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 불법 되찾는 회복운동

현대불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불사(佛事)중의 하나는 청담스님의 정화(淨化)불사다. 일제강점기 한국불교는 조선 500년의 억불상황 속에서도 지켜왔던 서릿발 같은 청정승가(淸淨僧家)의 전통이 일본불교의 강요와 영향 아래 왜색불교로 변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청담스님의 정화운동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계율(戒律)을 복원하고 한국불교 수행정신의 재정립을 통해 청정승가의 본래위상과 불법의 청정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회복운동이었다. 이러한 청담스님의 정화에 대한 마음은《청담대종사전서(靑潭大宗師全書)》권10 ‘정화운동과 한국불교’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주색(酒色)은 속계에서도 타락한 근본이라 엄계하거늘 하물며 이를 금지하는 불교에 있어서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왜곡 타락된 풍조가 비불교적인 요소요, 혁명을 요하는 현실입니다. 기성사업에 밀려서 이를 인정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데 혁명이 있을 수 없고 타락한 현실을 광정(匡正)하지 않는 곳에 전진이 있을 리 없습니다. 불교계의 타락을 과감히 시정하고 한걸음 나아가 우수한 인재들을 양성하여 옛날 신라시대와 같은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정신적 지주를 이 땅에 마련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려는 것이 우리들의 근본 동기입니다.”

청담스님이 기치를 세운 정화란 불교와 불법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스님들의 구성체인 승단(僧團)의 정화임을 명확히 하고 첫발을 내딛은 것이었다. 썩어문드러진 불교를 정화해야 한다는 큰 사명의식에 차 있었다. ‘성불을 한생 미루더라도 중생을 제도한 연후에 성불하겠다’는 서원은 바로 불교정화를 위해 온몸을 바치겠다는 원력으로 나타났다. 청정수도 도량인 사찰이 친일 승려들의 결집처가 되고, 대처승들의 생활처가 되어 타락 부패해가는 불교를 앉아서 묵과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청담스님에게 있어 정화는 철저히 계율(戒律)을 지키고 그에 입각해 수행(修行)과 전법(傳法)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정승가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음을 보고 부처님께서 정하신 계율(戒律)에 위배되고 정법(正法)을 파괴하는 요소는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청담대종사전서(靑潭大宗師全書)》권1 ‘마음’에서 정화불사(淨化佛事)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일제가 이 땅을 침략한 이래 우리나라 불교계에는 여러모로 변동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승려들이 술 · 고기 · 담배를 먹는, 특히 대처문제(帶妻問題)였다. 원칙적으로는 대처하지 않는 것, 이것은 부처님 이후 출가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이다. 글자 그대로 수천 년 동안 움직일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전통이기도 했다. 어쨌든지 간에 청정해야 하는 불법문중(佛法門中)에 훼법분자(毁法分子) 대처승이 생겨났으니 근대 한국불교 승단에서 막행막식(莫行莫食)하며 처자를 거느린 비법승배(非法僧輩)들이 종권에 등단하고 교계를 혼탁케 한 데서 마침내 호법정화(護法淨化)의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한국고유의 승풍(僧風) 진작

