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가 창건한 중국 산둥성 룽청시 법화원. 신라인이 세운 중국내 사찰 신라원 중 가장 유명했다. 신라는 물론 일본의 구법승에게도 편의를 제공했다. 제주도 제공. 불교저널 자료사진.
장보고가 창건한 중국 산둥성 룽청시 법화원. 신라인이 세운 중국내 사찰 신라원 중 가장 유명했다. 신라는 물론 일본의 구법승에게도 편의를 제공했다. 제주도 제공. 불교저널 자료사진.

신라와 중국의 불교 교류

불교는 중국을 통해 전래되었기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수행자들은 그곳에 가서 공부하는 것을 희망하였다. 신라의 수행자 역시 통일 전부터 중국으로 건너가 불법을 공부하며 양국의 불교 교류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런 수행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원측(圓測)이었다. 진평왕 35년(613) 신라 왕손으로 태어나 15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법상(法常)과 승변(僧辯)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지혜가 뛰어났던 까닭에 6개 언어에 능통하여 중국에 그 이름을 떨쳤다. 그런 명성을 들은 당 태종은 직접 도첩을 하사하였다. 장안에 머물며 비담(毘曇,) 성실(成實), 구사(俱舍) 등 고금의 장소(章疏)를 연찬하였다. 여러 교학 가운데 유식학에 정통하여 현장이 인도에서 돌아와 많은 경론을 번역할 때 참여하였다. 서명사(西明寺)에 머물면서 자신의 유식사상을 발표하는 등 그 활동이 남달라 측천무후의 귀의를 받았다. 신라는 국정에 도움을 받고자 그의 귀국을 청했으나 측천무후가 거절하여 귀국할 수 없었다. 효소왕 5년(696) 84세에 중국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도증(道證), 승장(勝莊) 그리고 자선(慈善)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도증과 승장은 신라승이었다. 도증은 중국에서 원측에게 수학한 다음 효소왕 원년(692) 귀국하였다. 유식학에 관한 여러 저술을 남겼으며 신라 3대 저술가인 태현(太賢)을 양성하여 신라 유식학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승장은 신라 왕실의 후예였다. 중국에 건너가 현장의 문하에 머문 뒤 원측에게 공부하여 교학 체계를 세웠다. 당나라 의정(義淨)과 보리유지(菩提流志)의 역장에서 증의(證義) 역할을 하였다. 귀국에 관한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저술로는 《성유식론결(成唯識論決)》, 《잡집논소(雜集論疏)》, 《범망계본술기(梵網戒本述記)》 그리고 《금광명경최승왕경소(金光明經最勝王經疏)》 1권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방(神昉)도 신라가 통일하기 전 중국에 건너가 활동한 수행자였다. 현장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4명의 수제자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났으며 역장에 참여하여 증의와 필수(筆受)를 담당하였다. 대승 교학에 뛰어난 신방이라는 뜻으로 대승방(大乘昉)으로 불렸다. 《십륜경초(十輪經抄)》 3권, 《십륜경소(十輪經疏)》 8권, 《십륜경음의(十輪經音義)》 1권, 《대승대집경지장십륜경서(大乘大集經地藏十輪經序)》 등을 저술하였다. 이 가운데 《대승대집경지장십륜경서》만이 현존한다.

통일 무렵 중국에 건너가 양국의 교류에 공헌한 수행자는 승전(勝詮)과 무상(無相)을 들 수 있다. 승전은 중국에 건너가 현수(賢首)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신문왕 12년(692) 귀국하였다. 총명함과 식견이 뛰어나 심오한 것을 찾고 숨은 뜻을 가려내는데 신묘함이 있었다. 현수가 《수현소(搜玄疏)》를 찬술하여 의상에게 부본(副本)을 보낼 때 이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상주지방 개령군(開寧郡)에 사찰을 창건하고 화엄학을 강설하였다. 제자 가운데 가귀(可歸)가 총명하고 도리를 알아 법맥을 계승하였다.

무상은 성덕왕 27년(728) 중국으로 건너갔다. 5조 홍인의 제자인 지선(智詵)과 그의 제자 처적(處寂)을 만난 후 처적의 제자가 되었다. 무상은 깊은 계곡과 나무 밑에서 좌선하여 법을 깨달았다. 그의 명성을 들은 현종(玄宗)이 귀의하였다. 그를 도와 사람들이 정중사(淨衆寺)와 영국사(寧國寺)를 세웠다. 무상은 주로 정중사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무억(無憶), 무념(無念), 그리고 막망(莫忘)의 선지를 강조하였다. 대중들은 그의 선을 정중선 또는 정중종이라 불렀다.

지장(地藏) 역시 신라와 중국의 불교 교류에 크게 활약한 수행자였다. 성덕왕 4년(705) 신라의 왕자로 태어난 그는 출가 후 중국으로 가 지주(池州) 구화산(九華山)에서 수행하였다. 도력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귀의하자 화성사(化城寺)를 세우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명성이 신라에 알려지면서 많은 수행자가 중국으로 건너와 그의 문하에서 배웠다. 기이한 행적과 철저한 수행으로 일관한 지장은 애장왕 4년(803) 99세로 입적하였다.

무루(無漏) 역시 중국불교와 교류하는 데 공헌하였다. 왕자로 태어나 출가 후 중국으로 건너갔다. 수행 중 부처님 사리탑에 예경하고자 인도행을 결심하였다. 길을 떠나 총령(葱嶺) 부근에 있는 절 관음상 앞에서 49일 동안 선정에 들었다. 관음의 영험이 중국으로 왔다는 그곳 대중들의 말을 듣고 되돌아왔다. 안사의 난으로 촉(蜀) 지역에 있던 숙종은 꿈에서 본 금색의 사람이 대사의 모습과 같아 궁중으로 모시고 우대하였다. 여러 번 산사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경덕왕 21년(762) 궁궐에서 공중에 떠 합장한 채로 입적하였다. 육신을 예전에 지내던 산으로 옮기던 도중 회원현(懷遠縣)에서 움직이지 않자 그곳에 탑을 세우고 모셨다. 수백 년이 지나도 육신이 변하지 않는 신이를 보였다.

