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항성과 함께 세워진 당항진은 신라 구법승들이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탄 곳이었다. 당항성으로 비정되는 사적 ‘화성 당성’ 항공사진. 사진 문화재청.
당항성과 함께 세워진 당항진은 신라 구법승들이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탄 곳이었다. 당항성으로 비정되는 사적 ‘화성 당성’ 항공사진. 사진 문화재청.

신라의 구법승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를 통해 전해졌다. 처음에는 부족 신앙이 강해 불교가 쉽게 수용되지 못했다. 그 후 공주의 치병, 외국 사신의 공경 등을 계기로 포교할 수 있었으나 토속신앙의 저항으로 지속되지 못하였다.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다시 공인되었다. 진흥왕 12년(551) 고구려 혜량(惠亮)이 승통으로 임명되면서 승려의 출가와 수행 방법 등 신라의 교단 체계가 정립되었다. 그리고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와 팔관회(八關會) 등 중요한 불교 의례가 행해져 민심을 통일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불교의 토대가 굳건해지면서 교학에 대한 열의가 커졌다. 중층적 체계를 이루고 있는 불교 교리는 배울수록 궁금증을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전교승(傳敎僧)이 가지고 오는 경전의 양은 한계가 있었다. 그런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과 인도로 불교를 공부하러 가는 구법승이 등장하게 되었다.

진흥왕 12년(551) 신라와 백제는 연합하여 고구려 영토인 한강 유역을 공격하였다. 신라는 거칠부 등 여덟 장수를 보내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현을 빼앗았다. 2년 뒤 신라는 백제의 동북 지역을 점령한 후 새로운 주(州)를 설치한 다음 각간 무력(武力)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당항성(党項城)을 쌓고 중국으로 갈 수 있는 항구 당항진(党項津)을 확보하였다.

대당해로(對唐海路)를 확보한 신라는 중국 남북조에 사신을 보내며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 25년(564)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냈고, 27년(566) 남쪽의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진흥왕 이후에도 중국과의 교류는 지속되었다. 중국의 왕조가 수나라, 당나라로 교체될 때도 계속되었다.

이런 교류로 불교의 유입이 증가하면서 신라불교도 발전하였다. 진흥왕 26년(565) 불교 서적이 부족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 진나라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올 때 경론 1700여 권을 가지고 오도록 하였다. 27년(566) 기원사와 실제사 두 절을 지었으며, 같은 해에 황룡사도 완공하는 등 많은 사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29년(568) 전몰장병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팔관회를 개최하였다.

진흥왕의 숭불정책은 많은 구법승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광(圓光)은 진평왕 11년(589) 해로로 진나라 금릉(金陵)에 갔다. 처음에는 유학을 배우러 갔지만 불법을 듣고 귀의하였다. 장엄사(莊嚴寺) 승민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받는 등 11년 동안 성실·열반·삼론 등 대승불교를 연구하였다. 진평왕 22년(600) 귀국하여 신라에 대승법문을 펼쳤다. 그의 학문이 매우 높아 국왕으로부터 성인처럼 공경 받았다.

안함(安含)은 수나라에 유학하는 동안 대흥성사(大興聖寺)에 머물렀다. 황실의 지원을 받아 당시 융성했던 천태학과 삼론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귀국해 왕실에 《능가경》과 《승만경》을 바친 것을 볼 때 여래장 사상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밀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귀국 후 호승(胡僧) 비마라진제와 함께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을 번역하였다. 이 경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경명으로 볼 때 밀교계 경전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밀교 사상을 알 수 있는 저서는 《참서(讖書)》 1권과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이다. 두 저술은 이름만 전해지고 있지만 다른 곳에 전해지고 있는 내용으로 볼 때 밀교적 저술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신라 사회에서 본격적인 밀교 활동을 펼친 안함은 선덕여왕 9년(640) 64세로 만선도량에서 입적하였다.

진평왕 때 중국으로 오가는 국서를 담당하던 원광은 선덕여왕 재위 동안에는 몸이 아파 정사를 도울 수 없었다. 급기야 선덕여왕 9년(640)에 황룡사에서 입적하자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였다. 자장(慈藏)이 구법의 뜻이 있음을 알고 불법과 함께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워오도록 칙명을 내렸다.

자장이 구법할 무렵 신라 왕조는 성골의 부재로 연이어 여왕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약해졌다. 나제동맹의 와해로 시작된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은 진지왕과 진평왕을 거쳐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중국에서는 수나라에서 당나라로 교체되었다. 국제정세가 긴박한 상황에 이르자 신라 왕실은 중국과 소통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였다.