이와 같이 청담스님은 불법(佛法)은 청정본연(淸淨本然)에 두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종교사(宗敎史)는 종교 본연의 근본을 좀 먹는 비본질적 요소와 대결하여 싸우는 투쟁(鬪爭)의 역사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비본질적 요소가 교단의 토대인 계율(戒律)에 도전하고 있다면서 그 당시의 교단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였다. “일본의 한국침략과 더불어 민족의 주체성을 말살하려는 식민지화 정책의 비호아래, 파계환법자(破戒換法者)들이 사찰을 장악하고 교단에서 당당히 호령하게 됨에 그들의 수효는 순식간에 늘어갔고, 이때부터 불교는 타락의 길로 내리막길을 걸어왔다.”면서 “수행자의 기본요건으로 계율(戒律)을 준수해야 한다.”고《청담대종사전서(靑潭大宗師全書)》권3 ‘잃어버린 나를 찾아’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막행막식(莫行莫食)은 바라밀이 아니다. 이런 걸 모르고 무식한 선지식(善知識)은 음주식육(飮酒食肉)은 무방반야라고 막 놀아난다. 그래가지고 중생까지 버려놓고 나중에 공부하는 중들 다 버려놓는다. 대처승(帶妻僧)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45년 동안에 몇 번씩 공적(公的)으로 사적(私的)으로 웃으면서도 싸우고, 찡그리면서도 싸우고 한정 없이 싸웠다. 이래 가지고 수좌들이 그만 마구잡이로 행동했음이 도둑질하고 음행하는 게 보리(菩提)에 무슨 거리낄게 있으며, 술 먹고 고기 먹는 것이 반야(般若)세계에 무슨 장애(障碍)가 될 게 있느냐,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 그게 뭔데 그게 어디가 걸리고 막히느냐, 이래가지고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했는데 듣고 보면 그 말이 어려운 법담같이 들린다. 그러나 정법(正法)에 턱도 안 닿는 말이다. 그렇지만 말이 그럴듯하고 어렵게 하는 수도 보여 유혹이 되어 대중이 따라간다. 이제 마음이 약해서 눈물 흘려 가면서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말 발심(發心)한 사람이면 항복기심(降伏其心)을 해보려고 하는 그 마음으로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를 닦으라는 것이다.”

청담스님은 지계(持戒)란 수행자가 부처다움을 보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스님이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가장 청정해야 할 수행자의 막행막식(莫行莫食)은 결코 바라밀(波羅蜜)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청담스님은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잇고 한국고유의 승풍(僧風)을 진작시키기 위한 대원력으로 정화불사를 시작하였으며, 출가는 바로 혁범성성(革凡成聖)을 이루는 길이요, 수행(修行)과 교학(敎學)의 토대를 기반으로 정화불사를 이룩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원력으로 한국불교 500년 왜곡된 현실을 바로 세우는 정통성 회복에 정화(淨化)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것이다.

이 무렵 교단의 사정은 승려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 사찰 내에서 처자(妻子) 권속을 거느리고 생활하며, 음주·육식과 끽연에 구애가 없는데다, 사찰시설을 유람객을 상대로 하는 영업장으로 이용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이런 판국에 불교계의 지도층에서는 이권(利權)과 명예욕(名譽慾)의 아수라판을 조장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청담스님은 정화를 통한 한국불교 교단의 수술이 시급한 중증(重症)상태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오염된 교단 바로 세우는 첫발

청담스님은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동시에 불조(佛祖)의 정법을 수호하고 오염된 교단을 청정하게 바로 세우자는 불퇴전의 원력으로 운허(耘虛)스님과 함께 조선불교학인대회를 주도하였는데 당시의 인연을 《청담대종사전서(靑潭大宗師全書)》권10 ‘정화운동과 한국불교’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개운사 불교전문 강원시절 석전 박한영 스님에게 불경을 배우고 있을 때였다. 내 나이 27세이던가? 나는 근세조선 오백년 동안 천대받던 불교를 정화, 중흥시키자는 정통 불법수호(佛法守護)의 기치를 들고 전국학인대회(全國學人大會)를 열고 전국 40여개나 되는 강원(講院)을 찾아 행각의 길에 올랐다. 그토록 많은 삼보정재(三寶淨財)가 일인독재(日人獨裁)의 착취와 억압 앞에 이름도 자취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 삼천년 정법(正法)과 불조(佛祖)의 혜명마저 깡그리 파괴될 때 나의 의분은 용솟음쳐 방관할 수가 없어 난 많은 학인들을 거느리고 정법수호(正法守護)를 부르짖었다.”

