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상 김양도는 밀본 스님의 치병주술로 병이 낫자 흥륜사에 미륵삼존상을 봉안하고 법당에 금색 벽화를 조성하는 등 독실한 불자가 되었다. 사진은 2015년 경 경주 흥륜사 모습. 사진 문화재청.
승상 김양도는 밀본 스님의 치병주술로 병이 낫자 흥륜사에 미륵삼존상을 봉안하고 법당에 금색 벽화를 조성하는 등 독실한 불자가 되었다. 사진은 2015년 경 경주 흥륜사 모습. 사진 문화재청.

밀본(密本)의 치병주술

고대 밀교 사상을 정립한 밀본은 삼기산 금곡사에서 수행하였다. 이곳은 원광이 주술에 관심을 가지고 수행한 곳으로 그가 입적하자 후학들이 부도를 세웠다. 밀본은 원광과 사자상승의 관계는 아니었으나 그의 밀교 사상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삼기산 금곡사는 고대 밀교의 서막을 여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밀본은 밀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때 활동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밀교를 원하지 않는 기존 불교의 저항은 가장 큰 난관이었다. 그는 왕의 치료를 계기로 이런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다.

선덕여왕은 병이 깊어지자 흥륜사 승려 법척(法惕)을 불러 곁에서 치료하도록 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신하들은 덕행이 알려진 밀본 법사를 불렀다. 왕실에 들어간 그는 왕의 침실 밖에서 《약사경》을 읽었다. 독경을 끝내자마자 가지고 있던 육환장이 침실 안으로 날아 들어가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을 찔러 뜰 아래로 내던졌다. 그 후 왕의 병이 나았으며 밀본의 정수리 위에서 오색의 신광이 발하였다. 이를 본 모든 사람이 놀랐다.

밀본의 치병 주술 신이는 승상 김양도(金良圖)를 치료하는 데도 나타났다. 승상 김양도가 어린아이일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 말을 할 수 없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의 눈에는 매번 큰 귀신이 작은 귀신을 이끌고 와서 집안의 모든 음식을 다 맛보는 것이 보였다. 무속을 불러 제사를 지냈지만 귀신들은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모여서 희롱하였다.

김양도가 비록 물러가라고 말하고 싶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들의 병환을 지켜본 부친이 법류사(法流寺)의 승려에게 부탁해 경전을 독송하였다. 그러자 큰 귀신이 작은 귀신에게 명하여서 철퇴로 승려의 머리를 치자 땅에 거꾸러지며 피를 토하고 죽었다.

며칠 후에 사자를 보내 밀본을 초청하였다. 밀본 법사가 청을 받아들여 온다고 하니 귀신들이 모두 얼굴빛이 변하였다. 작은 귀신이 말하기를 “법사가 오면 장차 이롭지 못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자 큰 귀신이 거드름을 부리면서 “어찌 해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조금 후에 사방의 대력신(大力神)이 모두 쇠로 된 갑옷과 긴 창을 지니고 와서 귀신들을 잡아 묶어 갔다. 그다음 무수한 천신이 와 김양도 주위를 둘러쌌다. 잠시 후 밀본이 와서 경전을 펴려고 할 때 병이 완치되어 말이 통하고 몸이 풀렸다. 이를 계기로 김양도는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여 흥륜사의 주존인 미륵존상과 좌우 보살을 봉안하였으며, 법당에 금색 벽화도 조성하였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내용으로 볼 때 밀본이 왕의 병에 《약사경》을 활용한 것처럼 승상 김양도의 치병 때도 《약사경》을 독송한 것으로 생각된다. 《약사경》의 본래 이름은 《약사여래본원공덕경(藥師如來本願功德經)》이다. 중국에서 여러 차례 번역되었다. 중국 남조 송나라 때 번역되기 시작한 《약사경》은 수, 당을 거치면서 점차 밀교적인 내용이 포함되었다. 특히 네 번째인 당나라 신룡 3년(707) 의정(義淨)의 번역에는 약사여래를 포함하여 동방 칠불의 세계, 불명, 본원을 각각 설하고 또한 주문을 설하는 등 밀교 내용이 대폭 증가되었다.

《약사경》은 일찍부터 《관정경》에 ‘불설관정발제과죄생사득도경(佛說灌頂拔除過罪生死得度經)’이란 이름으로 포함되어 전승되었다. 이 경이 치병과 함께 적을 무찌르는 효용이 큰 것은 악신, 마귀, 독룡 등의 괴로움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는 무수한 천왕, 신왕, 용왕 등의 이름을 설해주고, 그러한 명호를 부르거나 써 붙이면 일체 악신이 범하지 못하여 질병과 재액 등이 제거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신주를 받기 위해서는 관정 의례가 필요하며, 가호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비구, 비구니, 삼귀오계의 수지자, 부처님 열반 후 사부제자, 궁택, 사리탑 등이다.

이런 내용 외에도 《약사경》에는 점복, 추선, 예경 등이 강조되었다. 나라에 질병이 유행하는 것은 그 나라 사람이 살생을 즐겨하기 때문에 죽은 짐승이 귀신으로 태어나 앙갚음하는 것이다. 이런 재난을 끊으려면 살생을 금지하는 계율을 수지하고 십선을 행하여야 한다. 그렇게 악을 끊고 선을 행하면 부를 이루고, 수명이 연장되며, 그리고 많은 어려움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전해진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약사경》은 《관정경》 12권으로 포함되어 전승되었고, 《관정경》은 명랑이 문두루법을 펼칠 때 소의 경전으로 활용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중국에서는 물론 한국 고대사회에서 밀교 사상의 근간이 되는 경전임을 알 수 있다.

