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 살펴보실 부분)

<止觀法門>
○ (沙門曰) 初明何所依止者 謂依止一心以修止觀也 就中復有三種差別 一出眾名 二釋名義 三辨體狀 初出眾名者 此心即是自性清淨心 又名真如 亦名佛性 復名法身 又稱如來藏 亦號法界 復名法性 如是等名無量無邊 故言眾名 (次辨釋名義) (2)

무엇에 의지하여 지관을 닦느냐에 대해 먼저 밝히겠다. 일심에 의지해서 지관 수행을 하는 것인 바, 거기에 다시 3종의 차별이 있다. 여러 명칭을 드러내고[出眾名], 명칭의 의미를 해석[釋名義], 당체형상에 대한 논변[辨體狀]이다.
첫째, 여러 명칭을 드러낸다는 것은 이 마음이 곧 자성청정심이라는 것이다. 또한 진여・불성이라 부르고, 다시 법신으로도 부르며 또한 여래장이라 칭한다. 그리고 법계로 호칭하고 법성이라 부르니, 이러한 이름들은 한량없고 가없는 까닭에 여러 명칭[眾名]이라 한다. (다음은 명칭의 의미를 해석하겠다.)


<지관강해(止觀講解)>

● 初明何所依止者

‘첫 번째로 지관이 어느 처소를 의지해야하는 가의 문제에 대해 밝힌다(初明何所依止者)’고 하였다. 이는 본문에서 살펴 볼 수 있듯이 ‘일심(一心)에 의지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一心以修止觀]’이다. 일심이란 대승자성청정심이다.

이는 곧 나의 현전에 나타나 있는 일념으로서의 커다란 마음이다. 이 심성이 바로 그 자체가 진여이다. ‘지관이 어느 처소에 의지하여 지관을 수행하는가’에 대한 답은 바로 이 ‘일념의 마음에 의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謂依止一心以修止觀也 就中復有三種差別
일심을 의지하는 가운데 다시 논리전개에 있어서 3종의 차별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 처음이 여러 명칭을 드러내고[出眾名], 두 번째는 여러 명칭의 의미를 해석하고[釋名義], 세 번째는 명칭과 그 의미의 자체의 꼴 형상을 논변하는 것[辨體狀]이다.

● 一出眾名 二釋名義 三辨體狀
일심은 만법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그 명칭도 한결 같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반드시 그 갖가지 명칭을 알아야 바야흐로 하나의 이치로 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사는 우선적으로 마음에 대한 여러 명칭을 드러내었다.

하나의 명칭에는 반드시 하나의 의미가 있다. 그 명칭을 듣고 그 의미를 모른다면 되겠는가? 따라서 명칭이 제시된 다음에는 그 명칭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진다.

또한 명칭이 있고 명칭에 대한 의미가 있으면, 반드시 명칭과 의미의 자체 꼴을 논변하게 된다. 논변이 없으면 중생은 정사(正邪)를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를 염려하여 <대승지관법문>에서는 명칭과 의미의 체상(體狀)을 논변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체상은 여러 명칭에 대한 체상을 의미한다. 앞서 설명된 지관의 체상과 혼동하지 않기를 독자 여러분께 당부 드린다.

● 初出眾名者 此心即是自性清淨心 又名真如 亦名佛性 復名法身 又稱如來藏 亦號法界 復名法性
처음에 ‘일심에 대한 여러 명칭을 드러낸다[初出眾名]’고 하였다. 이 마음은 곧 자성청정심(自性清淨心)이라 한다. 또한 진여(真如)로 불리고 역시 불성(佛性)으로도 불리며 다시 법신(法身)이라 일컫는다. 또한 여래장(如來藏)이라 호칭하고 또한 법계(法界)라고도 호칭하며 다시 법성(法性)이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은 여러 명칭은 가히 한량없어서 여러 명칭이라 말한다.

● 如是等名無量無邊 故言眾名
여기에 열거된 일곱 가지 명칭은 전부 일념심(一念心)의 다른 명칭이다. 마음은 이미 만법의 근본이며 한량없이 차별이 있다. 그 차별에 따라 무량한 명칭이 있다. 마음에도 한량없는 명칭이 있게 된다. 그 때문에 본문에서는 ‘무량무변(無量無)’이라 표현하고 있다. 일곱 종류의 명칭은 단지 생략해서 들었을 뿐이다.

