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봉 김기추 거사.
한국의 유마거사라 불리는 백봉선생님을 만난건 대학교 3학년 가을의 일이다. ‘라 메르(La Mer)’라는 이름의 동아리 활동을 하던 나는 선배의 소개로 보림선원을 가게 됐고, 거기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바다라는 뜻을 지닌 ‘라 메르’는 경남여고, 경남고 출신들이 모이는 교양단체였다.

사실 나는 그때 불교의 ‘ㅂ’자도 몰랐다. 단짝 친구가 대불련 활동을 하던 불자여서 선배도 사실 내가 아닌 친구에게 권유했던 거였다. 선배는 “훌륭한 도인이 있다”며 여러 명에게 권유했고, 모두 보림선원에 가겠다고 했지만 정작 법회날 보림선원을 찾은 건 선배와 나뿐이었다. 이런 게 바로 인연이 아닐까. 마음으로 열망하고 있으면 인연이 지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만난 선생님은 마치 신선 같았다. 머리도 하얗고, 호랑이 눈썹에, 수염도 하얗고, 거기에 하얀 두루마기를 입으셨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피부는 맑고 발그레해서 마치 무협소설에 나오는 무협고수, 도사를 연상케 했다.

나는 평소에 질문이 많았던 아이였다. 고등학생 때였다. 내가 다니던 경남여고는 막다른 골목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학교까지 뛰어가곤 했다. 그날도 열심히 뛰고 있었는데 온 동네를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가 갑자기 뚝 끊어져버렸다. 또 어떤 날은 육교를 건너다가 모든 물체가 사라져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절한 것도 아닌데. 소리가 갑자기 사라지고, 모습도 갑자기 사라지는 일을 겪고 보니 ‘소리가 진짜 있는 건가? 이런 모습이 진짜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세상은 있는 건지, 나는 또는 너는 존재하는 건지’ 모두 다 의문스러웠다.

답을 구하기 위해 철학책도 보고, 대학에 진학해 강의도 들었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할까?’ 고민도 많았다. 이런 생각들은 누가 나에게 불어넣은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때문에 ‘나는 이 답을 밖에 찾지 말자, 내 안에서 답이 나올 때까지 질문만 하자’ 다짐했다.

나는 한옥에 살았다. 하루는 남동생과 마루에 걸터앉아 울타리에 빨갛게 피어있는 넝쿨장미를 보고 있었다. 남동생에게 “빨간 장미가 참 예쁘게 피었다”고 하니 남동생은 “빨간 장미가 어딨노?”하고 대답했다. 동생은 적록색맹이다. 내 눈에는 빨갛게 보이는 장미가 동생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거다. 나는 빨간 장미를 보는데, 내 동생은 녹색 장미를 본 것이다. 그렇다면 ‘저 빨간 장미는 과연 무슨 색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빨간 장미는 무슨 색이지?”하는 질문이 계속 되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게 화두였던 것이다. 그런 고민을 안고 있던 나에게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충격 그 자체였다. 선생님이 첫날 던진 질문은 법상 위에 꽂혀있던 백합에 대한 것이었다. “이 백합이 무슨 색깔이냐?”하고 물으시는데 진짜 놀랐다. 백합이 흰색인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흰 백합이 무슨 색깔이냐고 물으시는 것이었다. 내가 진짜 정상인가를 고민할 정도로 남들은 하지 않는 질문을 품고 살았는데, ‘내가 한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이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감도 느꼈다.

선생님은 백합의 색을 ‘무색(無色)’ ‘비색(非色)’이라고 말씀하셨다. 순간적으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그때 결심했다. ‘선생님에게 배워야겠다. 여기서 공부해야겠다’ 하는 결심을. 선생님은 경전이나 어록의 문어구 풀이가 아니라 모든 걸 당신 살림살이로 풀어내셨다. 일체만법은 상대성으로, 본래면목은 절대성으로 단어를 창조해가며 설명해주셨다. 선생님은 절대성과 상대성이라는 말이 공부를 10년은 단축시킬 것이라는 말씀도 하신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매일 저녁 법회를 여셨다. 법문을 통해 학인들이 정견(正見)을 세우고 공부의 윤곽과 바탕을 세워서 그대로 행하기 위해서였다. 선생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학교와 선원을 오가는 생활이 시작됐다. 법문을 들으면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토요일마다 철야정진으로 재가불자들의 수행을 이끄셨다. 세간살이 하는 재가자들이 공부하는 시간을 내기 어려우니 토요일마다 철야정진을 행하신 거다.

