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단법인 선학원 중앙선원이 자리하고 있는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1층 전시실. 근대불교의 역사와 불교계 독립운동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늘 순탄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인간의 삶에는 굴곡이 있습니다. 때로는 험한 산을 오를 때처럼 힘에 부칠 때도 있고, 때로는 천 길 낭떠러지를 내려갈 때처럼 위험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범부는 그런 굴곡진 삶을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꼭 가야 할 길이라면 험한 산길과 천 길 낭떠러지라 할지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을 위해 평온한 삶을 잊고 자신을 버린 이들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과 자주 종단 건설을 위해 고행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스님 같은 분이 대표적이지요.

이번 순례길은 만해 스님의 자취가 남아있는 재단법인 선학원 중앙선원을 들머리로 잡았습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 옆 골목을 따라 200m쯤 올라오면 왼편으로 2층짜리 한옥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재단법인 선학원 중앙선원과 사무처가 있는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선학원백주년기념관)입니다.

불교계 항일운동의 중심지 ‘중앙선원’

재단법인 선학원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만해 스님이 출옥을 앞두자 스님을 중심으로 친일 성향의 사판계(事判系)에 대응하기 위해 남전 한규(南泉 翰奎, 1868~1936), 도봉 본연(道峯 本然, 1873~1949), 석두 보택(石頭 寶澤, 1882~1954) 세 스님이 주도해 설립한 이판계(理判系)의 수도원입니다.

재단법인 선학원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중앙선원은 1921년 8월 10일 기공해 3개월여 만인 11월 30일 완공됐습니다. 그해 12월 20일 경성감옥을 출옥한 만해 스님은 1931년까지 10여 년간 중앙선원에 머물며 민립대학 건립운동, 6·10만세운동, 신간회 운동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1930년에는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불교계 비밀결사 만당의 당수로 추대됐으며,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전환해 일제에 맞서는 등 불교계의 항일과 독립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중앙선원은 이렇듯 민족 독립운동, 불교 혁신운동, 교육·계몽운동, 문학 활동 등 만해 스님의 삶과 자취가 서려 있는 곳입니다.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1층 전시실에서는 만해 스님의 삶과 업적, 선학원의 설립 배경과 과정, 설립 이후 선학원이 민족불교와 정화불교의 산실로 한국불교사 속에 자리매김까지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전시실에서 만해 스님의 자취를 더듬은 순례자는 발걸음을 돌립니다. 다음 행선지는 만해 스님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尋牛莊)입니다.

▲ 한양도성을 따라 낮은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앉은 성북구 북정마을.

514년 간 도읍 지킨 한양도성과 북정마을

중앙선원을 나와 가회동 북촌한옥마을을 거쳐 와룡공원길로 접어듭니다. 구불구불 이어진 도로를 따라 1km쯤 올라가면 와룡공원을 품은 한양도성 북악구간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성입니다. 태조 5년(1396) 처음 쌓은 이래 1910년 경술국치를 맞을 때까지 514년 간 한양의 도성으로 자리를 지켰습니다. 현존하는 전 세계 도성 중 가장 오래도록 제 역할을 한 성이라 합니다.

왼쪽으로 난 출입구를 끼고돈 뒤 한양도성을 따라 내려갑니다. 성벽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앉은 낮은 지붕이 눈에 들어옵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는 북정마을입니다. 한양도성 혜화문과 숙정문 사이에 자리한 북정마을은 김광석 시인의 대표작 <성북동 비둘기>의 배경이 된 곳입니다.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과 도시노동자들이 모여 현재 모습을 갖췄다지요. 성벽에 기대서서 내려다보는 마을은 힘들고 가난한 살림살이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혹독한 일제 강점기를 울분을 삼키며 견뎌야 했던 조선 민중의 평균적인 삶은 이보다 더했을 것입니다.

성벽 안으로 통하는 암문 앞에서 북정마을로 들어섭니다. 좁은 골목길을 100m 남짓 걸으면 이내 마을버스가 다니는 포장도로가 나옵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북정마을은 젊은 예술가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으면서 활기를 찾고 있다 합니다. 곳곳에서 담벼락을 치장한 벽화가 순례자를 반깁니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도로를 따라 200m쯤 돌아들면 ‘심우장’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만납니다. 이곳에서 심우장까지는 70m 남짓 골목길을 내려가야 합니다.

▲ 만해 한용운 스님이 말년에 주석하던 심우장.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은 집으로 유명하다. 사적 제550호.

만해 스님이 입적한 곳 ‘심우장’

심우장 터는 원래 선학원 설립 조사 중 한 명인 초부 적음(草夫 寂音, 1900~1961) 스님이 초당(草堂)을 지으려고 마련한 땅입니다.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항일운동과 불교개혁 노력을 멈추지 않은 만해 스님을 선학원에서 지켜본 적음 스님은 만해 스님의 노년의 위해 50여 평 남짓한 땅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여기에 여러 사람의 정성을 더해 100여 평 남짓한 터를 마련할 수 있었다지요.

심우장은 지조의 상징입니다. 만해 스님이 심우장을 지을 때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다며 집이 들어선 방향을 북쪽으로 잡았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만해 스님은 이곳에서 애국지사와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6월 입적했습니다.