● 次辨釋名義
다음으로는 그 명칭에 대한 의미를 풀이하고 논변하겠다.

<止觀法門>
○ 問曰 云何名為自性清淨心耶

○ 答曰 此心無始以來雖為無明染法所覆 而性淨無改 故名為淨 何以故 無明染法 本來與心相離故 (A)
云何為離 謂以無明體是無法 有即非有 以非有故 無可與心相應 故言離也 既無無明染法與之相應 故名性淨 中實本覺 故名為心 故言自性清淨心也 (B)

<지관법문>
○ 대사께서 자문하셨다.
“무엇이 자성청정심이라 명칭 하는 것인가?”
○ 이어 답하셨다.

(A) “우리의 마음은 무시이래로 무명염법에 뒤덮여 있다. 그렇지만 본디 자성은 청정하여 변계(遍計)하는 일이 없다. 이로 인해 마음에 대하여 ‘자성청정(自性淸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무명염법(無明染法)’은 우리의 근본 자성청정심과 서로 분리되기 때문이다.”

(B) “그렇다면 분리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 무명이란 그 자체가 본디 없는 법이다. 즉 망상이란 없다. 무명번뇌라 여겨지는 것이 비록 있다 여겨지더라도, 사실상 진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있다 해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자성청정심’과 더불어 ‘무명염법’이 서로 합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자성청정심과 무명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미 ‘무명염법’과 본래의 성질이 서로 합하지 않으므로 자성은 청정하다고 부르고, 아무리 무명 속에 번뇌가 덮여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자성 역시 이와 같다. 모든 상대성을 떠난 그 자리는 진실한 자리다. 결코 허망한 자리가 아니다. 따라서 거기에 본래의 ‘각(覺)’을 갖추고 있으므로 ‘자성청정심’이라 칭할 수 있다.”

<지관법문>

● 問曰 (A) 云何名為自性清淨心耶
이어진 질문은 ‘따져 묻는다’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명의(名義)’를 해석하는 부분(상기의 ⊙ 次辨釋名義)에 대한 풀이에 해당된다. 남악대사 스스로 자문하여 상대를 일깨운 것이다.

여기서 질문한 것은 외인(外人)이 아니다.
‘자성청정심(自性清淨心)’이 논의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제시되었을까? 거기에 대한 아래의 답변으로는 이어지는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무명에 덮여 있는 우리의 마음 상태’에 대한 자답(自答)의 논구로써 규명하고 있다.

● 答曰 此心無始以來
‘무시(無始)’는 ‘시작된 것을 모른다’는 뜻이다. 어디에서 그 시작된 바를 모른다는 의미로 활용되므로 ‘예로부터 지금까지’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마음은 ‘무명염법(無明染法)’에 뒤덮여 있지만, 본래의 자성은 청정하여 ‘자성청정(自性淸淨)’이라 칭하게 된다. 망상의 인연을 따르더라도 자체의 성질은 변치 않기 때문이다. 이를 ‘수연불변(隨緣不變)’이라 한다.

● 雖為無明染法所覆
‘무명(無明)’이란 ‘혼미하고 어둡다[迷闇]’는 뜻이다. 그런데 무명에는 그 자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즉 망상이란 본래 없으며, 무명번뇌는 사실상 진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있다 해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성청정심’과 서로 합할 수 없다.

독자 여러분이 보다 이해하시기 좋게 ‘물’의 비유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예컨대 탁하고 더러운 물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아무리 오염되고 더럽다할지라도, 그 더러움은 상태일 뿐이지, 본디 물이 지닌 고유한 성질이라 규정할 수 없다. 결국 더러움은 물의 습한 성질과 하나로 합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혼미하고 어두운[迷闇] 무명에 대해서도 잠시 논의해 보자.

일체는 만법유심(萬法唯心)이다. “내 마음 밖에 따로 실재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 바로 ‘무명’이라 할 수 있으니, 세간이나 출세간 일체법이 모두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라 하겠다.

