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미디어 전략팀장=이혜정 △부산불교방송 방송부장=최상만 △대구불교방송=사업부장 박치민 △춘천불교방송=방송부장 이석종.이상 4월 1일자.
승진 △금장생활관장=성채용 △교원인사실장=권현철 △시설관리팀장=심규택 △입학관리실장=손세호전보 △진단준비팀장=임종민 △교무팀장=구경덕 △취업지원센터장 겸 현장실습지원센터장 겸 대학일자리사업팀장 겸 진로취업컨설팅팀장=권영섭 △대외협력실장=박치만 △산학협력팀장=이상득 △불교문화대학원·불교문화대학 학사운영실장=임명수 △사회과학대학원·인문대학·사회대학 학사운영실장=최현익 △한의과대학 학사운영실장=이원재.이상 4월 1일자.
중국과 함께 초기에 코로나19 사태를 겪은 우리나라는 세계가 호평하는 방역 대응으로 확산이 주춤해졌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우려스러운 것은 집단감염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종교단체가 방역에 비협조적이라는 점은 실망스럽다. 폭발적 집단감염의 진원지였던 ‘신천지’는 사태 초기 방역에 협조하지 않았고, 일부 개신교
29개 불교종단이 가입돼 있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가 3월 18일 기자회견을 열어 봉축법요식, 연등회 등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윤4월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이날 발표에 따라 봉축법요식은 윤 4월 8일인 5월 30일에, 연등회는 한 주 전인 5월 23일 열리게 됐다. 재단법인 선학원도 전국 분원에 공문을 보내 한국불교종단협의회와 발을 맞추었다. 이번 결정은 불교
신원식 중도기획 대표의 모친 설연순 여사가 3월 14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빈소는 순창군의료원 장례식장(전북 순창군 순창읍 교성로 135)에 마련됐다. 3월 16일 발인하며, 장지는 순창 선영이다.전화. 063)650-5444
이중표 전남대 명예교수의 모친 김종순 여사가 2월 1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빈소는 천지장례식장(광주광역시 서구 풍서좌로 173-1) 특실 502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16일 오전 9시이며, 장지는 화순 선영이다.
대법원이 최근 태고종으로 소속 종단을 바꾼 군법사를 전역하도록 한 국방부의 처분이 법규를 위반하거나 재량권을 일탈·남용한 것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군 인사법상 현역 복무 부적합 여부 판단은 군 당국의 재량이고, 군 특상 명백한 법규 위반이 아니라면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다.대법원 재판은 법률심이다. 2심이 법리를 제대로 해석했는지를 판단한다. 그럼에도 법리와 별개로 재판부가 “조계종 외 다른 종단도 관련 법령상 요건을 충족하면 군종 분야 병적 편입 대상 종교로 선정될 수 있도록 군종장교 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힌 부분을 주목한다.국가인권위도 2018년 12월 최근 선발요건을 갖춘 종단을 배제한 채 조계종만 군종법사를 파송하는 것은 ‘평등권 침해’라며 개선을 권고했다.그동안 천태종과 진각종은 군법사를 파송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불법(佛法)을 전하는 일이 조계종만의 일은 아니다. 종단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이번 판결이 군종법사 파송 제도가 개선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이 1월 15일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조계종 적폐 청산’을 요구했던 스님들을 대화합 차원에서 포용하겠다고 밝혔다. 종정 진제 스님이 ‘종단 대화합 조치’를 당부한 것에 대한 화답이다. 그러나 자승 전 총무원장의 감로수 비리 의혹을 제기한 노조원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총무부장 금곡 스님은 ‘혐의 없음’ 처분이 나왔고, 노조 징계 조치 가처분도 기각됐다며, “왜 고발했는지 국민과 종도에게 설명이 필요하다. 진정한 참회와 설명을 해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한다.해종 행위자로 매도당했던 출가자는 품겠다면서 노조원은 품지 못하겠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노조원들은 종단의 명예와 위신, 이익을 위해 자승 전 총무원장을 고발했다. 더구나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기존 입장을 고수한다면 자비종단의 모습이 아니다. 조계종은 노조원도 대승적 자세로 잘 품길 바란다.
