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란다. 장대비가 쏟아진다. 어느 누군가의 통곡처럼, 혹은 흐느낌처럼 다가온다. 전국을 강타한 장대비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유는 여하튼 각자의 사정 때문이다. 느낌과 삶의 흔적과 이성 속에서 우리는 내리는 빗물을 하염없이 바라만 본다. 때론 그것이 흙탕물이 되고, 때론 그것이 사람을 앗아가는 거친 용수가 된다. 그리고 결국 때가 되면 바다로 들어가 대양과 하나가 될 것이다.

말없이 흐르는 빗물에 실없이 동요하는 마음

흐르는 빗물은 말이 없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저마다의 마음은 많은 사연을 머금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픈 것인가? 희로애락이 녹아 있는가? 지난 사랑의 여운이 남아 있는가? 아니면 작년 한 여름의 그 뜨거웠던 열기를 생각하는가? 그도 아니면 허공에 정처 없이 떠돌던 뭉게구름의 낭만을 생각하는가?

지난 삶을 이야기 하자니 다만 추억일 뿐 거기에 무슨 알맹이가 있을 것인가? 추웠던 겨울과 얼음을 지치던 유년의 빛바랜 하얀 추억. 아니면 고단한 삶을 접을 수 없기에 여전히 뜨거운 열기를 식힐 줄 모르던, 그저 새마을 노래가 전국을 메아리치던 가난했던 엊그제가 있을 뿐이다. 흐르는 빗물은 말이 없는데 왜 우리는 지금, 무엇인가 실려 가는 허전함을 달래야만 하는가?

이제 바람을 원하지 않는다. 어디서 온지 알 수도 없는 바람이 흐르는 빗물과 함께 찾아와 내 마음을 두드리지만 풀밭에서 뱀을 보고 놀라 손사래 치듯이, 이제 바람과 안녕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왜 여전히 바람은 내 곁을 떠도는 것인가? 안녕이라고 외친지 오래건만 유년의 꿈속에서 가위에 눌렸던 악몽처럼 끈적거리고 있는가?

생명의 빗물, 가교의 빗물
사랑의 메시지를 싣고 세계를 유랑하는 바람

이제 흐르는 빗물이 우리들의 눈물이 되어선 안 된다. 의식의 강물을 만드는 빗물이 되어 모든 생령을 슬프게 해서는 안 된다. 그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보듬어 주는 생명의 빗물이 되었으면 한다. 누군가는 근심을 실어 보내고, 누군가는 미움을 실어 보내, 너와 내가 하나 될 수 있는 가교의 빗물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함께 찾아온 바람, 바람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바람은 다만 스칠 뿐이다. 스치는 바람이 우리들의 의식을 성숙시키는 것이라면 악수를 하며 조금은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유년, 그리고 청년과 장년, 노년의 의식 속에서 희망을 실어가는 바람이 아니라 사랑의 메시지를 싣고 세계를 유랑하는 바람이길 소원한다.

장마철의 장대비는 낭만이 없다. 다만 덩그러이 남은 현실 속에서 삶의 한쪽 구석을 생각하게 만들 뿐이다. 여전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랑의 전령사가 되어달라고 바람에게 말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의식 저편에 흐르는 장대비가 그치고 밝은 햇살이 찾아오는 그날 우리는 다함께 손잡고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밝은 내일을 약속해주는 빗물과 바람이 돼야

흐르는 빗물과 스치는 바람 속에서 한없이 작아진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 빗물이 결코 원망의 江河가 되지 않길 희구한다. 얼마나 많은 생령들이 빗물에 씻겼는가? 도도히 흐르는 빗물 속에 이젠 모든 서러움을 놓아버려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빗물과 바람이 새로운 생령을 키우는 자양분으로 내일 우리에게 다가와야만 한다.

버려서 얻을 수 있는 것, 바람 속에 성장한 생령이 강건하듯이 오늘 흐르는 빗물은 새로운 탄생의 생명수가 되어야 한다. 진정 영원한 것은 버리고 날려서 아무 것도 없는 듯 하지만 뜨거운 열정과 간절한 여망 속에서 새로운 내일이 다가오지 않는가? 이제 흐르는 빗물과 바람 속에서 찬란한 내일의 햇살을 보았으면 한다. 아! 그런데도 아직 미풍 속에 빗물은 흐르고 있다.

차차석/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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