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장과 광덕의 현신성불

문무왕 대에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친하여 밤낮으로 약속하여 말하였다. “먼저 극락으로 가는 사람은 모름지기 알려야 한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에 은거해 짚신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으며 처자를 끼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나무를 불태워 힘써 경작하였다.

하루는 해 그림자가 붉은빛을 띠고 솔 그늘이 고요히 저물었고 창밖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자네는 잘 살다가 빨리 나를 따라오라.”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와 그것을 살펴보니 구름 밖에 천악(天樂) 소리가 들리고 밝은 빛이 땅으로 이어져 있었다. 다음날 광덕의 집에 가보니 죽어 있었다. 그의 부인과 함께 시신을 거두고 무덤을 만들었다.

일을 마치자 부인에게 말하기를 “남편이 죽었으니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니 부인이 “좋다” 하여 합가하였다. 밤이 이슥하여 자려고 할 때 엄장이 통정하고자 하니 부인이 부끄러워하면서 말하였다. “법사가 정토를 구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엄장이 놀라고 이상하여 물었다. “광덕은 이미 하였는데 나 또한 어찌 꺼리겠는가.” 부인은 말하였다. “남편과 나는 10여 년을 함께 살았어도 아직 하룻밤도 같은 침상에서 자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서로 몸이 닿아서 부정하게 더럽혔겠습니까. 매일 밤 단정한 몸으로 바르게 앉아 한 소리로 아미타불만 염불하였고, 혹은 16관을 만들고 관이 이미 무르익어 밝은 달이 문으로 들어오면 이때 그 빛 위에 올라 가부좌를 하였습니다. 정성을 다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비록 서방으로 가지 않고자 하더라도 어디로 가겠습니까. 무릇 천 리를 가는 자는 한 걸음으로 가히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 법사의 관은 동쪽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쪽은 아직 알 수 없을 정도로 먼 것 같습니다.”

엄장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물러 나왔다. 곧바로 원효법사(元曉法師)가 거처하는 곳으로 나아가 진요(津要)를 간절히 구하였다. 원효는 삽관법(鍤觀法)을 만들어 그를 가르쳤다. 엄장은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쳤고 한뜻으로 관을 닦아 서방정토에 오를 수 있었다.

남쪽 백월산의 두 성인의 성불

《삼국유사》에 있는 ‘남백월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 조는 신라 수행자가 미륵불과 아미타불이 되는 성불의 내용이다. 신라 구사군(仇史郡)에 백월산이 있고 동남쪽으로 삼천 보를 가면 선천촌이 있었는데 그 마을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약관의 나이에 마을 동북쪽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에 가서 출가하였다. 그 후 승도촌으로 가서 부득은 회진암(懷眞庵)에 살았고, 박박은 유리광사(瑠璃光寺)에 살았다.

두 사람 모두 처자를 데리고 와서 살면서 산업을 경영하고 서로 왕래하면서 정신을 수양하였다. 항상 마음을 편안히 하면서 방외(方外)의 생각을 잠시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육신과 세상의 무상함을 관조하고 서로 말하기를, “기름진 밭과 풍년든 해는 참으로 좋지만, 의식(衣食)이 마음에 따라 생겨서 저절로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고, 부녀와 집이 진정으로 좋지만 연화장〔蓮池花藏〕에서 많은 성인과 함께 놀고 앵무새나 공작새와 함께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하물며 불법을 배우며 마땅히 성불해야 하고 참된 것을 닦으면 반드시 참된 것을 얻어야 함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는 이미 머리를 깎고 수행자가 되었으니, 마땅히 얽힌 인연에서 벗어나 무상의 도를 이루어야지, 어찌 풍진에 골몰하여 세속의 무리와 다름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들은 세속을 떠나서 장차 깊은 골짜기에 숨으려고 하였다. 어느 날 밤 꿈에 백호(白毫)의 빛이 서쪽으로부터 비치면서 빛 가운데서 금색의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이마를 만져 주었다. 깨어나 꿈 이야기를 하였더니 두 사람이 같았다. 오랫동안 감탄하다가 성덕왕 5년(706) 드디어 백월산 무등곡(無等谷)으로 들어갔다.