불교환경연대가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불교기후행동 조직화에 나섰다고 한다.불교환경연대는 지난 23일 사찰과 불교단체 앞으로 공문을 보내, 생명의 관점에서 기후 위기에 처해 있는 지구를 살리는 노력에 함께 해달라고 요청했다.불교환경연대가 불교기후행동 조직화에 나선 것은 시의적절하고 환영할 일이다. 불교는 가장 친환경적인 종교이다. 자연과 생명이 제석천 궁전에 걸린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가장 친환경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불교계가 환경문제에 보여준 문제의식과 실천력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몇몇 단체가 열심히 활동하고는 있지만, 풀뿌리처럼 불자들 의식을 개선하고 조직을 갖추어 실천력을 담보해내는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다.새롭게 출범할 불교기후행동은 불교사상에 바탕해 기후 위기를 극복할 대응책을 제시하고, 불교계는 물론 시민 참여와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사회 변혁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
성의신 마하연실내악단 단장의 모친 황옥순 여사가 1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서울시 동작구 중앙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월 31일 낮 12시이다. 장지는 서울 추모공원이다.문의. 02)860-3500 (장례식장)
하남 위례 신도시에 설치된 천막법당인 상월선원(霜月禪院)이 불법 건축과 산림 훼손 문제로 물의를 빚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 설치된 천막법당은 물론 종무소와 숙소, 행사장 등으로 쓰이는 컨테이너 박스와 패널 건물, 동안거 장소로 쓰이는 비닐하우스까지 불법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상월선원은 불상을 조성해 모시면서 잘 보이게 한다며 아름드리
불교정화운동에 필요한 제반 비용을 선학원이 댔음을 보여주는 문서가 12월 24일 공개됐다. 재단법인 선학원이 공개한 이 문서는 1973년 9월 1일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인 경산 스님 앞으로 보낸 ‘선학원 기본재산 환원에 대한 건’이란 제목의 공문이다.이 공문은 1957년 인천 만석동 토지 3500평과 서울 서대문구 행촌포교당 토지 66
조계종이 선학원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행태는 흡사 덩치 큰 아들이 어머니에게 재산을 다 내놓고 죽은 듯이 빌붙어 살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민족불교의 전통을 지켜온 선학원은 광복 이후 왜색불교 청산과 불교정화에 힘썼다. 선학원은 재단 재산까지 처분해 가며 정화자금을 제공하는 등 불교정화를 주도했다. 그 덕에 지금의 조계종이 탄생하게 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도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국불교 정통성 운운’하며 조계종의 모태인 선학원을 예속시킬 궁리만 한다면, 끊임없는 갈등과 분란만 초래할 뿐이다. 조계종은 지금까지 저지른 과오를 참회하고, 2002년 합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경봉, 석주 스님과 설립 조사 중 한 분인 적음 스님은 한결같이 “3·1운동으로 옥에 갇힌 이판계의 수장인 만해 스님이 출옥하게 되자 만해 스님을 중심으로 사판계에 대응하기 위해 이판계의 수도원으로 선학원을 창립했다”고 증언했다. 이 사실은 1953년 재단법인 선학원이 범어사를 상대로 벌인 ‘부동산 소유권리 이전등기 절차 이행 청구’ 소송의 1~3심 판결문을 통해 명확히 확인된다. 한국불교 근·현대사의 큰 어른인 경봉, 석주, 적음 스님의 증언은 만해 스님이 일제 강점기 선학원 대중의 구심점이었으며, 정신적 지주였고, 선학원 설립의 계기를 마련한 분이었음을 명확히 해 준다. 그런 스님의 선양사업을 재단이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해야 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만해 스님 선양사업은 재단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은 외면한 채 선학원 설립을 논의하는 과정과 상량문에 만해 스님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만해 스님을 설립조사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단정하고, 특정 스님을 띄우려 한다면 그것만큼 위험한 역사인식은 없다. 더구나 만해 선양사업을 “선학원이 간월암과 정혜사 소유권을 두고 법적 공방을 벌이면서 의도적으로 수덕사를 중창한 만공 스님을 깎아내리는 동시에 조계종과의 갈등에서 벗어나 사찰을 사유화하기 위한 역사 바꾸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심각한 역사왜곡이고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불교단체들이 조계종에 2013년도 ‘VIP 달력’ 제작과 관련된 자료 공개를 요구했다.이도흠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와 손상훈 교단자정센터 원장, 김영국 한국불자회의추진위 자승적폐청산특위 위원장은 9월 26일 오전 11시 서울시 종로구 템플스테이사업단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9월 24일 조계종 산하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이하 사업단)과 조계종 수익업체인 도반HC가 낸 입장문 내용을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거짓”이라고 반박하고 자료 공개를 요구했다.시민단체의 이날 기자회견은 사업단과 도반HC가 “(시민단체의 주장이) 전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허위의 주장이자 의도적인 자료조작 등 날조된 허위사실”이라고 밝힌 데 따른 대응이다.
