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의암에서 미륵보살을 만나 간자를 받은 진표는 출가사찰인 금산사로 돌아와 점찰법회를 열어 대중을 교화하였다. 사진은 금산사 전경. 사진 이창윤.
부사의암에서 미륵보살을 만나 간자를 받은 진표는 출가사찰인 금산사로 돌아와 점찰법회를 열어 대중을 교화하였다. 사진은 금산사 전경. 사진 이창윤.

진표의 수행과 미륵보살의 현응

진표(眞表)는 완산주(完山州) 만경현(萬頃縣)에서 태어났다.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裏)이다.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으로 성은 정 씨(井氏)이다. 나이 열두 살에 이르자 금산사(金山寺) 숭제 법사(崇濟法師)의 문하에 들어가 불법을 배웠다.

숭제 법사는 사미계법(沙彌戒法)을 주면서 “나는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선도 삼장(善道三藏)에게 수업을 받은 후에 오대산으로 들어가 문수보살의 현신에 감응하여 오계(五戒)를 받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진표가 “삼가 수행하기를 어찌하여야 계를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법사가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 《점찰선악업보경》 2권을 주면서 말하기를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지장 두 보살 앞에서 정성을 다해 참회를 구하여 친히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 수행하고자 하는 정성이 지극하면 곧 1년 안에 현신의 감응을 받을 수 있다.” 하였다.

스승의 말을 듣고 진표는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선계산(仙溪山) 부사의암(不思議菴)에 이르자 수행할 만한 자리로 여겼다. 20두의 쌀을 쪄서 말려 양식을 삼았다. 기도를 시작하며 처음은 삼업을 갖추어 수련하였다. 이후 점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亡身懺)을 하였다. 처음에 일곱 밤을 기약하고 오체를 돌에 부딪혀 무릎과 팔뚝이 모두 부서지고 피를 바위에 흩뿌렸으나 성응(聖應)이 없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도록 계법을 구하였으나 수기(授記)를 얻지 못하였다.

분심(憤心)이 일어나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지니 갑자기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손으로 받들어 돌 위에 두었다. 법사는 다시 생각을 돌려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열심히 닦고 돌을 두드리며 참회하였다. 3일이 되자 손과 팔이 꺾여 떨어졌고 7일 밤이 되자 지장보살이 나타나 손에 있던 금석(金錫)을 그곳에 대자 손과 팔이 예전과 같이 되었다. 지장보살이 가사와 바리를 주자 진표는 그 영응에 감동하여 더욱 정진하였다. 21일을 채우자 즉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이 오는 형상을 보았다. 이에 미륵보살이 지장보살과 함께 나타나 진표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였다.

“잘 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를 구하기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고 참회를 간절히 구하는구나.” 지장이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은 간자(簡子) 189개를 주었다. 그 가운데 2개는 8자와 9자가 쓰여 있었다. 미륵이 진표에게 말하였다. “이 두 간자는 나의 손가락뼈이고 나머지는 모두 침단목(沈檀木)으로 만든 것으로 모든 번뇌를 이르는 것이다. 2개는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이른다. 또한 9자는 법 자체이고 8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다. 이제 마땅히 과(果)·보(報)를 알게 되니 너는 이 몸을 버려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후생에는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다. 아울러 너는 이것으로써 세상에 법을 전하여 사람을 구하는 뗏목으로 삼아라.” 이와 같이 말하고 두 보살은 사라졌다.

점찰법회를 통한 대중교화

미륵보살을 만나 간자를 받은 진표는 자신이 출가했던 금산사로 가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다. 대연진(大淵津)에 이르자 갑자기 용왕이 나타나 옥으로 된 가사를 바치고 8만 권속을 이끌고 시위하며 금산사로 동행하였다. 다시 미륵보살이 감응하여 도솔천으로부터 구름을 타고 내려와 진표에게 계법을 주었다. 이에 진표는 대중들에게 시주를 권하여 금산사에 미륵장육상을 조성하였다. 또 금당의 남쪽 벽에 계법을 주는 위의(威儀)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

진표는 금산사에 머물며 매해 개단(開壇)하고 점찰법회를 통해 대중들에게 불법을 전하였다. 대중들이 던진 간자에 나오는 내용을 보고 자신의 업장을 참회하는 법회였다. 법회의 분위기가 매우 정성스럽고 그전에 없었을 정도로 엄중하였다. 그러면서 쉬운 방법 때문에 대중들의 관심과 참여가 높았다. 금산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대중들도 그 내용을 듣고 법회에 참여할 정도였다.

