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광덕스님은 한국불교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의식집인 《법회요전》을 편다. 스님은 “의식은 누구나 친근하고 깊은 진실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 점에서 볼 때 종래의 의식문 구조는 완벽하다는 것이다. 다만 한문으로 되어있다는 점이 너무 아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문을 한글로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스님은 한문으로 된 의식문을 우리말로 바꾸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의식문을 한글화 하면 첫째는 의식이 대중화․생활화되고, 둘째는 승려들의 전문적 사제 업무를 완화하게 하는 이점이 생기기 때문이다.

스님에 의하면 원래 비구는 사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의식이 전문화되면서 승려들이 사제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을 우리말화하면 의식이 일반화․생활화되고, 승려는 수도․전법자의 위치로 복귀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승려들은 보살활동이라는 원래의 대승불교의 정체성에 충실하게 된다.

결국 스님은 출가한 승려들이 재가 신도의 의뢰를 받아 기도를 해주고 그 선근(善根)과 공덕(功德)을 죽은 이나 중생들에게 돌리는 화타의례(化他儀禮)에 몰두하게 되면서 많은 문제가 생긴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일반 민중들에게 돌릴 경우, 승려는 보다 본질적인 도를 이루기 위한 수행의례와 불조(佛祖)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행하는 보은의례(報恩儀禮)에 전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문을 한글화할 경우 너무 장황해진다는 문제가 생긴다는 고민을 토로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의식문의 운율에 신경을 써서 의식문을 새롭게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말 법회요전》은 위의 여러 가지 당면문제에 대한 스님의 오랜 서원과 절차탁마의 결과물이다.

주지하듯이 스님의 포교방법에는 몇 개의 원칙이 있다. 그 중 중요한 하나는 철저한 재가불자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전이나 의식은 재가 불자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말 법회요전》은 한편으로는 승려들에게는 특권의식을 버리고 수행자 본래의 생활로 돌아가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가불자들에게는 불교를 신비한 그 무엇에 대한 맹목적 신앙으로서가 아니라 알고 믿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한글화의 경우 치명적인 문제점이 생길 수도 있다는 우려를 던져준다. 왜냐하면 뜻글자인 한자와는 달리 소리글자인 한글에서는, ‘운율’을 맞추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장황화’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심해서, 의미를 훼절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의식문을 새롭게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러나 그 결과를 담보하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생긴다. 그 뿐 아니라 불자들의 한문 의식문에 대한 오랜 동안의 관행을 뛰어넘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점도 치명적인 변수로 작용한다.

이런 여러 가지 우려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우리말 법회요전》을 편찬하는 것을 감행한다. 따라서 《우리말 법회요전》에는 승려의 것은 승려에게, 대중의 것은 대중에게로 돌려주어야만, 한국불교의 미래가 있다는 오랜 현장 경험에서 우러난 강렬하고도 절절한 서원이 그대로 녹아있는 것을 엿 볼 수 있다.

따라서 스님의 《우리말 법회요전》의 체제를 따라가면서 구체적인 논의를 전개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우리말 법회요전》은 의식이 간소화, 생활화되었다. 《석문의범》의 경우 제1장 예경편을 예로 든다면 대웅전에서부터 현왕단에 이르기까지 15편이 있고, 그중 대웅전의 예경문으로서는 향수해례, 소예참례, 오분향례 등 10종이 있다. 뿐만 아니라 대웅전의 의식에 있어서도 상단․중단․하단의 의례가 별도로 진행된다.

그러나 《우리말 법회요전》은 예불의 경우 상단예불, 각전예불(관음전, 지장전), 신중단으로 아주 간소화하였으며, 헌공의 경우도 상단권공과 중단공양에 그친다. 일반적으로 예불이 30분을 넘으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아무리 길어도 1시간을 넘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의례의 지리함과 잡다함 등이 종교적인 신성성과 종교적인 응집력을 약화시킨다는 지적이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아주 진일보한 것이다.

둘째, 모든 의식을 한글화하였다. 불교의례가 한글화되어야 한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의례에 사용되는 언어는 자국어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되어야만 불교의례는 의미전달이라는 일차적 기능을 할 수 있으며, 대중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참가자들 간의 신앙공감대의 형성은 물론이거니와 더 나아가서 의식이 생활의 창조와 믿음의 표현으로 직결될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석문의범》 등을 포함한 기존의 의식집은 지나치게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불자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집전하는 승려조차도 그 의미를 모르지만 관행적으로 시설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일반재가불자의 경우는 승려위주의 의식에서 수동적으로 승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게다가 한문으로 된 불교의식은 불교를 주술화하고, 신도로 하여금 종교적 공감을 결여하게 하며,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주체성을 상실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신앙의 심화 확대가 불가능하게 되는 악순환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이런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한글화가 지체화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모르면 모를수록 더 신심이 생기고, 잘 알면 신심이 떨어진다는 신비주의를 표방하거나, 심지어는 우민화 정책을 통해서 재가불자를 주체적이기 보다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저변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모두가 다 공감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전통적 한문과 다라니의 운율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 그것이다. 전통 한문은 게송의 형태로 따라 부르기 좋으며, 다라니 역시 암송하기 좋은 운율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전통적 불교의례의 운율은 소리의 장엄함과 감동이 역사 속에서 그 효과가 검증되었기 때문에 의례의 한글화, 현대화에서도 이 점은 고려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한글로 풀어 쓰면서도 어떻게 하면 본래의 뜻을 훼손하지 않는 가운데 따라 하기 좋은 운율을 구성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말 법회요전》에는 불교의식이 단순히 종교적 제의가 아니라 보살이 이웃과 겨레로 더불어 함께 만나는 창조적 장이라는 스님의 안목이 잘 드러나 있다. 스님은 의식문을 전면 우리말로 바꾸고 의식의 내용과 진행방식을 혁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따라 하기 좋은 운율을 구성하였다. 그 결과 《우리말 법회요전》은 1983년 출간되면서 불교의식의 현대화․대중화를 점화시킨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현재도 많은 제방의 사찰과 단체에서 《우리말 법회요전》을 의식집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스님의 안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셋째, 재가대중들이 의식진행의 주역으로 나서게 되었다. 스님은 일찍이 의식문을 한글화 하면 승려들을 사제 업무에서 해방시켜 본래의 전법․수도에 전념하게 할 수 있다는 혁명적 선언을 하였다. 이후 스님은 연화부라는 재가 대중들의 의식 전담 그룹을 편성하고 인재들을 선발해서 의식훈련을 조직적으로 실시하였다. 그 결과 재가자들이 자신들의 법회에서 집전을 하게 되자 대중들의 신행의식이 고조되고 자발적인 수행풍토가 조성되었다. 특히 상장례 때 연화부의 활동이 눈부셨다.

오늘날 전국의 사찰이나 단체, 혹은 불교대학에서 연화부와 유사한 단체가 자생적으로 많이 생겨났다. 이 또한 스님의 안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사례가 된다.

-이덕진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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