젊은 대학생들이 선원에서 먹고 자고 했는데 아침 문안인사를 드릴 때마다 법문을 들려주셨다. 하루에 3~4번 이상 법문을 들었으니 귀가 조금이나마 열렸다. 9월에 선생님을 만나고, 10월 말쯤 ‘일심행’이라는 법명을 내려주셨다.

나는 선생님 말씀 가운데 “죽어도 내가 죽고, 살아도 내가 산다”는 말씀을 가장 좋아한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울림을 준 말이다. 지금도 그 말씀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선생님이 해주신 법문 가운데 내가 가진 질문의 답이 다 들어있었다. 나는 정말 신나게 공부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았다.

선생님은 ‘정견’을 세워 실천행을 해야 한다고, 자기 살림살이를 가져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자기의 본래면목을 되 밝히는 일이다. 어느 대학생이 물었다. “불교가 무엇입니까?”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서 사실을 사실대로 행하는 것이다”라고 선생님은 대답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듣고 가슴이 시원해지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었다. 사는 판이 공부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불교계에서도 유명하셨다. 청담스님은 선생님에게 출가를 권하셨다. 하지만 선생님은 재가로 남기를 원하셨다. 화봉스님도 출가를 말리셨다. 선생님께서 재가로 전법하기를 기대하신 것이다. 선생님의 설법을 들은 불자는 수백 명에 달한다. 그 중 입실 제자는 지환스님, 혜철스님을 비롯해 진서운 거사, 강혜월 거사, 정일송 거사, 이자운 거사 (황야청 거사)를 비롯해 30여 명이다.

언젠가 “무엇을 스승이라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스승은 생을 원천적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의 원천이며 새로운 삶의 이정표이다”라고 대답했다. 한 사람의 영혼을 바닥부터 뒤집어서 다시 탄생시키는 모체가 스승인 것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그런 스승이었다.

▲ 1981년 정릉 보림사 석불 봉안식에서 법문을 하고 있는 백봉거사.

1975년 9월에 처음 선생님을 뵈었고, 4개월여 만인 1976년 1월 결혼했다. 선생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나는 출가를 했을 거다. 1975년 12월 선생님이 장출혈로 수술을 받으셨다. 방학 때라 아침부터 오후 9~10시까지 병원에서 선생님의 시봉을 들었다. 선생님은 매일 다섯 시간 정도는 정진을 하실 정도로 고통에 초연하셨다. 의사가 선생님을 칭찬하실 정도였다. 다들 소리를 지를 정도로 아픈 주사를 아무렇지 않게 맞으신다고. 많은 사람들이 도인은 아프실 때 어떠하신지 병문안 겸 구경(?)하러 왔다.

하루는 부모님이 선생님 병문안을 갔는데 선생님이 “서울에 이수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안경애한테 장가 들 생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수열씨가 선생님께 말씀드린 것도 아닌데, 이미 꿰뚫어보신 거다. 아버지는 딸이 선원에만 가고 출가하고 싶다고 해서 애가 타던 차에 선생님 말씀에 이수열씨를 만나고 싶어 했다. 이수열씨가 일주일 만에 다시 부산에 내려왔고 바로 결혼이 결정됐다.

한밤중에 선생님과 독대를 했다. 선생님은 출가하고 싶다는 내 뜻을 반대하시며 “이생에는 속세에 인연이 있으니 인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불법”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에 결혼을 결심했다. 선학원에서 탄허스님의 주례로 결혼했다. 시조부모까지 모시는 4대가 함께 살았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나는 여름·겨울정진 때 아이들을 데리고 선원에 가서 선생님을 뵈었다. 스승의 얼굴을 뵌 것만도 공부였다.

22세에 선생님을 만나 40여년이 흘렀다. 부모님은 나의 육체를 낳아주셨고, 선생님은 나의 영혼을 탄생시켜주신 나의 스승님이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늘 정진하고 계셨다. 일상에서 생활을 할 때 ‘법신자리가 하는구나’ 하고 아는 것이 바로 수행이라고 가르치신 분이다. 나는 선생님이 등을 벽에 기대신 것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편찮으실 때조차도. 철야정진을 하다가 피곤해서 벽에 좀 기대 앉아 있으면 바르게 앉지 않는다고 불호령을 내리셨다. 자세가 발라야 마음도 바르다고 늘 말씀하셨다.

당시 남천동 선원의 잔디밭에는 쑥이 많이 자랐다. 선생님도 쪼그려 앉아 쑥을 뽑았다. 다리가 불편하신 걸 알기에 말렸지만 선생님은 쑥을 뜯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셨다. “요놈의 새끼”라고 하며 쑥을 뜯으셨다. 이유를 물었더니 “이 쑥이 번뇌 망상과 같다” 하셨다. 선생님은 일상이 곧 수행이고, 정진이셨다.

