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승이 늘어나 교단이 세속화되어 가자 선리참구원은 청정 수행기풍을 진작시키고자 1941년 2월 26일부터 10일간 유교법회를 개최했다. 유교법회 당시 모습. 불교저널 자료사진.
대처승이 늘어나 교단이 세속화되어 가자 선리참구원은 청정 수행기풍을 진작시키고자 1941년 2월 26일부터 10일간 유교법회를 개최했다. 유교법회 당시 모습. 불교저널 자료사진.

3.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의 각종 활동

선학원은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나서 여러 가지 구호사업과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11월 12일 부인선우회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간부였던 우봉운(禹鳳雲)이 재만동포 구호사업을 발의하였다. 우봉운은 1922년 창립된 조선불교여자청년회 회장을 지낸 인물이었으며, 당시 이 회에서는 매월 강연회, 토론회, 부인강좌 등을 실시하여 여성계몽운동을 실시하고 있었다.10) 이 날 부인선우회 주최로 열린 정기총회에서 재만동포 구제를 위하여 현금 7원 정도와 의복 80여 점을 수집하여 재만동포 구제회에 송치하였다.11)

또한 같은 해 11월 15일 경북 영천 은해사 금락선원 이동광(李東光) 씨 발기와 원주(院主) 인허(印虛) 화상의 주선으로 선객 및 구라동(九羅洞) 일반 신도에게 위호금(慰護金)을 수집하여 1931년 11월 16일에 조선일보 대구지국을 경유하여 재만조난동포(在滿遭難同胞)에게 송부하였다.12)

선리참구원은 1941년 2월 26일부터 10일간 유교법회(遺敎法會)를 개최하였다. 이 법회는 대처승들이 늘어남으로써 교단이 세속화되고, 타락해 가는 상황에서 비구승들이 청정한 수행 기풍을 진작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개최되었다. 유교법회는 원래 ‘고승법회(高僧法會)’라고 하기로 하였으나 재단법인 조선불교교무원 측에서 법회의 명칭을 맹렬히 비난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13) 교무원 측이 비난한 까닭은 그 법회의 명칭이 자신들을 제외한 상황에서 ‘고승법회’라는 표현을 썼다는 데 대한 강한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법회는 송만공, 박한영, 하동산 등 당시의 고승들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끝났다. 유교법회 이후 계속해서 비구들은 범행단(梵行壇)14)을 조직하여 선학과 계율을 선양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15)

선리참구원의 선맥(禪脈) 계승운동은 1942년에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라고 불리는 경허(鏡虛) 스님16)의 문집인 《경허집(鏡虛集)》 발간으로 이어졌다.

1936년 6월에 오성월, 송만공, 장석상, 방한암, 한용운, 강도봉 등 40명의 비구승들은 《경허집》 간행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전국의 선원에 5원 이상, 개인은 50전 이상의 모금을 통하여 1942년 6월에 《경허집》을 발간하였다.17) 식민지 시기 말기에 《경허집》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선리참구원이 선풍의 진작을 통하여 전통 불교의 맥을 계승하고자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경허집》은 전국 선원이 동참하여 발간되었다. ‘발간 취지서’에서 조선의 수좌로서 경허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함으로써 근대 선(禪)의 부흥이 경허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혔다.18)

선학원은 불교계에 대처승들이 늘어나서 전통 불교의 선맥이 단절될 위기를 맞았을 때 항일 의식이 강하였던 비구 선승이 중심이 되어 건설된 사찰이다. 이 사찰의 건립에 한국 전통 불교의 부흥이라는 불교계 시대정신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불교계의 시대정신을 구현하려고 하였던 비구승들의 염원은 식민지라는 조건하에서 제대로 꽃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는 일본 불교의 풍습을 습득한 승려들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비구 선승들은 선우공제회라는 자치 조직을 만들었고, 이 자치 조직을 기반으로 하여 활로를 모색하였지만 재정 부족이라는 한계에 부딪혀서 침체기를 맞게 된다.

선학원은 1931년 적음이라는 한의학과 침술에 능한 비구 선승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침체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중흥을 이루게 되고, 이후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이라는 조직으로 변모한다.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은 전국적으로 선원을 증설하고 비구선승들이 안정적으로 수행에 매진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진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여성 수행자들의 동참으로 이어져 부인선우회가 조직되었다. 부인선우회 조직으로 종래 기복 중심의 불교 신앙이 참선이라는 정법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선원》이라는 기관지 발간을 통해 선승들에게 이들의 존재가 공유되었다. 여성 불자들의 저변 확대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선리참구원은 적음이라는 중흥조의 노력으로 재정적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안정을 기반으로 중흥의 계기를 맞은 선리참구원은 일제 강점기 선종이라는 종단을 창종함으로써 조선 불교계의 정통성을 천명함하여 식민지 불교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주] -----

10) 김광식(1998),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창립과 변천>, 《한국근대불교의 현실인식》, 민족사, 19~21쪽.

11) 선학원(1932), <禪學院日記要抄>, 《선원》 제2호, 85쪽.

12) 위의 <禪學院日記要抄>, 87쪽.

13) 정광호 편(1999), 《韓國佛敎最近百年史編年》, 인하대학교출판부, 295~296쪽.

14) 梵行이란 범어 brahma-carya의 번역으로 淨行이라고도 번역하며 청정한 행위를 말한다. 범행단이란 청정한 무리, 곧 비구승을 말한다.

15) <梵行壇組織>, 《불교시보》 제69호, 1941. 4. 15.

16) 본명은 宋東旭(1846~1912)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9살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경기도 廣州의 淸溪寺에 입산하였다. 桂虛 화상을 스승으로 출가하였다. 이후 23세에 동학사에서 開講하여 敎義를 논하였다. 乙卯年(1879) 동학사에서 깨달음을 얻고 거처를 서산 天藏庵으로 옮겼다. 이후 20여 년간 開心寺와 浮石寺 등지를 왕래하면서 선풍을 크게 떨쳤다. 경허는 조선말기 불교가 禪敎의 뚜렷한 구별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선과 교와 염불이 함께 행해지던 三門修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때 경허는 선을 중심으로 교를 원융하는 입장을 취했다. 1912년 함북 갑산의 웅이방 도하동에서 입적하였다. 문하에 滿空 月面, 慧月 慧明, 水月 音觀, 漢岩 重遠 등이 배출되었다(金敬執(1997), <鏡虛의 禪敎觀 硏究>, 韓國思想史學》 제9집).

17) 鏡虛 著, 釋明正 譯註(1991), 《鏡虛集》, 通度寺 極樂禪院.

18) 최병헌(1999), <近代 禪宗의 復興과 鏡虛의 歷史的 位置>, 《덕숭선학》 제1집, 불교선학연구원, 64쪽.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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