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측의 유식학을 계승한 청구사문 태현 스님이 주석했던 경주 남산 용장사지의 마애여래좌상과 석조여래좌상. 사진 제공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누리집.
원측의 유식학을 계승한 청구사문 태현 스님이 주석했던 경주 남산 용장사지의 마애여래좌상과 석조여래좌상. 사진 제공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누리집.

1. 신라 불교학의 우수성

신라의 불교학은 왕실과 수행자들의 노력으로 초기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수행자들은 인도와 중국으로 가서 부족한 서적을 수집하고 교학 연구를 하였다. 그런 노력의 결과 삼국시대부터 화엄, 법화, 열반 등 대승 교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통일 이후에도 불교학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전쟁의 어려움이 끝난 뒤여서 국가적 지원과 연구에 대한 열의가 높아졌다. 불교계 안에서도 훌륭한 고승들이 끊이지 않고 배출되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불교를 수용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연구를 통해 독자적인 이론과 저술을 남겼다. 내용이 우수하여 중국 고승의 찬탄을 받기도 하였다.

신라는 인도, 중국불교와 다른 자신들의 정서에 맞는 불교학의 토착화를 정립하는 데 고심하였다. 통일신라의 불교학을 발전시킨 고승을 꼽는다면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공헌한 원효(元曉), 신문왕 때 국사를 지낸 경흥(憬興), 그리고 경덕왕 때의 고승인 태현(太賢)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한국불교 안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3대 저술가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현재 그들이 집필한 저서 가운데 일부만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서명만으로도 불교학의 모든 분야가 연구되었고, 중국의 불교학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역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효는 진평왕 39년(617) 압량군 불지촌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서당(誓幢)이었다. 출가 후 국내 연구에 만족하지 않고 중국 구법을 희망하였다. 34세 때 의상과 함께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러나 고구려 변방에서 순라군에게 붙잡혀 되돌아왔다. 그 후 백제가 멸망하자 의상과 함께 완산주에 있는 보덕 화상에게 불교를 배운 후 뱃길로 구법의 길을 나섰다가 오래된 무덤에서 진리를 깨달았다.

중국 유학의 필요성이 사라져 신라로 되돌아온 그는 저술과 강학에 전념하여 한국불교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수행자가 되었다. 불교학 전반에 걸쳐 연구서를 집필하였다. 그의 저서는 경전의 중요한 내용을 정리한다는 의미로써 종요(宗要)라는 표현을 썼다. 이런 원효의 불교학 연구를 당나라 고승들은 해동소(海東疎)라고 부르며 존중하였다. 《금강삼매경소》는 당나라 승려에 의해 이것은 보살의 경지에서만 나올 수 있는 저술이므로 당연히 논서의 명칭을 붙여야 한다고 해서 《금강삼매경론》으로 불리게 되었다. 신라 불교학의 우수한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경흥은 성이 수씨(水氏)이며 웅천주(熊川州) 사람이었다. 나이 18세에 출가하여 삼장에 통달하여 명망이 높았다. 문무왕이 승하하려고 할 때 신문왕에게 유언을 남기기를 “경흥 법사는 국사가 될 만하니 짐의 명을 잊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신문왕이 즉위하자 국로로 책봉하고 삼랑사(三郎寺)에 살게 하였다.

그는 《법화경》을 비롯하여 《열반경》, 《반야경》, 《무량수경》, 《미륵경》, 그리고 《금광명경》 등 많은 경전의 주석서를 집필하였다. 많은 저술에도 불구하고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무량수경연의술문찬》 3권과 《삼미륵경소》 1권뿐이다.

태현은 경덕왕 때 고승이었다. 스스로 청구사문(靑丘沙門)이라 하였다.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쳤던 원측의 제자 도증(道證)이 귀국하자 그에게 법을 배웠다. 교학 연구에 투철하였던 그는 다방면으로 학식이 뛰어났다. 특히 원측에서 이어지는 유식학을 계승해서 유가조(瑜伽祖)라고 불렸다. 태현은 신통력도 뛰어났다. 경덕왕 때 크게 가뭄이 들자 태현을 불러 《금광경(金光經)》을 강론하여 비가 내리도록 하였다. 재를 지내는데 정수(淨水)가 늦어지자 감리(監吏)가 공양하는 사람을 꾸짖었다. 공양하는 사람이 말하였다. “궁궐의 우물이 말라서 먼 곳에서 길어왔기 때문에 늦어졌습니다.” 태현이 말하였다. “어찌 일찍 말하지 않았는가?” 낮에 강론하자 우물의 물이 솟아 나왔다. 궁에 모인 많은 사람이 놀랐고 그 우물을 금광정(金光井)이라 이름하였다.

그의 저서는 중국 승려들까지 참고할 정도로 안목이 깊었다. 《화엄경》, 《법화경》, 《반야경》 등 대승 경전을 연구한 가운데 유식학의 대가답게 그와 관련된 저술이 많았다. 자신의 저술을 고적기(古迹記)라 표현하여 자신의 주장보다 옛사람의 주장을 적는다고 겸손하게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통일신라시대 3대 저술가의 학문적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업적이 중국 유학을 하지 않고 국내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자료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한 수행자들의 노력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업적이기 때문에 그 의의가 더욱 크다.

