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201호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동쪽 면 아래 부분에 새겨져 있는 승려상입니다. 향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하고, 목탁을 치는 모습이라고도 합니다. 동쪽 면에 마애삼존불이 조성돼 있으니 불보살님께 향을 공양한다 해도, 목탁을 두드리며 예경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삼존불을 조성하면서 지극한 마음을 담아 공양하고 예
대규모 가축 살처분은 육식문화가 가져온 폐혜 중 하나다. 육류 소비가 많아지면서 좁은 곳에서 수많은 가축을 기르는 공장식 축산이 성행하고, 치명적 가축전염병이 발생하면 대규모 살처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불살생의 원어는 ‘아힘사(Ahimsa)’다. 죽이거나 해치는 것 뿐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생명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는 평화의 정신을 의미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제석천의 궁전에 걸려 있는 인드라망의 그물코처럼 서로 관계 맺고 의지하는 존재이다. 모든 존재의 고귀함을 알고 생명, 나아가 평화를 지키려는 불살생(아힘사)의 정신을 돌아볼 때이다.
중앙선원이 있는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1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정면에 해강 김규진이 쓴 ‘선학원’ 편액과 함께 ‘중앙선원’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선학원’ 편액과 달리 낙관이 없어 누가 쓴 것인지 알기 쉽지 않다.이 편액의 글씨를 쓴 이는 거제도 출신의 서예가 성파 하동주(星坡 河東州, 1868~1943) 선생이다.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 법진 스님의 전언에 따르면 편액 뒷면에 성파가 글씨를 썼다는 명문이 있다고 한다. 선학원 주련도 그의 글씨였다.평생 추사체의 행서를 연구한 성파는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추사체의
늘 순탄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인간의 삶에는 굴곡이 있습니다. 때로는 험한 산을 오를 때처럼 힘에 부칠 때도 있고, 때로는 천 길 낭떠러지를 내려갈 때처럼 위험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범부는 그런 굴곡진 삶을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꼭 가야 할 길이라면 험한 산길과 천 길 낭떠러지라 할지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을 위해 평온한 삶을 잊고 자신을 버린 이들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과 자주 종단 건설을 위해 고행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스님 같은 분이 대표적이지요.이번 순례길은 만해 스님의 자취가 남아있는 재단법인 선학원 중앙선원을 들머리로 잡았습니다.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 옆 골목을 따라 200m쯤 올라오면 왼편으로 2층짜리 한옥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재단법인 선학원 중앙선원과 사무처가 있는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선학원백주년기념관)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석존의 포로가 된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의 의미에 집중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한다. 불이의 세계관을 조형적으로 보여주면 불자들이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신앙심이 단단해진다고 믿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가 겪는 세대 간, 진영 간의 극단적인 갈등과 이념적 대립 현상으로 받은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는 데 불교의 불이사상이 대안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렇듯 육문 스님은 공약을 통해 조계종단과 선학원 간 문제에 개입하겠다고 공언했고, 본각 스님은 “비구니들이 힘들어하고 있으니 종단과 선학원과 비구니회가 처음부터 다시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두 스님은 조계종단과 선학원 간 문제에 뛰어들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그런데, 과거를 보면 미래를 아는 법이다. 여태까지 비구니회의 과거를 돌아보면 종단 권승들에게 장악되어 꼭두각시 노릇을 해왔다. 그랬던 비구니회 회장이 과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대한민국의 법원은 이미 조계종이 선학원 문제에 간여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조계종 구성원이라면 어느 누구도 이러한 판결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우리 재단의 입장을 밝혔다. 조계종과 선학원 간 갈등은 조계종이 을 제정해 선학원을 장악하려 한 데서 시작됐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천명하거니와 조계종단과 선학원 간 갈등 해결은 의 폐지가 시발점이 될 것이다.
아직 마을은 잠들어 있는 새벽 시간, 작은 창가에 마지막 장맛비가 내린다. 방수팩에 카메라를 넣고 우비를 갖추어 입고 산행에 나선다. 지난밤의 뜨거운 열기와 비가 만나니 그야말로 한증막 같다. 그래도 비가 온다는 것에 충분히 만족해하며 늘 그래왔던 대로 숲속의 벗들을 만나러 발걸음을 재촉한다. 산책로에 다다르자 산으로부터 많은 양의 빗물이 흘러 내려왔다.황
매번 느꼈지만 점심을 먹고 출발할 때면 처음 30분 정도는 정말 힘든 기분이 들었습니다. 배낭은 더 무겁게 여겨지고, 무릎도 갑자기 아픈 것 같고, 무엇보다 나쁜 것은 에너지가 하나도 없는 기분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걷다보면 언제 그런 기분을 느꼈나 싶게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마음은 참 종잡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겁다고
심청전에 보면 효녀 심청이가 아버지의 시력을 찾아주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을 절에 시주하고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 하지만 심봉사는 눈도 뜨지 못하고 심청이를 잃은 슬픔과 여전히 맹인을 벗어나지 못한 신세, 게다가 뺑덕어멈의 학대로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그런데 이야기 끝에 가면, 심청은 용왕을 만나서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와 임금님의 부인이 되고, 이를 통해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는 마조의 법을 이은 선사다. 그를 다루는 글이나 강의에서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구절이 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굶는다.’는 말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라는 성경의 구절과 겹쳐지면서 노동자부터 자본가에 이르기까지
