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반 현공스님은 삼각산 비봉에 토굴을 마련하고 ‘이뭣고’ 화두를 챙겼다. 누가 보는 이 없어도 스님의 정진은 한 치도 느슨해지거나 한 눈 파는 일이 없었다. 비봉을 쓰러뜨릴 듯 세찬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쳐도 부처를 구하는 사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출격대장부(出格大丈夫)란 이런 모습이었다. 이런 대장부 앞에 불교에 의지하려던 여인이 찾아온다. 현공스님은 여인의 수행과 신행을 지도하고 점검해 주었다. 스님의 지도로 불교에 가졌던 여러 의문이 해소되고 공부 역시 큰 진척을 이루게 되자 여인은 스님과의 지중한 인연을 오랫동안 이어갔다.

1998년 12월 여인은 스님을 산 아래로 모시고자 했다.

▲ 대문과 뜰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진흥선원이라 쓰여진 조그마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의 소유인 고택(古宅)을 스님께 기증하고자 마음을 낸 것이다. 여인의 이름은 권옥경. 스님께 희사된 고택은 ‘진흥선원’이라는 이름의 절로 바뀌었다. 권옥경 불자의 남편 김진흥 거사의 이름을 딴 사명(寺名)이다.

진흥선원은 서울시 민속자료 제25호로 지정된 ‘장위동 김진흥가(長位洞 金鎭興家)’로서 조선시대 1865년(고종 2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래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와 남편인 부마 남녕위(南寧慰) 윤의선(尹宜善)이 그의 양자 윤용구(尹用求)와 함께 살던 집이다. 특히 윤용구는 1871년(고종 8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와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 이후 관직을 거부하고 이곳에 은거했다.

진흥선원의 건립연대는 사랑채 대청에 보관돼 있던 상량문에 ‘을축년에 세워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1865년으로 추정한다. 건립연대로 1925년도 제기되고 있지만 양식과 재료 등으로 미루어 1865년이 유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진흥선원의 총대지는 2,504.7㎡(759평). 건평은 353㎡(107평)에 달한다.

고택의 평면은 처음 안채를 ‘ㅁ’자로 앉혔다. 거기에 사랑채를 안채의 대청과 나란히 ‘一자’형으로 배치하는 ‘구자형(九字型)’을 기본으로 했다. 그러나 진흥선원으로 문을 열고 나선 지금은 ‘ㅁ’자를 두 개 겹친 ‘쌍구자(雙口字)’ 모양으로 형식이 바뀌었다. 현재 안채는 극락보전의 현액이 내걸린 법당이다. 극락보전이지만 주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고 협시불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돼 있다. 안채에 이어 사랑채도 탱화를 봉안해 신도들의 기도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건물 안채는 현재 극락보전 법당으로 쓰이고 있다.

 

▲ 건물 내부에는 이미 봉축등들로 가득 장엄돼 있다.

진흥선원은 조선시대 부마도위의 집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또한 상시 개방돼 있는 넓은 뜰과 정원은 도심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풍경으로 고택의 유명세를 타고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오고 있다.

진흥선원이 처음 개원법회를 가졌을 때 석주스님이 증명법사로 참석하셨다. 석주스님은 “서울에서 이렇게 넓은 고택에서 포교에 전념하면 못 이룰 것이 없겠다”며 현공스님의 의지를 북돋웠다. 석주스님의 바램은 현공스님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현공스님은 안채 뒤쪽으로 앉아있는 작은 집을 활용해 ‘진흥어린이집’을 개설했다. 장위동에서 어린이집 개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스님은 내친 김에 넓은 뜰 한 쪽을 어린이 놀이시설로 개조했다. 도심 속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그러나 민속자료로 지정된 고택에서 어린이집 운영은 여러 가지로 제약이 뒤따랐다. 스님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판단으로 진흥어린이집 운영에 기여한 원장에게 모든 것을 넘겼다. 지금은 진흥선원 앞 일반주택에 보리수어린이집이 개설돼 운영되고 있다.

현재 진흥선원은 초하루와 보름법회를 통해 신행활동을 펼치고 있다. 신도들의 생일법회도 열어준다. 생일법회는 사찰과 신도의 거리를 좁히는데 유효하다.

▲ 현공스님 공덕비(오른쪽)과 기증자 김진홍·권옥경의 공덕비.

 

▲ 극락보전 법당 내부.

성북구는 올해 2억원을 지원해 낡은 사랑채를 보수정비할 방침이다.

대부분 가내수공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장위동 일대 허름한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는 진흥선원. 그 안 마당 깊숙한 곳에 공덕비가 나란히 서있다. 하나는 창건주 벽해당(벽해당) 현공스님의 비고 다른 하나는 고택 기증자 김진흥 청신사와 권옥경 청신녀의 비다. 이 지중한 인연의 공덕이 더 많은 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지길 현공스님은 내심 바라고 있다. 봄날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매화꽃이 진흥선원 입구에서 사람들을 맞고 있는 것처럼.

-김종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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