이미 모든 법이 내 마음을 따라 일어났다면, 눈앞에 보이는 제법을 보는 그 자리에서 내 마음의 모습이라 보아야 한다. 내 마음 밖에서 따로 집착하거나 취해서는 안 된다. 무명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치를 밝히지 못하면 바로 그것이 ‘무명’이다. 그렇다면 ‘무명’을 무엇 때문에 염법(染法)이라 칭할 수 있을까.

‘무명’이라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어둡고 혼미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 외에도 나의 염탁상(染濁相), 즉 불각(不覺)이라는 것은 번뇌로 오염되어 혼탁한 것이다. 그렇기에 청정한 모습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모든 세계는 내 무명이 활동하는 모습이다. 내 마음 밖에 세계가 있어서 따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문장의 끝에 ‘덮다’는 의미의 ‘부(覆)’가 활용되었다. 이는 ‘가린다[障]’는 뜻인데, 무엇 때문에 이 청정한 마음이 무시이래로 ‘무명염법’에 가려지게 되었을까.

원래부터 ‘만법유심’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변수연(不變隨緣) 즉, 내 자성이 아무리 청정하더라도, 그 청정한 자성은 변치 않는 상태에서 생멸의 인연을 따른다.

● 而性淨無改 故名為淨
우리는 ‘염법인연(染法因緣)’을 따르고 있으니 무념불각(無念不覺)의 망념이 일어난다. 이를 ‘불각염기(不覺念起)’라 한다. 여기서 ‘불각(不覺)’이란 ‘내 마음이 본래 진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 何以故 無明染法 本來與心相離故
따라서 망념이 일어나면 무명이 있게 된다. 이 불각망념(不覺妄念)이 일어나게 되면 고요했던 내 마음이 바로 망상으로 요동치는 모습을 이룬다.
내 마음 진여가 본래 이 세계와 하나로 평등한 이치, 그 고요한 이치를 위배하게 된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더욱 돕기 위해 유식불교의 이론을 활용하여 거듭 설명하겠다.

내 마음 고요한 진여는 고요한 자리에서 본래 관조하는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진여를 가려버린 무명은 어두운 모습을 이루어 이러한 이치를 어기게 된다. 우리의 ‘자성청정심’ 전체를 통해 ‘아뢰야식(* 필자 주 - 여기서는 阿黎耶識)’이 되는 것이다.

유식불교에서 ‘아뢰야식’은 세계가 일어나는 근본이다. ‘아뢰야식’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켜 ‘업상(業相)’이라 하는데, ‘무명’이 활동하는 모습이 ‘업상’인 셈이다. 이 ‘업상’은 진여를 가린다. 무명이 활동하는 모습이 일어나게 되면, 전체 진여의 마음은 망상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망상을 이루면, 그 망상에서 능(能)과 소(所)가 나뉘게 되는데 이를 ‘망분능소(妄分能所)’라 한다. 다시 말해 무명이 일어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주관-객관이라는 상대적 관점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즉 범부 중생의 주관적 견해인 능견상(能見相)이 일어나면, 동시에 상대적으로 보이는 객관대상으로 보이는 소(所)가 나뉘게 된다. 이 세계와 내 마음이 본래 하나인데,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무명으로서 요동하게 되는 것이다.

요동하면 ‘업상’이 된다. ‘업상’이 되어 ‘아뢰야식’이 되면, 동시에 대상세계가 내 마음 밖의 별개 객관세계로 보인다. 이는 내 마음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능(能)과 소(所)로 논리를 추구할 때, 주관은 ‘전상(轉相)’이라 부른다. ‘전상’이라 부르는 이유는 청정한 진심이 분별망상의 견해로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견분(見分)’이라고도 한다.

주관적인 ‘견분’이 일어나면, 반드시 객관적인 현상 객관이 있게 된다. 이를 가리켜 ‘현상(現相)’이라 한다. ‘전상’으로서 ‘견분’이 일어나게 되면 동시적으로 이 모든 대상 제법세계가 내 마음과 따로 떨어진 상대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를 ‘상분(相分)’이라고도 한다.

정리하면 무명업상, 전상, 현상 이 셋을 ‘3세(三細)’라 하는데, ‘세(細)’란 극도로 미세한 번뇌의 모습이다. 이를 가리켜 ‘아뢰야식’이라 하는 것이다.

-(B)는 다음호에서 계속-

講 : 송찬우(전 중앙승가대학교 교수)
集 : 정성우(한국불교선리연구원)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