중국 산동 반도에는 신라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신라방(新羅坊)이 생겨났다. 그곳에 건립된 사찰은 신라원(新羅院)이었다. 이곳에서 신라인들은 고국에 있을 때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국땅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겨내는 의지처가 되었다. 또한 당나라와 신라를 오고 가며 무역을 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도량이었다.

신라원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흥덕왕(826~836) 때 장보고(張保皐)가 세운 산동 반도 적산촌의 법화원(法花院)이었다. 이곳은 당으로 구법의 길을 가는 신라 수행자는 물론 일본에서 구법의 길을 온 수행자까지 편의를 제공하였다. 일본 승려 원인(圓仁)은 자신의 《입당구법순례기》에 중국에 와서 불법을 공부하고 귀국할 때 이 법화원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고 적었다.

신라원은 신라양식으로 지어져 신라불교의 의식을 거행하면서 중국 내에 신라불교를 알리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신라불교의 중국 진출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신라불교의 일본 전래

통일신라의 불교는 교학적인 면과 예술적인 면에서 찬탄을 받을만한 우수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이런 불교문화는 중국에 전해져 좋은 평가를 얻기도 하였다. 중국보다 통일신라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수용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삼국이 대립하던 때 백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일본도 통일 이후에는 신라를 통해 불교를 유입하였다. 많은 일본 수행자가 신라로 유학하여 불법을 공부하였다. 신라는 자신보다 문화적으로 미흡한 일본에 많은 것을 전하고 가르쳤다.

통일신라 초기 신문왕 6년(686) 일본 승려 관상(觀常)과 영관(靈觀)이 신라에 와서 공부하였다. 학업이 끝나 귀국할 때는 많은 문물을 가져가 일본불교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성덕왕 6년(798) 일본 승려 의법(義法), 의기(義基), 정달(淨達) 세 사람이 신라에 와서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갔다.

이처럼 일본 수행자의 구법도 있었지만 신라에 의해 전해지는 불교도 상당히 많았다. 신라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줄 때 왕실의 주요 인물이 담당하였다. 이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진 것을 의미한다.

신문왕 7년(687) 신라 왕자 김상림(金霜林)은 지륭(智隆)과 함께 불상을 비롯하여 발우, 번 등 불교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불구(佛具)들을 가지고 일본에 갔다. 동왕 9년 4월 천무천황(天武天皇)의 조문을 위해 파견된 사신 김도나(金道那) 등은 금동아미타상, 금동관세음보살상, 대세지보살상 각 1구를 가지고 갔다. 이때 신라 승려 명총(明聰)과 관지(觀智)가 동행하였다. 이런 불상과 불구들은 일본 사찰의 장엄과 불교 의례에 쓰여 불교 신앙과 문화를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경덕왕 11년(752) 왕자 김태렴(金泰廉)은 사절단 700여 인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불교를 전하였다. 일본불교의 중심지인 동대사(東大寺)에 머물면서 불사를 원조하여 일본불교 발전에 기여하였다.

신라는 교단 차원에서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었다. 신문왕 9년(689) 전길(詮吉)을 비롯하여 신라 승려 50여 명이 일본에 건너가 불교를 전하였다. 그 규모로 보아 개인적인 전교는 아니고 교단 차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덕왕 17년(758) 비구 32명과 비구니 2명 그리고 남자 19명과 여자 21명이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무장야(武藏野)에 신라도(新羅都)를 세우고 교화에 힘썼다. 또한 헌덕왕 10년(816) 승려 26명이 일본에 건너가서 각 사찰에 머물면서 불교를 널리 알렸다.

일본에 전래진 신라의 불교학은 법상학과 화엄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성덕왕 2년(703) 지봉(智鳳), 지란(智鸞) 그리고 지웅(智雄) 세 사람은 왕실의 명을 받아 당나라에 가서 박양(撲揚) 대사에게 법상종 교학을 배웠다. 그 후 일본에 건너가 불법을 전하였다. 성덕왕 5년 지봉은 《유마경》을 설했으며 지란과 함께 일본 승정 의연(義淵)에게 법을 전수하였다.

심상(審祥)은 성덕왕 때 일본에 건너가 크게 불법을 펼친 수행자였다. 일본불교의 승정 양변(良辨)이 찾아와 대중을 위한 강연을 여러 번 간청하였다. 여러 차례 거절하던 심상은 효성왕 4년(740) 10월 8일 동대사(東大寺)에서 법연을 펼쳤다. 화엄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1년에 20권씩 3년 동안 60화엄경 강론을 마쳤다. 명성을 들은 도성의 명승 대덕이 모였다. 국왕도 걸림 없는 설법에 찬탄하여 비단 1000여 필을 내렸다. 법문에 감화된 관료들이 보시한 물건이 산처럼 쌓였다. 경덕왕 원년(742) 입적하자 그의 사상을 계승한 양변(良辨) 등 많은 제자들이 일본 화엄학을 크게 일으켰다.

이와 같은 사실 이외에도 일본 사서를 보면 신라불교가 일본불교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많은 승려들이 신라에 유학해서 공부하고 돌아갔다는 기록으로 볼 때 양국의 불교 교류가 빈번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김경집 | 한국전통문화대학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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