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업보의 끝은 어딜까?

요 몇 일 사이 매스컴은 청주에서 발바리를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청주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 걸쳐 45여 차례나 성폭행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원룸에 사는 독신 여성을 상대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비겁의 극치를 넘어 분노를 금치 못한다. 더구나 평범한 직장인을 가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어이가 없을 정도다.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일을 서슴지 않는다니 그 업보의 끝은 어딜까 생각해 본다.

이 사건을 보면서 현대인들의 정신건강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극단적인 생각 속에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적 아니면 동지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어느 덧 우리 주변에 뿌리 내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지 않고 알 수 없는 일이라면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남의 아픔은 아랑 곳 없이 오직 자기 자신의 주둥이만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나친 본능 탐닉, 인간 파멸 이끌어

신문 보도를 보면서 분노를 자제할 수 없는 것은 아들이 잠들어 있는 옆자리에서 강간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폭력을 넘어 살인행위나 진배가 없다고 본다. 멀쩡한 정신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는 점은 익히 알 수 있지만 ‘인간이 차마 그럴 수 없는 짓’을 했다는 점에서 분노를 넘어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지나친 본능의 탐닉은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는 숫타니파타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된다.

필자는 그동안 사형제도에 대해 비판해 왔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작되었지만 사형제도 자체가 또 하나의 사회적 살인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필자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있다. 필설로 형용하기 조차 부끄러운 일들이 사회를 강타하면서 정신적 공황상태를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인도 이제 한 두 명은 충격을 주지 않는다. 살인자들은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만 죽은 사람과 그의 가족들이 끌어안고 살아야할 정신적 충격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강력범죄의 원인은 인성 타락

살인이나 강간 등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장애까지 유발한다. 한 사람으로 그 충격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내지 사회 전체로 파급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 사회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필자는 인성의 타락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입시 위주의 학교 교육,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고단한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서민들의 가정교육, 첨예한 경쟁 구조 속에 놓여져 있는 청소년들의 문화 환경 등등이다. 급박한 현실 속에서 인성 위주의 교육이 자리할 틈이 없는 것이다.

연일 이어지는 강간과 살인 등의 대형 사건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를 알려주는 바로메타라고 본다. 물질적 풍요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더불어 삶의 미덕, 즉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스스로를 낮추고 양보하는 정신을 배양하는 것도 필요하다.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 역시 이러한 기풍이 있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 사회가 한층 성숙해질 수 있으리라 본다.

인간 존엄성 바로 서는 사회 서원

21세기 정보화 사회를 맞이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더욱 바로 설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 중심에 한국 사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 역시 숨기고 싶지 않다. 이기는 법만 가르치고 중시할 것이 아니라 정당한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당당하게 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그런 사람에게 박수칠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만 한다.

불교 역시 2천만 불자라는 정치적 구호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수행과 평생교육 기관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부단히 변모해야 한다. 끔직한 사건이 터지는 것은 불교와 무관한 듯 하지만 종교가 지니는 사회적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복 위주의 사찰은 이제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사회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차차석/동방대학원 대학교 교수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