밀본은 이런 《약사경》의 내용을 가지고 선덕여왕의 병과 승상 김양도의 병을 치료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본격적인 한국 고대 밀교를 개척한 선구자가 되었으며, 이것을 계기로 고대사회에서 본격적인 밀교 사상이 전개될 수 있었다.

혜통(惠通 ) 치병주술

한국 고대 밀교에 있어 순밀 사상을 전한 이는 혜통이다. 그가 출가한 계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 뼈를 동산 안에 버렸다. 이튿날 아침 그 뼈가 사라졌는데 핏자국을 따라서 찾아가니 뼈는 원래 살던 굴로 돌아가서 새끼 다섯을 품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본 혜통은 놀라고 이상한 마음이 들어 한참을 쳐다보았다. 미물의 모성에 감탄하다가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여 이름을 혜통이라 하였다.

구법에 뜻을 둔 혜통은 당나라로 가 무외삼장(無畏三藏)을 찾아가서 배우기를 청하였다. 삼장이 말하기를 “외딴 오랑캐 사람이 어찌 법기(法器)를 감당하겠는가”라고 하며 가르쳐 주지 않았다. 혜통은 가벼이 물러가지 않고 3년이나 부지런히 섬겼으나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혜통은 이에 분하고 애가 타서 뜰에 서서 머리에 불 그릇을 이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정수리가 터져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삼장이 그것을 듣고는 와서 불 그릇을 치우고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어루만지며 신주(神呪)를 암송하자 상처가 붙어서 예전처럼 되었다. 흉터가 왕자(王字) 무늬와 같았으므로 인하여 왕화상(王和尙)이라고 부르고 그 기지를 깊게 여겨 인결(印訣)을 전해주었다.

혜통은 당나라 고종의 딸이 병에 걸리자 신주(神呪)를 치병(治病)에 활용하였다. 고종은 무외삼장에게 공주의 병을 치료해주기를 청하였다. 무외삼장이 혜통을 대신 추천하자 흰콩 1두를 가지고 은그릇 속에 넣고 주문을 외우니 흰 갑옷을 입은 신병(神兵)으로 변하여 병을 치료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다시 검은 콩 1두를 가지고 금 그릇에 넣고 주문을 외우니 검은 갑옷을 입은 신병으로 변하였다. 두 색의 병정이 함께 병을 쫓으니 교룡(蛟龍)이 달아나면서 병이 나았다.

신라의 신문왕이 등창이 나자 혜통에게 치료해주기를 청하였다. 혜통이 와서 주문을 외우자 즉시 나았다. 이에 말하기를 “폐하가 예전에 재상의 몸으로 신충(信忠)을 잘못 판결하여 종으로 삼아서 신충이 원한을 가지고 윤회하여 보복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등창도 또한 신충의 탈이오니 마땅히 신충을 위해서 가람을 창건하고 그 명복을 빌어서 그것을 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절을 세우고 이름을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라고 했다. 절이 완성되자 공중에서 “왕이 절을 지어 주시어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났으니 원한은 이미 풀렸습니다.”라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 노래를 부른 곳에 절원당(折怨堂)을 지었다.

혜통이 중국에서 법을 배울 때 신라에서 정공이란 자가 사신으로 왔다. 그는 중국에서 신주에 의해 쫓겨난 용이 신라 문잉림(文仍林)으로 와서 인명을 해치고 있음을 알리고 빨리 귀국해 없애달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혜통은 665년 정공과 함께 신라로 돌아와 용을 쫒아 버렸다.

쫓겨난 용은 정공을 원망하여 그 집 앞의 버드나무로 변하였다. 정공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무성한 것을 기뻐하며 매우 사랑하였다. 신문왕이 죽자 산릉(山陵) 가는 길을 손질하는 데 정공의 버드나무가 방해되었다. 유사(有司)가 나무를 베려 하자 정공은 “차라리 내 머리를 베지 이 나무는 베지 못한다”라고 화를 내었다. 유사가 이를 아뢰자 효소왕은 크게 노하여 사구(司寇)에게 “정공이 왕화상의 신술(神術)을 믿고 왕명을 업신여기니 머리를 베어 주살하고 그 집을 묻어 버리라.” 명하였다. 그리고 왕화상이 정공과 친함을 알고 갑병을 시켜 그를 잡아 오게 하였다.

왕망사(王望寺)에 있던 혜통은 갑병이 오는 것을 보고 지붕에 올라가서 사기병과 붉은 먹을 묻힌 붓을 가지고 “내가 하는 것을 보아라.”하고 소리쳤다. 병의 목에 한 획을 긋고 “너희는 각자의 목을 보아라.” 하니 모두 붉은 획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또 소리쳐 말하기를 “만약 병의 목을 자르면 응당 너희 목도 잘릴 것인데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그들이 돌아가 붉은 획이 있는 목을 보이니 왕이 말하기를 “화상의 신통력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하고 그를 내버려 두었다.

그 후 왕녀의 병을 치료하게 되면서 정공이 독룡(毒龍)의 음해로 형벌을 받았음을 아뢰자 왕은 정공의 처자를 면죄하고 혜통을 국사로 삼았다.

김경집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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