠고 솔 그늘이 고요히 저물었고 창밖에서 소리가 났다.“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자네는 잘 살다가 빨리 나를 따라오라.”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와 그것을 살펴보니 구름 밖에
725. 지혜를 닦지 않는 이는 반야바라밀을 갖출 수 없으며 마음을 다잡지 못하며 어리석은 마음을 끊지 못하느니라. - 《열반경(涅槃經)》726. 미혹하여 무지한 이는 오온(五蘊)6)의 모습을 잘못 취하여 오온의 참된 성질〔真性〕을 알지 못하니 이러한 사람은 부처님을 보지 못하느니라. - 《화엄경(華嚴經)》727. 밝고 깨끗한 태양을 눈먼 이가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지혜의 마음이 없으면 모든 부처님을 보지 못하느니라. - 《화엄경(華嚴經)》728. 어리석은 이는 행동이 각기 다르므로 이리저리 서로의 단점을 찾느니라. - 《무희망경
1. 선학원 재건의 배경선학원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불교의 유입으로 대처승들이 늘어가던 시기인 1921년 11월 항일 의식이 강하였던 송만공(宋滿空), 백용성(白龍城), 오성월(吳惺月), 김남전(金南泉), 강도봉(康道峰) 등의 승려들이 선풍진작을 표방하면서 창립된 사찰이다.1) 선학원의 창설과 더불어 비구 선승들은 선풍을 진작시키고, 자립자애하기 위해서 1922년 3월 30일에서 4월 1일까지 선학원에서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를 조직하였다. 선우공제회는 출범 초기에 본부를 선학원에 두고 중앙조직은 서무부, 수도부, 재무부 등의 3부를
밀본(密本)의 치병주술고대 밀교 사상을 정립한 밀본은 삼기산 금곡사에서 수행하였다. 이곳은 원광이 주술에 관심을 가지고 수행한 곳으로 그가 입적하자 후학들이 부도를 세웠다. 밀본은 원광과 사자상승의 관계는 아니었으나 그의 밀교 사상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삼기산 금곡사는 고대 밀교의 서막을 여는 곳이라 할 수 있다.밀본은 밀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때 활동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밀교를 원하지 않는 기존 불교의 저항은 가장 큰 난관이었다. 그는 왕의 치료를 계기로 이런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다.선덕여왕은 병이
북관대첩비 백 년만의 귀환해방 전후, 1915년 9월 11일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탑묘를 시작으로 1918년 11월 15일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1933년 9월 20일 경주 불국사 사리탑에 이어 1966년 5월 27일 한일협정 부속 협정에 따라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등을 비롯한 반출문화재 1326점이 반환됐다.그 후 1995년 12월 28일 서울 경복궁의 자선당 잔해가 반환됐고, 2005년 10월 20일에 길주 북관대첩비, 2006년 7월 7일 일본 도쿄대학이 소장하던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47책, 2011년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