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잔인한 사월’이 가고 신록이 시나브로 짙어가는 오월을 맞고 있다. 아직 진도 앞바다 여객선 침몰사고로 인한 온 국민들의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고 있고 아마도 상당 기간 동안 참혹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이 시절에 우리는 다시 ‘부처님 오신 날’을 맞고 있다. 어린이날과 이어져 있는 올해 석탄일은 예전 같으면 긴 연휴로 받아들여져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 등을 계획하며 설렜을 테지만, 그런 설렘조차 죄스러움과 함께 잦아들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번 사고의 원인과 대처과정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런 의견들의 대부분은 일정한 합리성을 포함하고 있어서 모두 받아들일 만하지만, 그럼에도 꽉 막힌 마음을 뚫어주기에는 어딘가 허전한 구멍들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더욱 답답한 것은 이런 사고를 계기로 유사한 사고가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올 초에 생때같은 대학 신입생들을 어이없이 잃어버린 경주 체육관 사고를 경험하고도 이번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뼈아픈 경험을 우리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속 시원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나 자신 또한 그런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무력감에 하루하루의 시간들을 감당해내기 어렵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오고 있어 우리는 부처님께 이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부처님이시라면 이런 참담한 상황을 어떻게 보고 대처하라고 말씀하실까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시던 시대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초반 모두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누구나 자신의 욕심을 기반으로 해서 좀 더 많은 것들을 갖고 싶어 하고,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원망과 좌절의 시선을 보내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맨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고타마 붓다도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그 진리를 대중들에게 설하시는 것을 망설였고, 그 망설임은 진리를 듣고도 알아듣지 못하거나 조금 알아들었다고 해도 삶 자체는 변하지 않는 무명(無明)의 짙은 그림자에 대한 우려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분은 가르침을 펼치시기로 결심했고, 그 결과 비로소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의 불교(佛敎)가 이 땅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땅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지도 벌써 2000년 가까운 세월을 축적하고 있다. 부처님은 자신의 유언대로 진리와 각자의 수행을 통해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지만, 어리석은 우리는 황망한 비극을 맞으면서 좀 더 가까이서 그 분의 음성과 손길을 느낄 수 있기를 열망하게 된다.

이 땅에 부처님이 다시 오신다면 먼저 연민의 눈길로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과 몸을 따뜻한 자비의 손길이 어루만져주실 것이다. 그런 후에는 우리 모두를 향해 자신의 삶을 이루고 있는 탐욕과 무명의 짙은 그림자를 성찰하라고 가르치실 것이다. 생산력과 소비가 인류 역사상 최고 수준에 이른 자본주의 사회로 거의 온전히 편입된 21세기 초반 한국인들이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빠르게 달려가고만 있는지를 한 걸음 멈춰 서서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시면서 관련자들의 책임을 끝까지 물으면서도 그들에 대한 자비의 눈길을 거두지는 말라고 하실 것이다.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자들과 나 자신의 삶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동체(同體)의 진리는 결코 그들의 무책임에 대한 무조건적 용서와 눈 감음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책임을 준엄하게 물으면서 동시에 그들과의 연기적 관계성을 새롭게 깨달아 나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명의 그림자를 몰아내려는 성찰과 자비의 손길로 구현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진리가 단순히 추상적 논의의 장에 머물지 않고 근원적인 안전과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와 문화, 윤리를 바로 세우는 구체적인 실천의 장으로 나설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몫이자 책임이다.

-박병기(한국교원대 교수, 동양윤리교육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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