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체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개체이다. -화엄경

1. 통합을 위하여

서라벌 왕궁에 달빛은 고고했다. 왕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분통이 터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왕이 제안했던 불교 공인이 또 부결되었다. 왕위에 오른 지 7년이 흘렀건만 왕은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없었다. 화백회의가 번번이 왕의 제안을 부결하였기 때문이었다. 왕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렀다. 이튿날 젊은 관료 이차돈(異次頓)이 접견을 요청하였다. 그는 진언하였다.

“폐하! 제 목을 치십시오. 목숨만큼이나 버리기 어려운 건 없나이다. 그러나 이 땅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고 임금이 평안할 수 있다면, 기꺼이 제 목을 바치겠나이다.”

이차돈이 순교하게 되는 배경을 대략 소설처럼 꾸며본 것입니다. 신라의 이차돈은 순교를 자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의 목에서는 우윳빛 흰 젖이 솟구쳤고 이는 이적(異蹟)으로 받아들여져 불교가 공인됩니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이차돈의 순교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가 매우 밀접한 관계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당시 신라는 귀족들의 영향력이 막강하였습니다. 귀족들은 자신만의 특정지역을 근거지로 중앙정부에서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습니다. 귀족들의 합의기구인 화백회의는 만장일치제여서 단 한 사람이라도 거부하면 어떤 안건도 결정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라는 부족별로 종교와 문화정통이 달랐습니다. 어느 부족은 개를 숭배하고, 어느 부족은 곰을 숭배하였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전통과 문화로 말미암아 통일된 국론을 모으기가 어려웠습니다. 고구려나 백제는 일찌감치 각 부족들을 통합하여 단일한 국가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통일체제를 갖추어 국력을 키웠고, 이런 점이 신라에게는 매우 큰 위협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라는 여전히 부족연맹체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었으니 법흥왕의 고민을 알만합니다. 이 때 이차돈이 나와 목숨을 바쳐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져가는 신라를 구했던 것입니다. 불교의 포교사에서 이차돈의 행위는 순교이지만, 신라의 역사에서 그는 고대국가로 도약하는 일등 공신입니다.

삼국시대 고대국가의 성립에는 두 가지 과정이 필수적으로 수행됩니다. 첫째는 율령의 반포이고, 둘째는 불교수용입니다. 전자는 귀족들의 합의가 아닌 왕이 선포한 법에 의한 통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율령반포는 부족의 해체와 절대왕권의 성립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후자는 하나의 국가체제 아래에 사상과 문화가 통일되었음을 뜻하는 사건입니다. 기존의 부족들은 그들 고유의 종교와 문화 전통을 버리고 불교라는 보편종교 아래에 통합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불교에 의해 종교적・사상적・문화적 통일을 이루었는데, 이런 통일은 이후 정치적 통일체제를 매우 수월하게 완수하는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크게 일조하였던 것입니다.

2. 권력과 종교, 그 호혜의 역사

실크로드를 통해 유입된 불교가 중국문화 속에 급속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불교교설의 높은 경지와 그 논리의 정밀함은 중국철학이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격의불교(格義佛敎)시대를 조기에 마감하게 되는 것도 도교철학으로는 불교를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불교는 독자적인 색채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많은 불경이 번역되고, 더 많은 지식인들이 이 가르침에 경도되었습니다. 그 경도가 더 가팔라지면서 더 많은 불승과 불교 지식인이 중국으로 속속 유입되었습니다. 이들은 중국인들의 환대와 비호 속에 불경을 번역하고 교리를 계발하였습니다.

불도징(佛圖澄, 232~348)은 서역(西域)의 구자국(龜玆國) 출신의 승려입니다. 그가 낙양(洛陽)에 도착한 310년은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혼란기였습니다. 날이 새면 왕이 바뀌고, 달이 가면 나라가 뒤집히는 극도로 혼란한 시대. 팔왕(八王)의 난이 미처 수습되기도 전에 영가(永嘉)의 난이 일어나며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어 갔습니다. 이 처참한 상황에서 불도징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합니다. 이런 불도징과 후조(後趙)의 왕 석륵(石勒)의 만남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혼란기에 사람들의 신망을 필요로 했던 왕과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후원자가 필요했던 외국인 승려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며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석륵은 불도징의 명성을, 불도징은 석륵의 권력을 주고받았습니다. 석륵과 그의 조카 석호(石虎)로 이어지는 국가권력의 비호 하에 불도징은 893개의 절을 건립하고, 도안(道安)・축법태(竺法汰)・법화(法和)・법상(法常) 같은 당대를 대표하는 승려들을 배출하면서 초기중국불교 융성에 크게 기여합니다.