이외에도 통일신라시대 불교학 발전에 기여한 분으로 의적(義寂), 도륜(道倫), 연기(緣起), 그리고 대연(大衍) 등이 있었다. 모두 불교학 연구에 전념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저술 활동은 통일신라 불교학 발전에 기여하면서 신라의 불교사상을 더욱 심오하게 하였다.

2. 신라의 교단 체계와 승직

통일신라시대 불교학이 발전하면서 교단 역시 번성하였다. 확대된 교단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승직(僧職)이 설치되었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북조의 영향을 받아 국통(國統)과 도유나(都唯那) 등이 있었다. 백제는 남조의 영향을 받아 승정(僧正)과 승도제(僧都制)를 채택하였다. 고구려불교를 받아들인 신라는 자연스럽게 북조와 고구려에 있는 승직을 두었다.

진흥왕 12년(551) 고구려에서 온 혜량(惠亮) 법사를 국통에 임명한 것이 승직의 시작이었다. 그 후 선덕여왕 때 자장 법사가 대국통에 임명되는 것으로 보아 승직은 지속적으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국통과 대국통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승단의 최고 통솔자였다. 승단의 모든 기강과 규범을 세우고 교단의 모든 일을 주관하였다. 국통을 보좌하여 승단을 기강을 세운 승직은 대도유나(大都唯那)였다. 이것은 북조의 승직인 도유나를 들여와 대(大)를 붙인 것이다. 대도유나에 최초로 임명된 것은 보량(寶良) 법사였다. 처음에는 1인을 두었으나 진덕여왕 원년(647) 1인을 추가하여 2인이 되었다. 국통을 보좌한 승직 가운데 신라에만 있었던 것이 도유나랑(都唯那娘)이었다. 아니(阿尼)로 도유나랑을 삼은 것으로 볼 때 비구니를 통솔하던 승직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승직 이외에 승려가 직접 국정에 참여하던 승관(僧官)으로 대서성(大書省)이 있었다. 진흥왕 11년(550) 안장(安藏) 법사가 맡았다. 처음에는 1인이 임명되었으나 진덕여왕 이후에는 2인이 임명되었다. 이런 대서성이 어떤 일을 하였는지 자세하게 전해지는 바가 없다. 그렇지만 승려로서 국정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교단 통제보다는 국왕의 통치를 자문하던 위치로 짐작된다.

국통과 대도유나, 그리고 도유나랑과 같은 승직과 대서성과 같은 승관은 통일 이후에 좀 더 조직적이고 세분화 되었다. 국통이나 대국통 이외에도 대통(大統)과 주통(州統) 그리고 군통(郡統)을 두었다. 지방 행적조직의 개편으로 승직 역시 확대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통일 이후 전국을 9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각 주의 교단을 통제하는 승직으로 주통을 두었다. 각주는 군(郡)으로 세분화 되었고 승직으로 군통을 두고 교단을 통제하였다. 주통은 각 1인씩 모두 9인이 임명되었다. 군통은 18인을 두었다. 이런 교단 업무를 국통 혼자 총괄하기 어려우므로 국통과 주통, 군통 중간에 둔 승직이 대통이었다.

통일 이후 승관 역시 확대되었다. 대서성에 불과하던 승관이 소서성(小書省)과 정법전(政法典) 또는 정관(政官) 등이 추가되었다. 원성왕 3년(787) 혜영(惠英)과 범여(梵如) 두 법사를 소서성으로 임명하였다. 대서성이 중앙에서 왕의 자문에 임했던 것 같이 지방에서 지방관의 자문에 임했던 승관으로 짐작된다. 정법전 또는 정관은 왕실의 기구로 짐작된다. 정법전의 구성원으로 대사(大舍) 1인, 사(史) 2인을 두고 일이 있을 때마다 임명되었다. 연한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상설직은 아니고 임시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승직과 승관 이외에 신라불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에 사성전(寺成典)을 두었다. 선덕여왕이 세운 영묘사(靈廟寺), 문무왕이 창건한 사천왕사(四天王寺) 등에 사성전을 두고 관리하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 사성전이 설치된 사찰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호국사찰임을 알 수 있다.

사성전에는 금하신(衿荷臣) 1인, 상당(上堂) 1인, 적위(赤位) 1인, 청위(靑位) 2인, 성(省) 1인 그리고 사(史) 2인의 관원을 임명하였다. 모든 사찰이 똑같지 않고 사찰 규모에 따라 다소 달랐다. 파견된 사람들이 관원인 것으로 보아 왕실에서 사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관리 차원에서 파견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밖에 아니전(阿尼典), 원당전(願堂典), 승방전(僧房典) 등이 있었다. 이런 명칭으로 보아 비구니 사찰과 왕실이 세운 원찰, 그리고 일반 대중 승려들이 머무는 사찰을 관리하던 부서로 짐작된다.

김경집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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