선생님이 후학양성에 나섰던 보림선원은 굉장히 가난했다. 법문과 좌선정진만 하는 선원이었기에 더 가난했다. 선생님은 오로지 정법수호의 길로만 매진하셨던 분이다. 선생님 문하에는 20대 젊은 대학생들이 많았다. 그때도, 지금도 희귀한 일이었다. 아르바이트도 흔치 않던 시절. 대부분 학생들이 공짜로 밥을 먹고 갔다. 정부미로 밥해먹고, 무로 짠지를 담고, 밭에서 채소 뜯어서 부침개를 해주고 그랬다. 여학생들은 밥하고, 남학생들은 밭을 매면서 선원 살림을 도왔다. 그 어려운 살림에도 누가 보시를 하면 선생님은 보시금으로 늘 책을 내셨다.

백봉 선생님은 불교공부를 하신 적이 없던 분이다. 1908년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신 선생님은 항일운동단체인 부산청년동맹 위원장을 역임하고 소요죄로 부산형무소에서 1년을 복역했다. 만주로 피신해 동만산업개발사를 운영했고, 해방 후 건국준비위 간부로 활약했다. 미군정청에 의해 법령위반죄로 5년을 선고 받아 부산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재심에서 무죄로 석방되기도 했다. 1950년 부산남중학교와 부산남고등학교를 설립해 기성회장을 역임하는 등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펼치셨다.

선생님이 불교를 만난 건 56세 되던 여름이다. 인천 거사림을 따라 청주 심우사에서 하계 수련대회에 참가했던 선생님은 가을부터 무자화두로 간화선 수행을 시작했다. 1964년 1월 심우사에서 무자화두를 타파하고 견성했다.

그해 3월 《금강반야바라밀경강송》을 탈고한 선생님은 인천 거사림 요청으로 《금강경》 강송법회를 개설했고, 1965년 재가 수행단체인 보림회를 설립했다. 현재 보림선원은 부산과 산청 그리고 서울 세 곳에 있다.

▲ 안경애(일심행) 보림선원 서울 선원장.
백봉 선생님은 첫째 눈 밝으신 선지식이다. 첫째도 자성개발(自性開發), 둘째도 자성개발, 세째도 자성개발을 강조하셨다. 학인들이 공리(空理)에 요달해서 자성(自性)을 되 밝힐 수 있도록, 허공성(虛空性)의 이치를 깨우칠 수 있도록, 모습이 없는 허공을 비유로 수없이 허공법문을 하셨다. 방편으로 내세운 ‘허공으로서의 나’의 허공은, 허공의 성품 즉 허공성을 가리킨다. 일체만법이 모두 허공성임을 결정하여, 허공성 즉 절대성, 평등성 자리에 앉아서 되돌아 허공성인 일체만법을 굴리는 것을 설파하신다.

둘째,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에 맞는 공부 방편을 제시한 선지식이었다는 것이다. 요즘 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수행 방편인 거사풍(居士風)과 새말귀[新話頭]를 주창함으로써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대도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거사풍은 재가자가 가정과 생업을 지켜가는 바쁜 세간살이 가운데서도 올바른 수단방편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이며, 새말귀는 내가 바로 부처인 도리를 알아서, 부처임을 깊이 믿고 결정하여 부처행을 하는 수행법이다. 즉 밥 먹고 일하는 것이 모두 견성의 도리가 되는 것이다.

산업과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몸이 자체지혜가 없는 무정물이고, 가도 가도 끝없는 허공중에 지구가 둥둥 떠 있는 것을 아는 지금은, 예전과 공부방편이 달라져야 하고, 전체 중생들을 제도하려면 화두방편이 바뀌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공부 방편을 갈망하고 있는 이때, 40여 년 전에 새말귀를 주창한 점은 놀라운 일이다. 삐삐도 없던 시절에, ‘영상통화가 가능할 때 새말귀가 꽃을 피울 것’이라는 말씀을 그때는 알아듣지 못했다. 선생님은 젊은이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치셨다. 나도 요즘 일주일에 네 번 법회를 하며 법문을 하는데 에너지 소모가 많다는 걸 느낀다. 매일 법문을 해주셨던 선생님의 열정과 자비심에 다시 한 번 고개 숙인다.

선생님 문하에 있을 때 “나는 우리 선생님과 같은 사람이 될거야”라고 생각했다.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하고 전법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성을 되밝혀서 자유로운 삶의 주인으로서 모든 생명들과 더불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백만자성등을 밝힐 수 있도록 무소의 뿔처럼 나아갈 것이다.

-안경애(일심행) 보림선원 서울선원장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