《점찰경》 상권(上卷)에 189개 간자를 던져 나오는 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1자는 대승을 구해 불퇴위(不退位)를 얻는 것이고, 2자는 구하는 바의 과(果)가 증(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3과 4자는 중승(中乘)·하승(下乘)을 구해서 불퇴위를 얻는 것이고, 5자는 신통(神通)을 구하여 성취를 얻는 것이다. 6자는 사범(四梵)을 닦아 성취를 얻는 것이고, 7자는 세선(世禪)을 닦아 성취를 얻는 것이다. 8자는 바라는 바 묘계(妙戒)를 얻는 것이고, 9자는 일찍이 받은 바 구족계를 얻는 것이다. 10자는 하승(下乘)을 구하고 아직 신(信)에 있지 않는 것이고, 그 다음은 중승을 구하고 아직 신(信)에 있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172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거·현세 중에서 혹은 선하기도 하고 혹은 악하기도 하고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 일들이다. 173자는 몸을 버려 이미 지옥에 들어간 것이고, 174자는 죽어서 이미 축생(畜生)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아귀(餓鬼)·수라(修羅)·사람·인왕(人王)·천(天)·천왕(天王)·불법을 들음·출가·성승(聖僧)을 만남·도솔천에 태어남·정토(淨土)에 태어남·부처를 만남·하승(下乘)에 거함·중승(中乘)에 거함·대승(大乘)에 거함·해탈을 얻음까지 모두 189로 표시한 것이다.

금산사에서 시작한 점찰법회는 대중교화에 큰 성과를 내었다. 그러자 진표는 다른 곳에서 포교하기를 서원하였다. 금산사를 나와 속리산으로 향하였는데 길에서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다. 그 소들이 진표 앞을 향해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소달구지를 탄 사람이 내려서 묻기를 “어떤 이유로 이 소들이 화상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화상은 어디에서 오시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진표가 말하기를 “나는 금산사에서 수행하는 진표라는 승려인데, 나는 일찍이 변산 부사의방에 들어가서 미륵·지장 두 성전에서 친히 계법과 진생(眞栍)을 받았다. 금산사에서 점찰법회를 통해 대중을 교화하다 다른 곳에 절을 짓고 머물러 오래 수도할 곳을 찾고자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 소들은 겉은 미련하나 속은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법을 중하게 여기는 까닭으로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이다” 하였다. 그 사람은 듣기를 마치고 이내 “축생도 항상 이와 같은 신심이 있는데 하물며 나는 사람으로 어찌 마음이 없겠는가.”라고 하고 즉 손으로 낫을 잡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 버렸다. 진표는 자비심으로써 다시 머리를 깎아주고 계를 주었다. 속리산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핀 곳을 보고 그것을 표시해 두었다.

유람을 다니다가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강원도)에 이르렀다. 해변으로 향하여 천천히 가는데 물고기, 자라 등의 무리가 바다에서 나와 진표의 앞으로 와서 몸을 이어 육지처럼 만드니, 진표가 그것을 밟고 바다로 들어가 계법을 암송하고 돌아서 나왔다. 가다가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러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 금강산 미륵봉 아래 사찰을 지어 발연사(鉢淵寺)라 하였다. 미륵봉 동쪽 계곡에 발연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주위 바위의 모양이 발우 모양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었고 사명(寺名)이 되었다. 이곳에서 7년을 살며 점찰법회로 대중을 교화하였다.

이때 명주 지역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려서 진표가 이를 위해 계법을 설하니 사람마다 받들어 지켜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였다. 그러자 고성 해변에 셀 수 없을 정도의 물고기가 스스로 죽어서 나오니 백성들이 이것을 팔아서 식량을 마련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경덕왕이 그런 신이함을 듣고 진표를 궁 안으로 초청한 후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그리고 조(租) 7만 7천 석을 보시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후와 외척 모두 수계를 받고 비단 5백 단, 황금 50량을 보시하였다. 이를 모두 받아서 여러 사찰에 나누어주고 널리 불사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왕실의 후원으로 대중을 교화하던 진표는 혜공왕 6년(770)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발연사로 돌아왔다. 함께 도업을 닦으며 효를 다하였다. 진표가 세상을 뜰 때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 죽으니 제자들이 시신을 옮기지 않고 공양하고 해골이 흩어질 때 흙을 덮고 무덤으로 삼았다. 푸른 소나무가 곧 나왔다가 세월이 오래되면서 말라 죽었다. 다시 나무 한 그루가 났고 후에 다시 한 그루가 났는데 그 뿌리는 하나였다. 지금도 두 나무가 있다. 무릇 공경을 다하는 사람은 소나무 아래에서 뼈를 찾는데, 혹은 얻고 혹은 못 얻기도 한다.

진표의 법을 얻은 제자 가운데 뛰어난 이는 영심(永深), 보종(寶宗), 신방(信芳), 체진(體珍),진해(珍海), 진선(眞善), 석충(釋忠) 등이다. 모두 산문(山門)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그 가운데 영심은 속리산에 진표가 띠를 엮어 표시한 곳에 절을 짓고 법통을 계승하는 한편 간자를 가지고 점찰법회를 열어 대중을 교화하였다.

김경집 |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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