통일왕조인 수・당(隋唐)시대가 열리며 중국불교는 만개합니다. 위진남북조의 대분열기를 거치고 통일천하를 연 나라가 바로 수와 당입니다. 수의 문제(文帝)는 불교를 높이 숭상하였고, 이 시기에 천태(天台) 지자대사(智者大師)에 의해 천태종(天台宗)이 완성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당 시대가 열립니다. 당대에는 거의 모든 불교종파가 크게 융성합니다. 현수(賢首) 법장(法藏, 643~712)의 화엄종(華嚴宗)을 비롯해, 도선(道宣, 596~667)의 율종(律宗),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裝, 602~664)과 자은대사(慈恩大師) 규기(窺基, 632~682)의 법상종(法相宗), 선무외(善無畏, 637~735)・금강지(金剛智, 671~741)・불공(不空, 705~774) 등의 밀교(密敎), 그리고 정토종(淨土宗), 선종(禪宗)까지 거의 모든 불교종파가 백화만발합니다. 아마도 인류역사상 단일 문화의 폭과 깊이를 잰다면 당대의 불교문화를 능가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이나 이 시기의 불교는 철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세계 최고수준의 성취도를 보입니다. 중세의 기독교도, 사라센의 이슬람도 당대의 불교문화에 미치지 못합니다. 무엇이 이 화려한 문화를 가능하게 했을까요?

수와 당은 모두 이민족이 세운 나라입니다. 이들은 선비(鮮卑)족으로써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이었습니다. 흉노(匈奴)·갈(羯)·저(氐)·강(羌) 등과 선비족을 합쳐 오호(五胡)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한족의 노예나 일꾼으로 중원에 조금씩 들어오다가 혼란기에 용병으로 대거 진출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들에 의해 중원에 통일제국이 세워지니 그게 바로 수와 당입니다. 마치 로마가 국력이 쇠퇴해지자 게르만 용병들에게 의지하게 되고, 마침내는 이들 용병들에게 망하는 것과 비슷한 궤도라고 하겠습니다. 이민족이 중원에 세운 나라. 당연히 한족의 반발도 클 거고 그런 만큼이나 국가통합은 시급히 해결하여야할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국가시책에 가장 적절히 응대한 게 불교였습니다.

본래 불교는 서역(西域)으로부터 중국에 들어옵니다. 서역은 인도가 아닙니다. 멀리 중동지역에서부터 중앙아시아까지 중국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곳엔 여러 이민족들이 살고 있어서 중국인들은 이들을 서융(西戎)이나 호(胡)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중국보다 앞서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인도와 지리적으로도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문화였기 때문에 불교는 이들에게 급속히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고구려나 신라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각 부족들을 통합하고 고대국가체제를 건설하는 데 있어 불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중국과는 분명 다릅니다. 왜냐하면 중국에는 본래부터 그들 고유의 수준 높은 문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나 당은 중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불교를 수용하고 불교에 의한 국민통합시대를 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바탕에서 이들에 의한 천하통일은 불교가 세계종교로 우뚝 설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불교는 명실상부하게 인종이나 언어, 문화 등등의 일체의 차별상을 여위고 만유의 일체평등 대화합을 이뤄야만 하는 과업을 완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른바 원융무애(圓融無碍), 화엄의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은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화엄의 현수 법장이 오늘날 사마르칸트 지역인 서역(西域)의 강거(康居) 사람임을 이해하면 그의 법계연기설이 태동하게 되는 바탕이 좀 더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게 됩니다.

법계연기설은 우주를 구성하는 사물은 비록 천차만별이지만 서로 인연을 맺으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우주관입니다. 이 우주관에 따르면 부처나 중생이나 생사열반의 일체의 대립물이 실상은 모두 평등한 것으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고 있습니다. 개체가 전체를 이루고, 전체는 곧 개체에서 드러나는 ‘일즉일체 일체즉일(一卽一切 一切卽一)’의 거대한 전일적(全一的) 유기체론(有機體論)인 것입니다.

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중화나 오랑캐나, 잘난 자나 못난 자나, 부처의 눈에서 보면 일체가 평등하며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어느 하나라도 홀로 존재하는 일 없이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사상은 실로 이민족의 천하 수・당에서 바라던 세계관이고 철학이었던 것입니다. 작게는 신라가 부족간의 통합을 이루고, 크게는 천하가 하나의 통합체가 되는 철학. 하지만 각자의 개성 그대로를 인정하면서도 상호연관구조 속에 조화를 이루는 철학인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천태의 성구설(性具說)과 화엄의 성기설(性起說)이 나옵니다. 성(性)을 유교에서는 천성이니 본성이니 하여 어떤 실체로 이해하지만 불교에서는 실체가 아닙니다. 유교와 마찬가지로 천성이나 본성으로 새길지라도 그 의미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시종일관 실체부정, 무자성(無自性)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불교가 중국화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근본은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구와 성기의 성은 무자성의 성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성은 ‘타고난 그대로’란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새는 타고나길 날개 달고 타고 났으니 하늘을 나는 거고, 물고기는 타고 나길 지느러미 달고 타고 났으니 물속을 헤엄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자유와 결합시켜 보면 어떻게 될까요? 남녀가 서로에게 끌리는 건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 났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를 통제하기도 하지만, 누구는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기도 합니다. 생긴 게 그렇게 생겼으니 무어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도덕관은 중국 전통과는 쉽게 어울리지 못합니다. 중원에는 유교라는 매우 강력한 도덕철학이 이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천태・화엄학의 성기・성구설을 가능하게 하였을까요?

