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함은 비굴하지 않다는 말이다. 떳떳하다는 말이 어느 사안과 관련해 무관과 결백을 의미한다면 당당함은 매사 누구 앞에서든 비굴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선사들의 매력은 이 위풍당당에 있다. 특히 남성적 카리스마가 지배하던 선종에서 비구니 유철마(劉鐵磨)의 존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철마는 《벽암록》24칙 공안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한다. 이 공안에서 유철마는
한국불교, 특히 조계종단의 승가에서는 독특한 종풍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승가는 처음 발을 디뎌놓는 행자시절부터 엄격한 규율이 적용된다. 이 엄격한 규율은 그 의식과 절차에 있어서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매우 혹독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속된 말로 군기가 엄청 세다는 말이다. 계율 뿐 아니라 사찰에서 적용되는 각종 금기와 규율을 어기게 되면 즉시 엄벌에 처
여름방학과 휴가철을 맞아 전국 산사에서는 맞춤형 템플스테이로 사람들을 손짓하고 있다. 명상과 힐링 등 템플스테이의 주요 테마가 숲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인기 또한 높다고 한다. 실제로 인류는 예로부터 숲에 많은 부분을 의존해 왔다. 인류의 문명도 어찌 보면 숲에서 나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흔히 불교를 ‘숲의 종교’라 부른다. 부
살아가다보면 인간에 대해 실망할 때가 가끔 있다.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 성인들의 공통적인 가르침인데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절망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지독한 마음의 병이며, 사회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다. 필자는 요즘 한국의 현실을 보면서 실망과 분노, 불신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누구만의 잘못이 아니라
한 곳에 오래 머무른 물은 썩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숫타니파타≫에서는 “성인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한 곳에 오래 머문다는 것은 안주한다는 의미다. 편안하게 지낸다는 뜻의 안주는 자신도 모르는 새 방일과 방종에 익숙해질 수 있다. 방일은 자신의 후퇴를 가져온다. 퇴보를 부른다는 말이다. 부처님은 그래서 수행
조계종의 출판문화정책은 과연 있는 것인지? 새해 벽두부터 새삼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출판이 단순히 책을 찍어 돈을 버는 장사가 아니란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고급스러운 문화의 창출이란 역사적 사명을 운운하기도 한다. 그런데 종단 차원의 출판정책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묻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도출판
최근 마음치유나 명상치유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는 문학치유, 미술치유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불교의 수행을 심리적 치유 내지 상담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이미 오래되었다. 심성산업이란 단어가 일반화된 것을 보면 수행의 가치가 새삼 주목을 받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고도산업사회가 될수록 웰빙과 힐링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리라 보며, 그런
“유아무와인생지한(有我無蛙人生之恨, 나는 있으나 개구리가 없는 것이 인생의 한이로구나).” 고려 말 대문장가인 이규보선생의 집 대문에 붙어있던 글로 알려져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꾀꼬리가 노래를 하고 있을 때 까마귀가 지나다 듣고 노래시합을 제안했다. 꾀꼬리 입장에서 보면 까마귀가 노래시합을 신청하는 일이 가당치 않
얼마 전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루트인 천산북로의 일부를 탐방하고 왔다.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파미르고원을 통과해 카스갈까지 오는 여정은 길고도 험난했다. 아스팔트 위로 자동차를 타고 오고갔지만 꼬박 3일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그리고 카스갈에서 쿠차를 거쳐 트르판의 화염산을 지나 현장법사가 인도를 가기 전에 머물렀던 고창 고성을 탐방했다. 역사책에서는 짧게
한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일대시교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운문화상은 “곧 때와 장소에 따른 가르침이므로 저것은 저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모두 좋다.”하고 대답했다. ≪벽암록≫제 14칙에 나오는 공안이다. 운문화상의 말씀인 ‘저것은 저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모두 좋다’에 적용될 수 있는 것
최근 조계종 총무원은 강남 봉은사를 총무원 직영사찰로 지정하고, 조계종 종회의 동의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강남의 포교를 활성화하기 위해 거점사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란 것이 지정의 이유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봉은사의 반발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법정스님 덕분에 좋은 이미지를 얻은 불교계가 또 다시 파문에 휩싸이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봉은사 직
사람의 목숨은 유한한 것이니, 누가 뭐라고 하던 때가 되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 본래의 자리가 자연이든 아니면 보다 궁극적인 깨달움의 경지이든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생물학적 종언을 열반이라 하거나 시적이라 하거나 아니면 돌아가셨다는 말로 표현한다. 환지본처(還地本處), 즉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의미이다. 유한한 삶을 영원으로
세상이 올림픽 열기로 뜨겁다. 특히 스피드 스케이팅(빙속) 경기에서 500미터와 1만미터에서 금메달을 따자 전 세계가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고 있다. 외신들은 기적이라 보도하고 있다고 국내 매체들도 신명나 있다. 똑같은 금메달을 가지고 지나치게 호들갑 떠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유가 있다. 서양인들은 동양인에 대한 편견이 많다.
