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간행된 불교계의 잡지는 불교계의 ‘개혁’과 ‘유신(維新)’이라는 최대 관심사를 주제로 소개하고 있었다.1) 조선 시대의 극심한 탄압에 시달렸던 불교의 낙후성을 지적하고, 변화하는 시대상을 선도할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1931년 창간된 《선원(禪苑)》지는 선학원(禪學院)의 기관지이다. 선학원은 일본 불교의 침투와 불교계의 왜색화 경향에 항거한 수좌들이 과거의 것만으로 이해한 선(禪)을 중심으로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수호하고, 선풍진작을 위해 창설하였다. 《선원》지는 창간된 이후 선학원의 설립 정신을 불교계에 소개하고, 그동안 개혁과 유신의 유행으로 관심사에서 멀어진 선의 대중화와 한국 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진력하였다. 때문에 《선원》은 일제하 불교 개혁과 근대화를 강조했던 여타의 불교계 잡지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선원》지에 관한 불교학계의 연구는 그 성격이나 불교사적 의미를 검토하고 있다.2)

일제하 불교계의 동향 속에서 《선원》지가 창간된 배경은 선학원의 창설 내지는 활동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선원》지는 당시 불교계에서 선학원과 교무원(敎務院)과의 관계라든가 암울한 선원 수좌들의 생활을 지적하고 수행 여건 마련을 위한 선학원의 노력들을 지속적으로 수록하고 소개하고 있어 주목된다. 주요 집필진의 글은 당시 불교계의 진화론과 유물론을 앞세운 개혁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선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선의 중흥과 대중화를 위해 선 수행을 둘러싼 기초적인 개념을 소개하고, 선사의 어록과 공안집인 《선문염송》을 풀이하기도 하였다.

1. ‘선원’의 창간 배경

《선원》지는 일제하 불교계의 동향 속에서 창간되었다. 이 시기는 일제의 불교계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 선학원이 창설되었고, 불교계 내부의 갈등, 한국 불교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과 유신의 움직임, 그리고 대처식육으로 상징되는 왜색불교에 대항한 한국 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선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 등 복잡한 변화를 겪었다. 《선원》지는 이와 같은 일제하 불교계의 다양한 양상을 상징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이 영이각靈而覺하고 적이조寂而照하는 일물一物을 가르쳐서 혹은 불佛이라 혹은 여래如來라 일르며 선종에서는 이것을 가르처서 혹은 일영一靈의 진성眞性이라 혹은 열반涅槃의 묘심妙心이라 하는 바 선학禪學의 공부工夫로써 차일물此一物을 발견하고 포착捕捉하는 묘리妙理가 지간지역至簡至易하고 지명지료至明至瞭하야 직하直下에 신득信得하면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 와력瓦礫이 방광放光하고 부하富下에 오입悟入하면 촉처觸處에 해탈이라 정역淨域이 각하脚下에 건설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취理趣를 입으로 말하지 아니하고 붓으로 써 보이지 아니하면 누가 알겟습닛가 그래서 본시부터 문자에 서투른 선학禪學의 수자修者라도 시대가 시대인 만큼 정구묵수精究黙守만 할 때가 아니라 하야 본지本誌를 세상에 보내게 된지라 무사蕪辭로써 창간사를 대代하는 바로소이다.3)

《선원》지 창간의 배경은 첫째, 한국 불교의 정체성 확립에 있었다. 인용문은 선학(禪學) 가운데 훌륭하고도 미묘한 이치가 많지만,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일물(一物)’을 입과 붓으로 보이기 위해 《선원》지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학의 의미를 알기 쉽게 풀이해서 소개하고자 한 측면도 있지만, 당시 불교계의 상황을 단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선원》지 창간호~4호.
《선원》지 창간호~4호.

우선 《선원》지의 창간은 선학원이 설립된 이후 침체기를 딛고 이룩한 중흥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선학원은 선의 부흥과 불조정맥(佛祖正脈)을 계승하기 위해 설립되었지만, 당시 불교계는 선원(禪院)에 대한 인식의 희박과 대처풍조의 만연으로 독신 수좌들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심화되어 갔다. 이것은 재정문제를 야기시켰고 급기야 운영난에 직면하였다. 1924년부터 어려움이 심화되어 1926년에는 범어사 포교소로 전환되기도 하였다.4)

선학원의 폐쇄와 선우공제회의 해산을 극복하고 재건된 것은 적음(寂音) 스님이 1931년 1월 21일 선학원을 인수하면서부터였다.5) 그는 선학원 인수 직후 수좌대회(首座大會)를 개최하고, 당시 불교계 대표기관인 교무원 종회에 중앙선원(中央禪院) 설치 건의안을 제출하는 등 선을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아울러 남녀선우회(男女禪友會)를 조직하고, 한용운, 백용성, 김남전 등의 설법과 강화를 통해 선의 대중화 역시 모색하였다.

적음은 선학원을 일제하 불교계에서 선의 대표기관으로 확립시키고자 진력하였다. 그러므로 선학원의 창설과 침체, 재건의 과정은 당시 불교계가 선이 차지하는 전통과 위상에 대한 소극적 인식, 그리고 그에 대한 극복을 의미한다.

