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종의 종파는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나누어진다. 오가란 임제종·조동종·위앙종·법안종·우두종을 가리키며, 칠종이란 임제종에서 양기파(楊岐派)와 황룡파(黃龍派)가 나왔기 때문에 합쳐서 칠종이라고 부른다. 우두종의 개조는 우두법융(牛頭法融, 594~657)선사로서 4조 도신(道信)의 제자이다. 도신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는데, 정통을 이은 것이 5조 홍인(弘忍)이고 방계가 우두법융이라고 일컬어진다. 우두종은 후에 2조 지암(智巖)→3조 혜방(慧方)→4조 법지(法持)→5조 지위(智威)→6조 혜충(慧忠)으로 이어진다.

우두법융은 4조도신의 제자이기 때문에 남종과 북종이 나뉘기 전에 생긴 것으로써 독자적인 사상을 주장하였다. 우두종의 사상은 ‘철저한 반야공(般若空)’이었다고 생각된다. 당대(唐代)의 규봉종밀(圭峰宗密)은 선을 식망수심종(息妄修心宗)·민절무기종(泯絶無寄宗)·직현심성종(直顯心性宗)의 3종으로 분류하였는데, 식망수심종[망심을 없애고 마음을 닦는 종]은 북종선에, 민절무기종[텅 비어서 의지할 것이 없는 종]은 우두종과 석두희천계통에, 직현심성종[심성을 바로 드러내는 종]은 마조계통과 하택종에 대응시키고 있다.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종밀은 우두종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민절무기종이란 범성(凡聖) 등의 법이 모두 환몽(幻夢)과 같아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원래부터 공적(空寂)이어서 지금 처음으로 무(無)로 된 것은 아니다. 이 달마의 지(知)를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법계와 평등하고 불(佛)도 중생도 없고 법계도 또 가명(假名)이다. 심(心)이 없는 이상 누가 법계를 말하겠는가? 수(修)도 불수(不修)도 없고, 불(佛)도 부불(不佛)도 없다.

 철저히 無사상에 집착하다 송대에 쇠퇴
 법융·조과선사 유명, 학림때 종파로 성립


이와 같이 우두종은 철저한 무(無)를 주장하였는데, 당대에 번성하다가 송대에는 쇠퇴해 버렸다.
우두종의 개조인 우두법융(牛頭法融, 594~657)선사는 속성이 위(韋)씨이며, 강소성(江蘇省) 윤주(潤州)출신이다. 법융은 출가 후 우두산(牛頭山) 유서사(幽棲寺)에서 수행하였다. 우두산은 두 봉우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쌍봉산(雙峰山)이라고 불리었는데, 그 모양이 소머리를 닮았기 때문에 우두산(牛頭山)이라고 한다. 이 때 4조 도신이 유서사를 방문하였는데, 그 인연이 《조당집》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4조 도신이 유서사에 이르니 스님이 수 백 명이나 있었지만 아무도 도기(道氣)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말하기를 “이곳에 도인이 있는가?”하니 어떤 스님이 답하기를 “산꼭대기에 법융이라는 이가 있는데, 몸에는 베옷 한 벌만 걸쳤으며, 스님을 보아도 합장도 할 줄 모르는 특이한 사람이니 선사께서 가 보십시오.”하였다. 도신이 법융을 만나보니 과연 뛰어난 근기임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수년간의 단련 끝에 법융은 도신의 인가를 받게 되었다. 도신이 말했다. “내가 나의 스승 승찬(僧璨) 화상에게서 이 돈오법문을 받았는데 이제 그대에게 전하나니, 그대는 잘 받아 지녀서 나의 도를 실현시켜라. 이 산에서 살기만 하면 뒷날에 다섯 사람이 그대의 뒤를 이어 끊이지 않게 되리니, 잘 간직하라. 나는 떠나리라.”

‘뒷날에 다섯 사람이 그대의 뒤를 이어 끊이지 않게 되리니’라는 도신의 말은 우두종이 6조까지 이어질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한편 《조당집》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도 존재한다.