이런 왕실의 현실과 구법의 뜻이 있었던 자장은 선덕여왕 5년(636) 중국으로 건너가 12년(643) 3월 신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대국통에 임명된 그는 불교계를 개편하고 승니의 모든 규범을 새로 정하였다. 그리고 많은 대승의 경론과 계율을 강의하고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는 등 신라 사회와 국민통합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라의 구법승 가운데 중국을 거쳐 인도로 간 수행자는 아리나발마(阿離那跋摩)였다. 처음에 중국 장안으로 갔다. 그곳에서 불교를 배우는 과정에서 인도를 순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정관 연간(627~649)에 인도로 가서 나란다사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계율과 논서를 공부하면서 그 내용을 조개껍질과 나뭇잎에 베껴 썼다. 오래 되자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이 70세에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뒤에도 혜업, 현태, 구본, 현각, 혜륜, 현유 등이 인도로 구법을 하였다. 이들은 중도에서 죽고 혹은 살아서 인도에서 머물렀다. 오직 현태만이 당나라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그 역시 어디에서 입적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만큼 인도로 가는 구법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고난의 여정이었다. 그들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런 활동으로 후학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 의해 인도인들은 저 멀리 동쪽에 신라가 있음을 알았다. 이를 구구탁예설이라 불렀다. 구구탁은 닭을 말하는 것이고 예설은 귀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게 불렀던 것은 신라에서 계신(鷄神)을 높이 받들고 닭의 깃을 꽂아서 관을 장식하였기 때문이다.

신라 구법승이 출발하던 항구 당항진

신라의 구법승들이 중국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탄 곳은 당항진(党項津)이었다. 이 명칭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통일 후 당은포(唐恩浦)로 바뀌었다. 이곳은 신라 말까지 중국으로 가는 해로의 출발지였다.

이곳은 당항성과 함께 세워졌기 때문에 그 주변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항성은 신라가 백제 동북쪽 땅을 차지하고 세운 산성이었다. 고려가 건국되면서 이곳의 중요성은 떨어졌다. 《삼국사기》가 편찬될 무렵에는 이름만 있고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분류될 정도였다. 그 후 1998년과 2000년 한양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한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에서 당항성으로 추정될 수 있는 여러 자료가 발굴되면서 이곳으로 비정(比定)하고 있다.

그런 발굴 결과 당항진도 당항성 주변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당항성은 신라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에 세운 새로운 주(州)를 지키는 최전방 군사 주둔지였다. 북쪽의 고구려와 남쪽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대당해로의 출발지인 당항진을 세우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보다는 당항성 후방 신라에서 가까운 곳에 항구를 세우고 별도의 군사를 상주시켜 지켰을 가능성이 크다.

당항진이란 명칭은 신라가 통일할 무렵까지 그렇게 불렸다. 그 후 사료에는 당항진이란 명칭은 보이지 않고 당은포가 등장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전국을 9주 5경으로 개편하였다. 점령 지역인 고구려와 백제를 3주로 나누었다. 본국의 경계에도 3주를 설치하여 왕성 동북쪽으로부터 당은포로(唐恩浦路)에 해당하는 곳을 상주(尙州), 왕성 남쪽을 양주(良州), 그리고 서쪽을 강주(康州)라 하였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당항진에서 당은포로 개칭된 것으로 생각된다.

당항진에서 당은포로 이름을 바꾼 항구의 위치는 어디일까?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새롭게 당은포를 두었다. 당나라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고려하여 당항진을 단순히 당은포로 바꾸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선행연구들은 당항성을 지금의 화성시로 비정한다. 산성인 당항성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그곳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항구는 바닷가에 있어야 하고, 그곳은 당연히 당항성 주변의 바다였을 것이다. 전략상 최전방 군사 주둔지인 당항성 앞보다 뒤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경덕왕 때 개편된 행정 지역 명칭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당항성이 있는 지역은 당성군이었다. 경덕왕 때 이곳을 당은군으로 고쳤다. 그렇게 개편한 것은 이곳에 당은포가 있어 항구의 명칭을 가져다가 지역의 명칭으로 쓴 것이다.

당은군에 속한 현은 2개였다. 하나는 상홀현(上忽縣)으로 경덕왕 때 차성현(車城縣)으로 고쳤다가 후에 용성현(龍城縣)으로 바뀌었다. 다른 하나는 부산현(釜山縣)으로 경덕왕 때 진위현(振威縣)으로 바뀐 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용성현은 지금 지금의 평택시 안중면 용성리 일대로 비정하고, 진위현은 평택시 송탄동으로 비정한다.

당은군의 두 현 가운데 항구가 있었을 곳은 내륙 쪽 진위현보다 바닷가의 용성현이다. 현재 이곳은 평택시 포승읍 지역이다. 경기도 수원군에 속했던 포내면(浦內面)과 승양면(升陽面)이 통합되어 포승읍이 되었다. 포내면 지명이 포구 안쪽이라는 의미로 볼 때 포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가정했던 것처럼 당은포가 당항진 그 자리에서 명칭만 바뀌었던지, 아니면 통일 후 지리적 여건을 감안하여 위치를 옮긴 후 당은포라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사료상 그 위치는 현재 평택시 포승읍과 접해있던 바다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후 당은포는 개칭 없이 신라 말까지 존속하며 신라의 구법승이 출발하는 항구였고, 중국문화가 유입되는 관문 역할을 하였다.

김경집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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