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4일 굵은 빗줄기가 온 누리를 휘감고 도는 때, 제주도 불사리탑을 어느 여인이 하염없이 돌고 있었다. 무슨 소원이 저리 간절하기에 쉼 없이 탑돌이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시달려 들끓고 있는 속내를 가라앉히기 위해 쏟아지는 빗방울을 청량제로 삼아 탑돌이를 하는 것인지. 필자는 천막 속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치지 않고 온종일 내리는 굵은 빗방울 속에서 한 무리의 여인들이 삼보일배를 하며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성스럽게 다가오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문득 구화산을 처음 참배했을 때의 광경이 뇌리를 스쳤다. 1994년 9월여쯤의 어느 하루였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잠뱅이를 걸치고 한 계단 올라오면 절을 한 자락씩 하던 순례객들의 모습이었다. 사회주의 통치로 불교가 사라졌다는 선입견이 허물어지는 순간이면서 신앙의 힘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의 힘은 무엇인가?

온종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모여든 신도들은 저마다 독경을 하거나 사경을 했으며, 일부는 탑돌이와 삼보일보를 쉼 없이 하고 있었다. 광장에 마련된 천막 속에서, 혹은 법당 속에서 불편함을 잊고 단기 수행자가 된 것은 15일 예정된 사경 봉안식과 몇몇 보살상의 점안식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남국의 정취를 머금고 있는 불사리탑은 허응당 보우 스님의 순교지에 건립되었으며, 법주(法主)인 도림 스님께서는 이곳을 한국불교의 대중화, 수행화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하는 염원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1만여 명의 신도들이 전국 각지에서 각자가 사경한 법화경을 모시고 와 탑 아래에 안치한다.

순수한 종교적 열정 모욕할 수 있을까?

비와 무더위 속에서도 일사분란하게 각자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도 존경스럽지만 독일, 미국, 일본, 필리핀, 싱가폴 등에서 온 사경을 하는 수행자들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법화행자들이 염불과 사경 삼매 속에서 정진하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혹자는 그러한 모습 역시 ‘욕망이 전제된 구복이 아닌가?’하고 비판할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처럼 비판을 위한 비판이 욕망에 물든 검은 마음이 아니라면 저 수많은 사람들의 순수한 종교적 열정을 감히 모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불교라는 학문과 불교라는 종교적 행위가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균형을 이룰 때 불교적 가치가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불교라는 종교적 신앙 행위가 배제된 것은 박제화된 역사학이나 문헌학, 내지 철학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머리를 통해 지적으로 불교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가치를 종교적 내지 사회적으로 승화시킬 수 없다. 한국불교학이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되새겨야할 일이라는 점에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신앙행위 배제된 불교는 그저 학문일뿐

서구는 인도 내지 동남아시아를 식민지화하고, 그곳을 보다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불교를 연구했다. 그것은 신앙이 배제되었기에 사상적인 사색이나 철학적 깊이를 심화시킬 수 없었다. 단순한 문헌 연구, 내지 사회적인 영향관계, 역사적 문화적 전개 등에 집중되었다. 이들의 노력이 현대불교학의 발전에 공헌한 바가 매우 큰 것도 사실이지만 불교라는 종교적 신앙체계가 사라진 학문으로 객관화시켰다는 점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그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불교도와 불교학자들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앙 없는 학문적 객관화 극복해야

불교학자들이 자신들의 고견을 어떻게 발표하고, 불교사상을 어떻게 논단하든 그것과는 무관하게 한국불교는 전통적인 방식과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불교를 실천궁행하고 있다. 불교학자도 수행과 불교적 가치를 실현하는 점에서는 출가자가 아닌 이상 평신도이며, 그런 점에서 순수한 종교적 열정으로 넘치는 신도들의 용맹정진을 남의 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불교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자들은 오히려 불교적 가치를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자가 불교적 수행의 근저까지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불교는 단순히 지적 유희의 대상이 아니다. 시교이희(示敎利喜)라는 말처럼 ‘보여 가르치고 대중을 이롭고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적 가르침이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불교적 체험을 통해 자기 자신과 동일화(同一化) 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내면적인 신념이 사회적으로 승화될 때 불교라는 종교의 궁극적 목적이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빗속을 마다 않고 탑돌이를 하고, 삼보일배를 하는 순수한 불교적 열정이 부러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차차석/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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