어느 날 법융이 도신에게 물었다. “범부와 성인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그러자 도신이 답하기를 “범부와 성인은 모두가 거짓 이름이다. 거짓 이름에는 둘이 없으니 차별이 없는 것이니라. 마치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으니라.”했다. 법융이 “성인이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다면 마땅히 없는 것이리니,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까?” 물었다. 도신이 답했다. “내가 말한 것은 거북의 털이지 거북까지 없다고 한 것은 아니다. 나는 거북을 도(道)에 견주었고, 털은 나[我]에 견주었느니라. 그러므로 성인은 나가 없고 도만 있으며, 범부는 도는 없고 나만 있다. 나에 집착하는 자는 마치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으니라.”

▲ 삽화=장영우 화백

불교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할 때 자주 드는 비유가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이다. 성인이니 범부니 하는 것은 모두 가명(假名)으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분별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거북의 털이 존재하지 않지만 거북은 실재하는 것처럼, 도[본성, 본래면목]는 실재한다. 나[我]라는 것은 본성 위에 나타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나[我]는 실재할 수가 없다.
사실 우두종은 초기에는 교세가 미미하다가 종파로서 확립되는 것은 학림현소(鶴林玄素, 668~752)에 와서이다. 학림현소는 5조 지위(智威)의 제자로서, 속성이 마(馬)씨였기 때문에 마소(馬素)라고도 불리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 덕을 높이 사서 영아행보살(嬰兒行菩薩)이라고 불렀으며, 후에 학림사(鶴林寺)에 주석했기 때문에 학림현소라고 한다.
우두종에서 또 한명 유명한 선사로는 조과도림(鳥窠道林, 741~824)선사가 있다. 조과도림은 학림현소의 손제자이며 경산법흠(徑山法欽)의 제자이다. 속성은 반(潘)씨이며, 21세 때 출가한 후 《화엄경》《대승기신론》등을 공부하였다. 나중에 선에 귀의하여 경산법흠에게 참학하여 그 법을 이었다. 후에 소나무 위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조과(鳥窠)선사라고 불리었으며, 또 까치가 그 옆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에 작과(鵲窠)선사라고도 불렀다. 《경덕전등록》에는 조과선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시자 가운데 회통(會通)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하루는 조과선사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그러자 조과선사가 물었다. “어디로 가려 하느냐?” 그러자 회통이 답하기를 “저는 법을 위해 출가하였는데, 스승님께서 가르침을 주시지 않으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공부하고자 합니다.”하였다. 조과선사가 “불법이라면 여기에도 조금 있다.”하니 회통이 “무엇이 스승님의 불법입니까?”고 물었다. 그러자 조과선사가 몸에서 털[布毛]을 뽑아서 입으로 불었다. 이에 회통은 바로 깨달았다.

필자로서는 조과선사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회통은 바로 깨달았던 것이다. 이후 선림에서는 회통을 ‘포모시자(布毛侍者)’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조과선사와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다음의 문답일 것이다.

백낙천이 어느 날 조과선사에게 물었다. “하루 12시 동안에 어떻게 수행해야 도(道)와 상응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선사가 대답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 백낙천이 말했다. “그런 것이야 세 살 먹은 아이라도 알겠습니다.” 이에 조과선사가 말했다. “세살 먹은 아이라도 알기는 쉬우나, 백 살 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우니라.”

백낙천(白樂天, 772~846)은 당대(唐代)의 유명한 시인으로, 본명이 거이(居易)이다. 그는 일찍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아 많은 선승들과 교유하였는데, 마조도일의 제자인 불광여만(佛光如滿)에게 참학하였으며 흥선유관(興善惟寬)·귀종지상(歸宗智常)·조과도림(鳥窠道林)에게 배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백낙천이 조과선사에게 ‘도와 상응하는 법’에 대해 물었는데, 조과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고 할 뿐이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면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는 보통 칠불통게(七佛通偈) 또는 칠불통계(七佛通戒)라고 해서 과거칠불(過去七佛)이 모두 가르치는 것이다. 선을 짓고 악을 그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것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서도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늘이 복으로서 보답하고, 불선을 행하는 자는 하늘이 재앙으로서 보답한다[子曰, 爲善者 天報之以福, 爲不善者 天報之以禍.]”라고 하셨다’고 있듯이, 권선징악의 가르침은 유가에서도 근본적인 가르침에 속한다. 그러나 이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동국대학교불교학술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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