2월 25일 헌법제판소는 사형제도가 헌법에 합치한다고 의결했다. 5대 4의 결정이라 한다. 보수와 진보의 논란을 떠나 사형제도를 존치시키기로 판결한 일에 대해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한 자에 대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식으로 판결하는 것은 전근대적이지 않을 수 없다. 사형은 또 하나의 사회적 살인에
항상 돌이켜 보는 것이지만 내 자신이 불교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해 고뇌한다. 그리고 어디에 서서 무엇을 생각하며, 어디를 향해 그다지도 바쁘게 걸어가고 있느냐고 묻곤 한다. 어느 때는 정처 없이 맹목적으로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 자신을 자책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시간은 그런 자문과 자책도 없다. 또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가? 하고 자문하면서 주변을 둘러
“삼보님께 귀의하옵니다. 거룩하신 관자재보살마하살 대비민존(大悲愍尊)께 귀의하옵니다. 옴. 일체의 두려움 속에서 구도(救度)하시는 저 (성스러운 존자께) 귀의하면 여기에 성스러운 관자재의 위력은 (나타납니다). ...일체의 이익의 성취, 정명(淨明), 무능승(無能勝), 일체 생류의 세간도(世間道) 정화에 (도달하겠나이다). 옴 관찰자여! 관찰하는
지난 8월 14일 굵은 빗줄기가 온 누리를 휘감고 도는 때, 제주도 불사리탑을 어느 여인이 하염없이 돌고 있었다. 무슨 소원이 저리 간절하기에 쉼 없이 탑돌이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시달려 들끓고 있는 속내를 가라앉히기 위해 쏟아지는 빗방울을 청량제로 삼아 탑돌이를 하는 것인지. 필자는 천막 속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치지 않고 온종일
그 업보의 끝은 어딜까? 요 몇 일 사이 매스컴은 청주에서 발바리를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청주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 걸쳐 45여 차례나 성폭행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원룸에 사는 독신 여성을 상대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비겁의 극치를 넘어 분노를 금치 못한다. 더구나 평범한 직장인을 가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어이가 없을 정도다. 인간의 탈을
동국대학교 재단 이사회의 새로운 이사장이 취임했다. 근현대 불교사의 질곡과 함께 풍상을 겪어온 동국대학교는 어언 100년의 역사를 넘겼으니 한국 근현대 교육사에 남긴 그 족적은 새삼 거론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동국호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눈길은 편안하지 못하다. 여전히 불안한 마음으로 안전 항해를 기원하고 있다. 동국호, 몰락 명문가의 후예 보는 듯
장마란다. 장대비가 쏟아진다. 어느 누군가의 통곡처럼, 혹은 흐느낌처럼 다가온다. 전국을 강타한 장대비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유는 여하튼 각자의 사정 때문이다. 느낌과 삶의 흔적과 이성 속에서 우리는 내리는 빗물을 하염없이 바라만 본다. 때론 그것이 흙탕물이 되고, 때론 그것이 사람을 앗아가는 거친 용수가 된다. 그리고 결국 때가 되면 바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