3. 당(唐)대의 불교, 자유가 준 선물

무측천은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입니다. 이름은 조(曌). 당시의 유력자였던 무사확(武士彠)의 딸로 14살 때 재인(才人)이 되어 궁중에 들어갑니다.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그녀를 매우 귀여워하여 그녀에게 무미(武媚)란 이름을 지어줍니다.

태종이 죽자 무미랑(武媚娘)은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가 비구니가 됩니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죽은 태종의 극락왕생을 빌며 평생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젊고 꿈 많은 무미랑에게 이런 삶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습니다. 태종의 병을 간호하며 알게 된 태자 이치(李治)가 이젠 황제가 되어 감업사에 온 것입니다.

붉은 색이 푸른 색으로 보이고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 看朱成碧思紛紛
그대 생각하며 얼굴은 초췌하고 몸은 야위어갑니다 / 憔悴支離爲憶君
그대 믿지 못 하나요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 不信比來長下淚
상자를 열어 살펴 보세요 고이 접은 석류치마를 / 開箱驗取石榴裙

▲ 용문석굴과 무측천, 용문석굴의 부처상은 이 불사를 후원한 무측천의 얼굴이라고 한다.
무미랑이 고종(高宗) 이치에게 보낸 〈여의랑(如意娘)〉이란 시입니다. 이 시에는 많은 수수께끼가 숨어있어 여러 설이 분분합니다. 다만 고종과 무미랑은 태종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서로 알고 있었고, 또한 서로에게 끌리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석류치마는 석류처럼 붉은 치마입니다. 상중의 비구니에게 어울리는 옷은 아니지요. 아마도 태자시절의 이치가 무미랑에게 선물한 것일 수도 있고, 무미랑의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무미랑은 고종에 의해 다시 궁중으로 돌아오고 정식 부부가 되어 평생을 함께 합니다. 무미랑이 정말로 태종의 여자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무미랑이 태종의 총애를 받던 재인인 것은 사실이고, 당시 풍습대로 죽은 왕을 위해 비구니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고, 또한 태종의 아들인 고종의 왕후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한편 성당(盛唐)시대를 이끈 현종(玄宗)은 아들의 여자를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며느리로 들어온 양귀비(楊貴妃)를 시아버지가 될 현종이 자기 여자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패륜(?)을 백거이(白居易)는 〈장한가(長恨歌)〉에서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구름 같은 머릿결 옥 같은 얼굴에 금비녀 꽂고 / 雲鬢花顔金步搖
연꽃무늬 휘장 두른 따뜻한 침실에 봄밤은 깊어가네 / 芙蓉帳暖度春宵
봄밤 너무 짧아 해가 높이 올라서야 일어나니 / 春宵苦短日高起
이때부터 황제는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네 / 從此君王不早朝


조회를 폐하는 어리석음조차 사랑의 열정 앞에 녹아버리고 맙니다. 나의 인생 전부를 바친다 해도 한번쯤은 빠져보고 싶은 사랑을 백거이는 현종과 양귀비에게서 펼쳐 보입니다. 여기에는 유교적 도덕의식도 윤리강상도 없습니다.

중국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라면 당 태종의 정관(貞觀)의 치세(治世)와 현종의 개원(開元)의 치세(治世)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이 두 치세가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패륜과 불륜으로 시작한 것이라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하지만 본래 유목민이었던 선비족들에게 고종과 무측천, 현종과 양귀비와 경우와 같은 일들은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매우 자유로웠고 대단히 포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자유분방함이 당태종과도 같은 뛰어난 정치지도자들과 만나 역사상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문화극성기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 시기 불교의 발달은 눈이 부실 정도로 광대하고 화려한 성취를 이루게 됩니다.

애초부터 불교, 특히 대승불교는 일체의 관념을 망념으로 봤습니다. 유교적 도덕 가치나 윤리강상 또한 불교의 눈으로 보면 망념에 불과합니다. 이런 불교가 유목민이 세운 통일국가 수・당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국가권력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마음껏 논리를 계발하고 사유를 펼쳐 갔던 것입니다. 중국불교의 교종(敎宗)이 갖고 있는 거대한 이론체계는 이렇게 탄생하고 완성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통일된 하나의 질서체계 속에 개체적 자율성을 조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천태・화엄학의 성구・성기설과 법계연기설 등으로 이루어지는 교리체계는 이런 시대의 혜택을 흠뻑 누리며 피어난 인류정신의 보물입니다.

권력의 후원으로 형성되는 거대 담론은 여럿 있습니다. 서양의 기독교나, 중동의 이슬람도 이런 예에 속합니다. 하지만 당대의 불교처럼 자유까지 동시에 누리며, 절대자유의 경지를 교리체계에 적극적으로 반영한 종교나 사상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불교 이외에는 거의 없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닙니다. 교종은 그 교설이 너무도 방대하여 평생을 공부해도 다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인류역사상 세계에서 손꼽는 부자나라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며 교리를 체계화하고 논리를 갖추어 간 유일한 종교사상이며 철학이라고 한다면, 그 사상의 깊이와 폭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는 것으로도 즐거운 경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김문갑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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