문화재청은 “한용운 스님의 독립의지를 엿볼 수 있는 곳”이라며, 지난 4월 심우장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50호로 지정했습니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만해 스님이 서재로 쓰던 오른쪽 방문 위에는 일창 유치웅(一滄 兪致雄, 1901~1998)이 쓴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소를 찾는다’는 뜻의 ‘심우(尋牛)’는 사람의 본성을 소에 빗대 ‘자성을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독립운동과 교육·계몽운동, 불교혁신운동 등 세간의 일에 전념했고, 말년에 결혼해 처자(妻子)까지 두었지만 만해 스님은 출가 수행자로서 본분을 잃지 않았습니다. ‘목부(牧夫)’, ‘실우(失牛)’ 같은 필명을 사용한 것도 그 반증이겠지요? ‘심우장’이라는 당호에서 한결같았던 스님의 심중을 엿봅니다.

심우장을 나와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갑니다. 큰길에 다다르니 두루마리를 손에 쥐고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긴 만해 스님의 동상과 마주합니다. 지난한 투쟁으로 고된 몸과 마음을 편히 쉬지 못했을 만해 스님의 동상을 바라보며 스님이 평생 바라고 일구었던 꿈은 이루어졌을까 생각해봅니다. 조국은 광복이 되었지만 온전히 청산하지 못한 일제의 잔재는 한국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적폐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지켜낸 민족불교의 전통은 혁신을 이루지 못하고 종권 다툼과 부정부패, 서양 중심 현대문명의 급격한 시류 속에서 끊임없이 제자리를 위협받고 있습니다.

만해 스님의 동상과 심우장을 뒤돌아보며 만해 스님이 지금 다시 온다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보이실까 더듬어봅니다. 우매한 대중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만해 스님과 같은 선지식이 더욱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 길상사 극락전. 법정 스님은 길상화 김영한 보살이 기증한 대원각을 송광사 서울 분원으로 등록하고 불자와 시민의 수행·기도도량으로 탈바꿈 시켰다.

욕망의 바다에 피어난 연꽃 ‘길상사’

만해 스님 동상을 뒤로하고 ‘우정의 공원’과 외교관 사택단지 사이로 난 오르막길을 500m 가량 오릅니다. 다시 대사관로를 따라 700m쯤 걸어가면 길상사입니다.

길상사는 원래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큰 요정이었습니다. 권력자와 정치인, 부유한 이들이 즐겨 찾던 이곳에서는 온갖 권모술수와 뒷거래, 욕망의 바다가 펼쳐졌을 터입니다. 그런데 책 한 권이 아수라계와 같은 이곳을 청정도량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은 대원각의 주인 길상화(吉祥華) 김영한 보살이 대지 7000여 평과 건물 40여 동 등 부동산 일체를 법정 스님에게 기증한 것이지요. 몇 차례 고사하던 법정 스님도 길상화 보살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대원각은 1997년 송광사 서울 분원으로, 불자와 일반인을 위한 도심 속 수행·기도도량으로 환골탈태합니다.

어찌 보면 대원각은 인간세상에서 가장 악취 나는 곳 중 한 곳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 피어납니다. 온갖 권모술수와 뒷거래, 욕망이 횡행하던 대원각은 주인인 길상화 보살이 뿌린 작은 씨 하나로 ‘맑고 향기로운’ 연꽃이 되어 피어났습니다. 한 생각 돌이키면 예토(穢土)가 정토가 되듯, 더러움과 깨끗함은 하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권모술수와 뒷거래, 욕망의 온상이었던 곳이 대중의 청정한 수행도량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삶이 힘들고 고달파도 눈길은 늘 높은 곳에 두어야 함을 새삼 느낍니다.

복천암 옛터에 중창한 염불도량 ‘정법사’

길상사를 나와 마지막 순례지인 정법사로 향합니다. 길상사에서 500m 가량 비탈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정법사는 해남 대흥사 13대 종사 중 제10세 종사로 이름을 떨친 호암 체정(虎巖 體淨, 1687~1748) 스님이 창건한 절입니다. 원래 이름은 복천암이었지요. 한동안 폐사되었다가 석산 스님이 종로구 가회동에 있던 건봉사 포교당을 1960년 복전암 옛터로 이전·중창하면서 다시 법등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절을 중창한 지봉당 석산(智峰堂 石山, 1919~2015) 스님은 관준 - 만화 - 응화 - 대련 - 보광 스님으로 이어지는 만일염불회의 맥을 이은 마지막 어산장입니다. 1937년 건봉사에서 사미계를, 1965년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습니다. 스님은 1960년 정법사를 중창한 이후 2015년 3월 15일 입적할 때까지 단 하루도 염불과 기도 수행을 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법사 무설전 옆 정자에 올라 서울 도심을 바라봅니다. 준공 당시 세계 다섯 번째로 높았다는 롯데월드타워가 눈에 들어옵니다. 인간의 욕망은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마천루처럼 끝 모릅니다. 욕망은 번뇌를 불러일으키고, 사람을 노예로 만듭니다. 산문 밖 나들이를 삼가며 염불과 기도를 쉬지 않은 석산 스님의 삶은, 그래서 번뇌를 끊고 마음을 닦아야 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