박박은 북쪽 고개의 사자암을 차지하여 판잣집 8자 방을 짓고 살았으므로 판방(板房)이라고 하였다. 부득 스님은 동쪽 고개의 첩첩한 바위 아래 물이 있는 곳에 역시 방장(方丈)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뇌방(磊房)이라고 하였다. 부득은 부지런히 미륵불을 구했고 박박은 아미타불을 예배하고 염송하였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 무렵 나이 20세 무렵의 낭자가 북암에 와서 기숙하기를 청하자 박박이 “사찰은 청정을 주로 하니 너는 지체 말고 가라.” 하고 문을 닫았다. 낭자가 남암을 찾아가서 부득에게 청하자 부득은 중생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려 맞아들였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가다듬어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염송에만 전념하였다. 밤이 이슥하여 낭자가 부득을 불러 말하기를, “제가 해산기가 있으니 화상께서는 짚자리를 좀 깔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부득은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촛불을 은은히 밝히니 낭자는 벌써 해산하고 다시 목욕할 것을 청하였다. 부득의 마음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하였다. 그러나 불쌍한 생각이 들어 통을 준비하여 물을 데워 목욕시켰다. 조금 있다가 통 속의 물에서 향기가 강렬하게 나고 물이 금빛으로 변하였다. 부득이 깜짝 놀라자, 낭자가 말하기를, “우리 스님께서도 여기에서 목욕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부득이 마지못해 그 말대로 쫓았더니, 홀연히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살갗이 금빛으로 변하였다. 그 옆을 보니 문득 하나의 연화대가 생겼다. 낭자는 그에게 앉기를 권하며 말하기를, “나는 관음보살의 화신인데 이곳에 와서 대사가 대보리(大菩提)를 성취하도록 도운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낭자의 실험을 이겨낸 부득은 자신의 서원대로 미륵불이 되었다. 다음날 찾아온 박박을 도와 미타불이 되게 하였다. 두 성인이 성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참배하고 찬탄하니 두 성인은 그들을 위해 설법하고는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신라 경덕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재위 16년(757) 대가람을 창건하여 ‘백월산 남사’라고 하였다. 절이 완성되자 금당에 미륵불을 조성하여 ‘현신성불미륵지전’이라 하고, 또 강당에 미타불을 모시고 ‘현신성도무량수전’이라 하였다.

삽화 강병호 화백.
삽화 강병호 화백.

여자 노비 욱면의 현신왕생

《삼국유사》에 현재의 몸으로 서방극락 세계에 왕생한 욱면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신라 경덕왕 때 강주(지금의 진주)에 청신사 수십 인이 뜻을 모아 극락정토에 왕생하고자 미타사를 창건하고 만일 동안 기도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때 청신사 가운데 아간 귀진(貴珍)의 집에 욱면이라는 여자 노비가 있었다. 그 노비는 주인을 따라 절에 와서 마당 가운데에서 스님을 따라 염불하였다. 이를 본 주인이 노비가 일을 잘 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매번 곡식 2석을 주어 하루 저녁에 찧게 하였다. 욱면은 이를 초저녁에 다 마치고 절에 와서 열심히 염불하였다. 그녀는 기도할 때는 뜰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에 매고 합장한 다음 좌우로 흔들며 자신을 격려하였다.

그녀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한 것은 전생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음이 현신한 팔진 스님이 천명을 이끌고 결사를 조성하였다. 두 그룹으로 나누어 수행하였는데 하나는 ‘노력(勞力)’이고 다른 하나는 ‘정수(精修)’였다. 노력에 속한 사람 가운데 일을 맡아보는 자가 계를 얻지 못하여 축생도에 떨어져 부석사의 소가 되었다. 그렇지만 경을 싣고 가는 공덕의 힘으로 아간 귀진의 집 여자 노비로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정진하자 공중에서 부르기를 ‘욱면은 법당에 들어가 염불하라’ 하였다. 절의 대중들이 그 소리를 듣고 욱면에게 법당에 들어가 예에 따라 정진하기를 권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9년이 되어 서쪽 하늘에서 음악이 들려오더니 욱면이 공중으로 솟아 대들보를 뚫고 나가 서쪽으로 갔다. 교외에 이르러 육신을 버리고 진신(眞身)으로 변한 다음 연화대에 앉아 대광명을 발하면서 천천히 가버리니 음악 소리가 공중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때 지붕에 뚫린 구멍이 한 아름만 했으나 폭우와 큰 눈이 와도 젖지 않았다.

욱면은 소백산에 이르러 신 한 짝을 떨어뜨렸으므로 그 땅에 보리사를 짓고 또 산 아래에 이르러 육신을 버렸으므로 그곳에 두 번째 보리사를 짓고 그 전각을 ‘욱면등천지전(勗面登天之殿)’이라 하였다. 지붕 용마루에 뚫린 구멍은 열 아름가량 되었으나 비록 폭우와 폭설이 와도 젖지 않았다.

욱면이 떠나간 후 귀진 역시 그 집이 이인(異人)이 의탁해서 태어난 곳이라고 하여 희사하여 절을 만들어 법왕사라고 하고 토지와 노비를 바쳤다. 절은 오랜 뒤에 폐허가 되었는데, 대사 회경(懷鏡)이 승선(承宣) 유석(劉碩)과 소경(小卿) 이원장(李元長)과 함께 발원하여 중창하였다. 회경이 몸소 토목 일을 했는데, 처음 재목을 운반할 때 꿈에 어떤 노인이 삼으로 된 신과 칡으로 된 신을 한 켤레씩 주었다. 5년 만에 공사를 마치고 노비들을 더 두어 융성해져 동남지방의 유명한 절이 되었다. 이때 사람들은 회경을 귀진의 후신이라고 하였다.

김경집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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