1900년을 전후하여 1930년대 중반까지 한국 불교는 ‘개혁’, ‘혁명’, ‘유신’의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일제하 불교계의 지식인들은 조선 시대의 극심한 탄압에서 벗어나 타종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성(自省)과 개혁에 앞장서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수용한 이른바 사회진화론의 생존 경쟁 원리는 전통 불교를 변화하는 시대에 알맞게 개혁해야 한다는 인식의 기초로 활용하였다.

기독교를 비롯한 타종교의 급속한 전파와 발전은 불교계에 위기의식을 가져다주었고, 자기 개혁과 계몽의 필요성은 당연한 것이었다. 한용운(1879∼1944), 권상로(1879∼1965), 박한영(1870∼1948) 등은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불교개혁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고, 개혁의 당위성을 계몽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포교를 중시하고 염불당을 폐지하며, 사원의 위치를 도회지로 옮기자고 주장했으며, 개혁의 방법, 개혁의 전례와 대상을 교계 언론에 소개하기도 하였다.6) 그러나 일본 불교를 선진문명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점차 일본 불교에 경도된 점이나 한국 불교가 지닌 정체성을 근대 불교와 개혁의 이름하에 부정하고 척결해야 할 요소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론은 일제의 사찰령과 거기에 순응하는 보수 기득권층의 확산으로 점차 그 생기를 잃었다.7)

결국 일제통치라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불교 개혁론은 시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 부족과 본질적인 자기반성, 그리고 선교(禪敎)를 기초로 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찰 부족으로 충분한 효과를 보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러므로 《선원》지 창간의 본질적 출발은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선원’ 창간호 목차.
‘선원’ 창간호 목차.

선학원과 《선원》지의 집필진들은 선이 사회진화론과 유물론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채워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동안 불교계의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진 선 수행을 한국불교의 왜색화를 막고 폐허가 된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인지하였다.

선종의 본래면목을 회복하기 위해 찬란한 한국 불교의 선종사를 기술했고, 선의 효용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진정한 불교 개혁은 선 수행을 통한 깨침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천명하였다. 요컨대 《선원》지는 선이 지닌 개념과 역할, 선의 역사 등을 소개하여 그동안 불교 개혁론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선의 효용성과 한국 선이 지닌 실제적인 위상과 가치를 알리고자 하였다.

한편 《선원》지는 선의 중흥과 대중화를 이루기 위한 선학원의 활동과 그 가치를 불교계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1931년 창간되었다. 《선원》지는 창간 직후에는 선학원 인수의 과정과 인수 직후 참선을 시작한 모습이라든지 당시 고승들의 설법과 강화(講話)의 면모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선학원일기초요(禪院日記抄要)>라는 이름으로 선학원의 크고 작은 활동들을 정리하였고,8) 수좌들의 지방 선원에서의 수행 역시 기술하였다.

《선원》지의 이와 같은 기관지로서의 면모는 1934년 12월 5일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으로 개편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1935년 재단의 조직 개편과 창종(創宗)의 의미를 지닌 조선불교수좌대회(朝鮮佛敎首座大會)와 같은 선학원 본부의 활동9)뿐만 아니라 지방 각 선원의 소식과 심지어 재단법인 설립 당시 기부 재산자 일람표도 소개하였다.10) 선학원이 재단법인으로 개편되고 난 이후 규모가 확대되고 그 활동 역시 체계적으로 진행되면서 《선원》지의 역할 역시 중요해졌다.

요컨대 《선원》지 창간의 두 번째 배경은 선의 중흥과 대중화를 위한 선학원의 설립정신과 활동을 일제하 불교계에 천명하고 충실히 전달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비록 선학원이 개혁의 주체가 되지 못했고, 불교계의 주류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선의 대중화를 위한 《선원》지의 노력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주]-----

1) 일제하 불교계의 잡지·신문의 발간에 대해서는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편(2005), 《조계종사》 근현대편, 조계종출판사. 110∼111쪽의 <1910년∼1945년의 잡지·신문일람표>가 참고할 만하다.

2) 오경후(2008), <日帝下 《禪苑》誌의 創刊과 그 性格>, 《한국사상과 문화》 44, 한국사상과문화학회.

3) 선학원〔昭和 6年(1931)〕, <創刊辭>, 《禪苑》 創刊號, 禪學院, 3쪽.

4) 김한규(1978), 《南泉禪師文集》, 人物硏究所, 213쪽.

5) 老婆〔昭和 6年(1931)〕, <禪學院日記抄要>, 《禪苑》 創刊號, 禪學院, 28쪽.

6) 권상로(1912. 4∼1913. 7), <조선불교개혁론>, 《조선불교월보》 3-18호.

7) 이재헌, 앞의 논문, 77쪽.

8) 老婆〔昭和 6年(1931), 昭和 7年(1932)〕, <禪學院日記抄要>, 《禪苑》 創刊號(28∼29쪽) / 《禪苑》 2號(85∼86쪽), 禪學院.

9) 禪學院〔昭和 10年(1935)〕, <우리각긔관의활동상황>, 《禪苑》 4號, 29∼34쪽.

10) 禪學院〔昭和 10年(1935)〕, <財團法人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設立當時寄附財産者一覽表>, 《禪苑》 4號, 44∼45쪽.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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