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오래전에 텔레비전에서 희한한 뉴스를 본 적이 있다. 환자를 진료한 뒤 집까지 차로 바래다 준 어느 시골 병원이 환자를 유인하는 불법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적발됐다는 보도였다. 대충의 내용은 이렇다. 그 병원은 최근 수년간 수술이 끝나면 집까지 바래다준다며 환자를 끌어 모았고, 보건소 측은 이런 행위는 환자 유인 행위라며 의료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뉴스에서는, 의료법 27조는 의료기관이 영리를 목적으로 불특정다수인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관련 법령까지 보여줬다. 하지만 해당 병원에서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에게 가끔 차량 편의를 제공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병원장은 선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면 시정하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한 모양이다. 보건소는 경찰과 보건복지부에 통보하고, 행정조치에 나설 예정이라고 뉴스는 전했다.

희한한 뉴스다. 일단 보건소에서 문제를 제기했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 문제를 삼는 주체는 대개 경쟁 관계에 있는 이웃 병원이기 마련이다. 고객을 빼앗기니 당연한 노릇이다. 그런데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도 않고 병원과 경쟁관계에 있지도 않은 보건소가 왜 나섰을까. 세상에는 늘 별 일이 있으니,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하도 이상해서 의료법 제27조도 찾아봤다. 제3항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모두 인용해보면 이렇다. “누구든지 ‘국민건강보험법’이나 ‘의료급여법’에 따른 본인부담금을 면제하거나 할인하는 행위, 금품 등을 제공하거나 불특정 다수인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행위 등 영리를 목적으로 환자를 의료기관이나 의료인에게 소개·알선·유인하는 행위 및 이를 사주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 문제가 된 곳은 자기 병원에서 백내장이나 녹내장 수술을 하고 눈을 가린 시골 노인들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환자들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특정인이다. 예전에 대형마트나 백화점들이 그랬듯이 셔틀버스를 마구 돌려서 불특정다수를 무작위로 실어 나른 게 아니다.

게다가 해당 의원이 하필이면(?) 안과라고 한다. 치과에서 교통편의를 제공했다면 뭔가 좀 수상해 보일 수도 있다. 사랑니 뽑았다고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건 좀 과하다 싶다. 그런데 하필 안과라고 하질 않는가. 멀쩡한 젊은 사람도 한쪽 눈을 가리면 거리 감각이 떨어져 넘어지거나 부딪히기 일쑤다. 시골 어르신들이 수술로 한 쪽 눈을 가리면 어떨지 아찔하다.

병원장은 ‘선의’에서 그렇게 했다고 분명히 말했다. 마음을 저울로 달아볼 수는 없으니, 선의의 진실성 여부는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의가 아니라는 분명한 근거가 있기 전까지는 선의로 믿어줘야 한다. 언론매체나 공권력이라고 해서 개인의 선의를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정말 선의였다면 어쩔 텐가. 언론과 관공서가 나서서 애꿎은 사람 욕보이고, 사회의 불신을 조장한 책임은 어떻게 질 것인가. 한 쪽 눈에 안대를 하고, 거리감각을 잃어 갈팡질팡하면서 지팡이를 짚고 버스정류장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시골 어르신들에게 공사다망하신 보건소 직원들이 업히시라고 등짝이라도 내밀어본 적이 있는지, 아니면 보건소 차량이라도 제공해준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선설(禪說)]

석상경저(石霜慶諸) 선사에게 어떤 학인이 물었다. “경전에도 조사의 뜻이 있습니까?[敎中還有祖師意麽]” 석상이 대답했다. “있다.” 학인이 다시 물었다. “경전에 있는 조사의 뜻은 무엇입니까?” 석상이 말했다. “책 속에서 구하지 마라![莫向卷中求]”

부처의 가르침인 경전이 조사스님네들의 뜻과 부합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선불교는 끝내 불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있다고 답한 것이다. 그런데 학인이 다시 경전 속에 있는 조사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다. 이것은 글자를 통해 발설된 의미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학인의 물음에는 전제가 깔려있다. 의미는 글자에 담겨있고, 그 글자를 통해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는 전제다. 이 전제가 성립되지 못하면 질문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말이나 글자를 기표(記表)라고 그러고, 의미를 기의(記意)라고 그런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제멋대로라고 현대 언어학의 대가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가 말했다.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의 대표작은 ‘이미지의 배반(La trahison des images)’이다. 그림 속에는 담배 피는 파이프 하나만 달랑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이렇게 쓰여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 파이프가 아니라면 뭔가. 파이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파이프라고 말하는’ 혹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건 혹은 현상이 있는 것이다.

불경은 부처의 마음과 글자가 조합된 기호체계이다. 조사가 부처의 뜻에 대해 말하고 그것에 다가갔다는 점에서, 조사의 뜻은 경전에 부합한다. 하지만 조사의 마음과 말은 부처의 그것과는 다른 또 다른 기호체계다. 그러니 불경 속에는 조사의 뜻이 없다.

신문에 쓰여 있거나 텔레비전에 나오면 다 믿어버리는 세태다. 그것과 조금만 다른 얘기를 해도 사람들이 힐금힐금 쳐다본다.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뉴스는 사실이 아니라 뉴스를 전하는 사람의 뜻과 말이 결합된 하나의 기호체계에 불과하다. 그리고 기호체계는 본래 제멋대로다.

그런데 기호는 스스로 제멋대로라고 털어놓지 않는다. 그것이 작동하는 순간에는 사실인양 행세한다. 기호를 받아들이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기호는 인류에게 벼락처럼 떨어진 축복인 동시에,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한정짓는 족쇄이기도 하다.

안다는 것은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 것이다. 허위의 허위 됨을 알아 가는 과정이다. 선사들은 이 일을 두고, 천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일이라고 했다. 그만큼 두려운 일이다.

-박재현(동명대학교 불교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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