이제 선선한 바람이 아침 저녁으로 분다.하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낮엔 다니기 힘들 정도로 더웠다.이렇게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철에 대비해서 염분이 많은 음식으로 건강을 지키려고 사찰이나 속가에서는 장아찌류를 많이 챙겨 먹었다.장아찌는 염분을 보충하려는 이유보다는 제철에 먹을 수 없는 나물이나 나무의 어린순을 간장이나 소금에 염장했다가 먹는 음식으로, 예부
삶은 예측할 수 없다.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남에게 베풀면서 착하게, 양심적으로 산다고 재난이 비켜가지 않는다. 그러니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기보다 일어났을 때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시 삶을 이어가는 지혜가 필요하다.나에겐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남겨진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두 영화를 골라봤다.대지진 (펑샤오
영월에 가면 단종이 묻힌 장릉이 있습니다. 보덕사는 장릉을 지키는 수호사찰이고 명복을 비는 원찰입니다. 지금도 사찰 내에 단종어각이 있지요.보덕사의 중심 법당이 극락보전입니다. 극락보전 천정 빗반자엔 15점의 비천벽화가 현존합니다.사진은 그 중의 두 점의 비천도입니다. 한 분은 대금 젓대를 불고, 또 한 분은 타악기 운라를 치고 있습니다.불교에서 음악과 무
범패소리와 작법무가 조화로운 영산재는 1973년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범패’로 지정되었다. 1987년에는 범패, 장엄, 작법무 등으로 세분화되어 ‘영산재(靈山齋)’로 개칭되면서 다시 지정된, 불교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재이다. 2009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인들에게 한국불교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전령사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전을 읽는다고 해서 한 번에 그 뜻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한 권의 책을 백 번 읽으면 뜻이 통한다〔讀書百篇義自通〕”는 말처럼 뜻을 깨우칠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며 숙독완미(熟讀玩味)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숙독’은 글의 뜻을 잘 생각하면서 차분하게 하나하나 읽는 것이고, ‘완미’는 뜻을 잘 생각하여 음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숙독완미’는 곧 익숙하도록 읽어 뜻을 깊이 음미하는 것이다.‘간경자 혜안통투(看經者 慧眼通透)’라는 말이 있다. ‘부처님의 경전을 읽는 이들 모두가 지혜의 눈이 밝아지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다. 이 가을 불자 여러분도 부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지혜의 눈이 활짝 열리기를 기원한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추사체를 완성한 서화가이자 조선 금석학을 정립한 학자로 유명하다.판전 편액은 서울 봉은사 장경판전에 걸려 있는 것으로 추사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편액을 쓸 당시 추사는 과천의 별서(별장)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봉은사를 오가며 소일했다. 추사는 봉은사에서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鈔)》 80권 등 목판을 조성하던 남호 영기(南湖 永奇, 1820~1872) 스님의 부탁을 받고 이 편액을 썼다.판전 편액의 글씨는 고졸하면서도 무심한 경지를 보여주는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세간에서는
▲ 법주사 진입로 옆 숲길. ▲ 세조길. ▲ 눈썹바위. ▲ 세조길. ▲ 저수지에서 바라본 수정봉. ▲ 세조길. ▲ 세조길 계곡. ▲ 세조가 목욕한 뒤 피부병이 나았다는 목욕소. ▲ 신미 스님 주석처 복천암. 세조는 이 곳에 거둥해 3일간 기도했다. ▲ 신미 스님 주석처 복천암. 세조는 이 곳에 거둥해 3일간 기도했다. ▲ 신미 스님 사리탑인 수암화상탑(앞)
절대 권력을 가진 이의 삶이라고 해서 늘 영화로운 것은 아닙니다. 권력이란 움켜쥘수록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물과 같아서 지키는 것도, 바르게 사용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향해 겨눈 경쟁자의 칼끝을 늘 걱정해야 하고,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신경 써야 합니다. 평화적으로 권력을 쥔 이의 삶도 그러한데, 피를 묻혀가며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오른 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조선 제7대 임금 세조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세조는 조선왕조에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첫 임금이자, 반정으로 보위에 오른 첫 임금입니다. 세조는 즉위 과정에서 상왕이자 조카인 단종을 사사하였고,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혔습니다. 권력이 아무리 영화로운들 스스로 짊어진 업보는 쉽게 벗을 수 없습니다. 점점 삶을 조여 오는 올무였을 것입니다.
정윤영의 전시회 〈겹의 언어〉가 지난 8월 21일부터 27일까지 삼청동의 갤러리 도스에서 열렸다.자신의 그림에서 식물에 인간의 몸을 투영하려는 콘셉트를 잡았다. 그것을 표현하려면 순수회화가 맞는 것 같아 그림의 스타일을 바꾸어 보았다.이런 희망과 계획이 살고자 하는 마음을 들게 하고 회복에 도움을 준 것은 당연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로 비단 바탕에 먹, 분채, 석채, 봉채, 아크릴, 수채, 금분 등의 재료를 쓴다. 한 겹을 그리고 말리면서 다른 한 겹을 그리는 식으로 세 겹, 또는 네 겹까지 작업한 다음 포개어 배접한다.
687. 세간에 있는 모든 경전과 논서를 능히 통달하면, 이러한 인연으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때 부처님의 지혜를 얻게 되어 더함도, 멸함도 없게 된다. 이 같은 지혜를 무애지(無碍智)1)라고 한다. - 《대집경(大集經)》688.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法寶〕을 널리 듣고 싫어하지 않으면, 지혜가 한이 없게 된다. - 《보요경(普曜經)》689. 만약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