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님께 귀의하옵니다. 거룩하신 관자재보살마하살 대비민존(大悲愍尊)께 귀의하옵니다. 옴. 일체의 두려움 속에서 구도(救度)하시는 저 (성스러운 존자께) 귀의하면 여기에 성스러운 관자재의 위력은 (나타납니다). ...일체의 이익의 성취, 정명(淨明), 무능승(無能勝), 일체 생류의 세간도(世間道) 정화에 (도달하겠나이다). 옴 관찰자여! 관찰하는 지혜의 성스러운 존자시여. 관찰을 뛰어넘는 성스러운 존자시여. 자자, 태워주소서. 위대한 보살이시여. 속히 기억하소서. 항상 생각하소서.”

이상의 인용문은 관세음보살을 찬탄하며, 그의 가피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기도문이다. 압축과 절제 속에서 성스러운 관세음보살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전문은 《천수경》에 나오는 다라니를 번역한 것이며, 그 중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천수다라니〉하면 마치 주문처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라니는 번역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관습에 따라 범어를 한문으로 음역해 놓은 것을 다시 한국식 발음으로 읽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알기가 더욱 어렵다. 신도들 입장에서 보면 천수다라니를 하면 기도와 구복이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별한 비판의식을 지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번역해 살펴보면 ‘감격에 겨워 자신의 마음을 바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드러나 있다.

새삼스러운 말을 하는 것은 소통이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소통에는 언어가 필요한데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외국어를 배우고, 사회생활에서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유리한 것은 그만큼 소통의 역할이 넓고 크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전히 소통이 되지 않고 있으며,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을 신비화(神秘化), 주문화(呪文化) 하는 집단이 있다면 그 집단의 장래는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소통은 사회전체, 아니 인간생활에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통이 되지 않으면 오해와 갈등이 발생할 수 있지만 소통은 평화와 공존을 담보할 수 있다. 종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소통은 이해와 가치의 공유라는 점에서 다른 어떠한 것보다 중요한 요인이다. 그럼에도 不通을 가치의 우위에 둔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한국사회의 종교 지형 속에서 생각해 본다면 다른 종교에 비해 불교가 취하고 있는 자세 속에 不通의 양상이 많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에 비해 많이 현대화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느껴진다.

소통의 문제를 말했지만 불교학을 하는 입장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만드는 요인들은 많다. 다른 무엇보다 문자, 언어 등 기본적인 요소들부터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방송매체를 통해 전국민을 상대로 불교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더더욱 소통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계는 마이웨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경전을 암송하거나 축원문을 읽는다.

지난 23일 김대중 전대통령의 장례식에서도 불교의례가 있었다. 특히 다른 종교와 대비가 되는 자리였다는 점에서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나와 축원을 하고, 반야심경을 암송하는 것까지는 거룩했지만 무엇인가 알맹이가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30여 년 전 박정희 전대통령 서거 시에 거행된 의식 때도 유사한 불교의례가 있었다. 30여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불교계의 의식은 변한 것이 없었다. 다른 종교인들처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축원을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혹여 불교계는 권위의식 속에 빠진 것은 아닌지? 아니면 교만함 속에서 시대의 흐름을 냉소적으로 관찰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한문세대가 시대의 중심에서 빗겨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불교적인 축원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관례적인 것이니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불평할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소통을 위해 약간의 양보와 준비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실크로드나 파미르고원, 광대한 사막을 가로질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유무명(有無名)의 조사들을 생각하면 소통을 위한 준비는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생한 분들을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전반적인 한국불교의 현실을 재점검하자는 말이다. 이 시대의 불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그 의미와 가치가 살아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전근대적이고 알쏭달쏭한 불교가 아니라 긴 삶의 여정 속에서 청량제가 될 수 있는 불교, 이정표가 될 수 있는 불교가 되기 위해서라도 소통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차차석/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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