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크게 나누면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나눌 수 있다. 교종이란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경전을 지침으로 삼아 수행하는 종파’를 가리키고, 선종이란 ‘경전도 결국 자심(自心)을 문자로 표현한 것이므로,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 바로 자기의 본성인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깨닫고자 하는 종파’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소승불교에서는 석가모니야 말로 유일한 부처였으며 최고의 경지를 획득한 분으로서, 어느 누구도 석가모니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중국의 당나라시대 이후에 중국화된 선종이 발달하면서, 달마(達磨)·혜능(慧能)을 비롯한 조사들의 경지가 석가모니와 결코 다르지 않음이 주장되기 시작했다. 흔히 우리는 선어록 등에서 ‘불조(佛祖)’ ‘조불(祖佛)’이라는 말을 자주 보는데, 불(佛)은 석가모니를 가리키고 조(祖)는 조사를 가리킨다. 불조와 조불은 모두 ‘석가모니와 조사’를 동등한 입장에서 일컫는 단어이다. 더 나아가서는 ‘조사의 경지가 석가모니보다 뛰어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의 구별이다.

원래 조사선이라는 용어는 《조당집》에 처음 나오는 말이다. 《조당집》 권19 <향엄장>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향엄지한(香嚴智閑, ?~898)선사는 아는 것이 많고 말재주가 능해서 학문에 있어서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그렇지만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와의 문답에서 말문이 막힌 후로 참선에 열중하여 어느 날 기와가 나무에 맞는 소리에 오도하였다. 향엄이 오도했다는 소문을 들은 앙산혜적(仰山慧寂, 803~887)이 그를 시험하기 위해 깨달은 이치를 다시한번 말해보라고 재촉하였다. 그러자 향엄이 게송을 지어 답하였다.

작년의 가난함은 가난함이 아니요[去年未是貧]
금년의 가난함이 참으로 가난함이라.[今年始是貧]
작년에는 송곳도 세울 자리가 없더니[去年無卓錐之地]
금년에는 송곳마저 없도다[今年錐亦無].

앙산이 이 게송을 듣고 말했다. ‘사형께서는 여래선은 알고 계시지만 조사선은 아직 모르시는군요.

앙산이 향엄의 게송에 대해 왜 이렇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높은 경지이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다. 조사선이란 용어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어쨌든 중국의 당나라시대 이후 조사선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석가모니도 조사의 한 사람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또 석가모니에 대한 화두도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벽암록(碧巖錄)》 65칙 <외도문불(外道問佛)>은 조사로서의 석가모니의 면목을 잘 보여준다.

<어느 외도가 석가모니에게 묻기를 ‘말로 드러낼 수 있는 것[有言]에 대해서도 묻지 않고, 말로 드러낼 수 없는 것[無言]에 대해서도 묻지 않겠습니다’. 석가모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良久]. 그러자 외도는 ‘세존께서는 대자대비하시어 나의 어리석음을 걷어내고 깨달음에 들도록 해 주셨습니다’고 찬탄하는 것이었다.

외도가 떠난 후 아난(阿難)이 석가모니에게 물었다. ‘외도는 무엇을 알았길래 “깨달음에 들었다”고 말한 것입니까?’. 그러자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치 뛰어난 말이 채찍그림자만 보고도 달리는 것과 같다’고 대답하였다.>

‘말로 나타낼 수 있는 것[有言]’이란 세속의 진리[俗諦]를 가리키고,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無言]’이란 절대적 진리[眞諦]를 가리킬 것이다.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良久]’. 그런데 왜 외도는 찬탄한 것일까? 그것은 석가모니의 양구의 진의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마치 석가모니가 꽃을 들자 마하가섭만이 빙그레 웃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처럼.

그런데 석가모니와 선과의 관계를 잘 나타내 주는 또 다른 개념이 있으니, 그것은 ‘진귀조사(眞歸祖師)’이다. 진귀조사설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밑에서 깨닫고 나서도 부족함을 느낀 나머지, 히말라야에 있는 진귀조사를 찾아가 선을 전수받았다’는 좀 황당한 주장이다. 즉 진귀조사는 석가모니의 스승인 셈이다. 진귀조사설은 다른 나라에는 없고 오직 우리나라에만 존재한다. 이 이야기도 결국 교종보다 선종이 뛰어남을 주장한 것에 다름 아니다. 진귀조사설은 고려시대인 1293년에 간행된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 처음 나오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중국선종의 제2조 혜가(慧可)가 달마에게 물었다, ‘지금 저에게 전해진 정법(正法)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만, 세존은 누구에게서 어떤 법을 전해 받은 것입니까? 상세히 설해 주시면 후대의 모범이 될 것입니다.’ 달마가 대답하기를, ‘나에게는 인도의 조사가 전한 한 권의 책이 있는데 지금 너에게 설해주겠다’. (그 후) 게송을 읊어서 말하기를, ‘진귀조사가 설산(雪山)의 총림방중(叢林房中)에서 세존을 기다리네. 임오세(壬午歲)에 조사의 인(印)을 전하니, 네가 심득한 것이 동시에 조사의 종지이네.’>

<명주(溟州) 사굴산(闍堀山)의 범일(梵日, 810~889)국사는 신라 진성대왕(眞聖大王)이 선과 교의 뜻을 묻는 것에 답해서 말해기를, ‘우리 본사 석가는 태어나서 법을 설하고 7보를 걸어서 말하기를 “내 홀로 존귀하다”. 그 후 성을 넘어 설산으로 가서 별에 의해 깨달음을 열었다. 그러나 그 법은 구극이 아님을 알고, 십수개월을 유행한 끝에 진귀조사를 방문하여 처음으로 현극(玄極)의 종지를 전해받았다. 그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라고.>

이상이 《선문보장록》에 기록된 진귀조사에 관한 문장이다. 첫 번째 인용문에서는 진귀조사에 대해 말한 사람은 달마로 되어있고, 두 번째 인용문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사굴산문의 개조인 통효범일(通曉梵日)로 되어있다. 어쨌든 진귀조사설은 ‘달마선은 진귀조사로부터 석가모니에게 전해진 정통선을 이은 것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 현재 진귀조사라는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진귀조사설은 고려시대에 처음 등장한 이후, 조선시대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의 《선교석(禪敎釋)》에도 인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통되었다. 불교학이 발달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황당한 주장이지만, 그 배경에는 ‘선이 교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옛날 선승들의 자부심이 깔려 있는 것이다.

정영식/동국대 불교학술원 HK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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