자승 전 조계종 총무원장이 또다시 검찰에 고발됐다. 정의평화불교연대, 교단자정센터 등 불교시민단체 대표들이 “국고보조금을 편취하고 사찰에 달력을 판 수익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이 있다”며 자승 전 총무원장과 전 조계종출판사 사장 A씨를 9월 17일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한 것이다. 감로수사업과 관련해 배임 의혹에 고발된 데 이은 2차 고발이다.불교시민사회단체가 자승 전 총무원장 등을 고발하자 의혹에 관련된 조계종 사업지주회사 ㈜도반HC는 9월 24일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허위 주장이자 의도적인 자료조작 등 날조된 허위사실”이라며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호암당 인환(顥菴堂 印幻) 스님이 원적에 든 지 1주년을 앞두고 있다.스님의 삶은 교학 연찬과 후학 양성의 길 그 자체였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진학한 스님은 대학원까지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6년 간의 고행 끝에 도쿄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은 스님은 교학 연찬에 필요한 어학을 습득하기 위해 북미로 건너갔다.
이렇듯 육문 스님은 공약을 통해 조계종단과 선학원 간 문제에 개입하겠다고 공언했고, 본각 스님은 “비구니들이 힘들어하고 있으니 종단과 선학원과 비구니회가 처음부터 다시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두 스님은 조계종단과 선학원 간 문제에 뛰어들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그런데, 과거를 보면 미래를 아는 법이다. 여태까지 비구니회의 과거를 돌아보면 종단 권승들에게 장악되어 꼭두각시 노릇을 해왔다. 그랬던 비구니회 회장이 과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대한민국의 법원은 이미 조계종이 선학원 문제에 간여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조계종 구성원이라면 어느 누구도 이러한 판결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우리 재단의 입장을 밝혔다. 조계종과 선학원 간 갈등은 조계종이 을 제정해 선학원을 장악하려 한 데서 시작됐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천명하거니와 조계종단과 선학원 간 갈등 해결은 의 폐지가 시발점이 될 것이다.
육조 혜능은 “《금강경》을 듣는다면 마음이 열려서 깨달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금강경》 제2선현기청분과 제17구경무아분에서 수보리는 부처님에게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마음을 낸 사람은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고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낸 사람은 그 마음을 어떻게 항복시키고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느냐는 이 질문이 바로 《금강경》의 주제를 나타낸다. 즉, 불교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 일이란 첫째는 중생의 마음을 어떻게 항복시키느냐는 문제이고, 둘째는 마음을 항복시키고서 그 마음이 어떻게 머무느냐는 문제인 것이다.
사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민족의 독립은 자존심 있는 민족에게 당연한 일인 것이지 일제의 총독정치의 탄압 때문에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스님에게 독립운동은 절대 다른 민족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기 위한 적극적 행동인 것이다.만해 스님은 일제로부터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지만, 스님은 차디찬 옥중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하여 전개하였다. 그러나 스님에게 3년에 걸친 수감생활은 육체적 고통은 물론 정서적으로도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함께 했던 동지 하나둘 변절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죽고 싶을 만큼 견디기 힘든 고문을 받으면서 흔들리는 자신과의 싸움으로 번민과 회한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그럴수록 자신을 채찍질하며 일관된 신념을 한시로 표현하는 등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고, 누구보다 투철한 독립정신을 지키면서 감옥에서 를 집필하여 독립운동의 의지를 밝혔다. 이러한 항일투쟁은 민족대표로서의 자존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항일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