이같이 청담스님은 전국학인대회를 주도하면서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시초인 동시에 그의 염원인 정화불사의 출발에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청담스님의 원력은 조그만 결실을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학인스님들의 중흥운동도 일경(日警)의 탄압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체하여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불교정화 차원에서 시도한 교육제도 개선안이 수용되지 않았다. 청담스님은 강원을 마치고 교단의 정화를 후의 일로 미루고 자기 마음의 정화를 위해 수행 정진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청담스님은 덕숭산 수덕사에서 만공(滿空)선사를 만나 불교현실의 모순을 타개할 수 있는 저력으로 수행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들어갔다. 개운사 강원에서 개최한 전국학인대회가 실패로 돌아가자 먼 후일을 기약하며 정화의 준비단계로 접어 들어간 것이다.

청담스님은 1934년 12월에 선학원에서 출범한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의 이사, 조선불교 선종의 서무이사로 등장하면서 분주한 행보를 이어간다. 1935년 개최된 수좌대회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정화불사에 본격적인 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종무원 운영의 총괄책임을 담당하는 서무이사가 청담스님이었다는데서, 스님이 수좌계의 영역에서도 활동을 확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는 선종(禪宗)의 종정(宗正), 선리참구원의 이사장이었던 만공(滿空)선사의 행보와 연결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청담스님은 수좌대회를 통하여 수좌계를 대표하는 반열에 올랐다. 특히 수좌대회에서 선학원의 내용을 충실히 하기 위한 청규(淸規)를 정해 수행해야 함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을 당시 참가한 수좌들은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이러한 의견을 제출한 청담스님은 대회가 종료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제안을 다시 하였다. “석일(昔日)의 영산회상(靈山會上)과 같은 대총림(大叢林) 건설(建設)을 이상(理想)으로 하고 모범선원(模範禪院) 신설(新設)에 노력키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정화불사는 보살심의 발로

청담스님의 정화불사는 보살심의 발로에서 시작되었다.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라면 지옥이라도 가겠다.” “성불을 한 생 미루더라도 중생을 제도 하겠다.”고 할 정도로 보살심이 항상 마음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깨달음은 중생구제를 위한 보살도의 실천으로서 자아실현의 수행이다. 정화불사 또한 보살행과 한국불교 전통의 수행 면모를 되살리는 일이라 생각했다. 즉 정화불사라는 대원력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수행과 지계(持戒) · 인욕( 忍辱)의 보살행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청담스님에게 있어 불교정화운동은 보살도를 실천하는 한 단계였다. 스님이 출가하여 불법을 체득하기 위한 수행 또한 중생구제의 보살정신이었다. 이렇듯 중생구제 보살정신이 불교정화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듯 청담스님에게 있어 불교정화운동은 필연적인 인연이 있었지만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諭示)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촉발되었다. 이에 대해 《청담대종사전서(靑潭大宗師全書)》권10 ‘정화운동과 한국불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정화 운동의 싹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불교를 정화하자’는 유시에서 비롯되었다. 그 유시의 발단은 청담스님이 이 대통령을 찾아가 불교정화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유시는 ‘처자가 있는 승려들이 사찰 밖으로 물러나고 한국 고유의 승풍과 불조의 혜명을 잇기 위해 독신승이 사찰을 지키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청담스님은 그 이전부터 불교정화에 대한 원력(願力)과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대원력에 기름을 부어준 것이 유시(諭示였다. 청담선사의 정화불사는 마음의 외적 정화와 내적 정화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마음의 외적 정화불사는 교단정화로 청정승가를 확립하는 불사였고, 마음의 내적 정화불사는 지계를 통한 참선으로 무명(無明)을 타파하여 반야를 실현하는 견성(見性)의 불사로 정법불교를 세우는 불사였다. 청담선사의 정화불사는 혹독한 수행 끝에 견성한 불사에 입지(立志)를 세워 인고(忍苦)의 수련(修鍊) 속에서 빛을 발한 진정한 불교운동이었다.

-방남수 평택 청담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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