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이런 저런 행사가 많은 때다. 시무식, 명절, 졸업과 입학, 그에 따른 온갖 부수적인 행사들이 즐비하다. 게다가 신년에 새로 시작되는 일들까지 겹친다. 하루걸러 하루씩 회의, 간담회, 워크숍, 세미나, 오리엔테이션, 특강 등이 줄을 서 있다. 이리저리 쫓아다니다보면 언뜻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모이니 행사가 되는 것인지, 행사를 위해 사람이 동원되는 것인지 구분이 안된다.

친인척들 간의 노동과 생활 공동체가 해체되었으니, 서로 나누어야 할 얘기가 없고, 명절은 그저 다녀가는 행사가 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뒤섞이고 성과급과 구조조정으로 살벌한 현장에서, 시무식은 서로 눈치를 살피는 행사가 된다. 늘어진 회의에 지친 참석자들은 시계와 스마트폰을 번갈아 살피며, “끝으로”라는 사회자의 말만 기다린다.

검정색 양복을 입은 내빈들이 점잖게 인사 말씀을 하면, 사진기 셔터 소리가 사방에서 요란하다. 초청된 특강자는 현란한 화면을 동원해서 방안과 전략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익히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다른 곳에 가서도 똑같이 말하고 다닐 것이다. 나도 알고 남도 아는 방안과 전략이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행사의 말미에는 다들 잘해보자고 잔을 부딪치거나 주먹을 불끈 들어올린다. 하지만 들이닥친 일을 실제로 누가 어떻게 감당해낼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다. 말을 먼저 꺼낸 사람이 일을 떠맡게 된다는 것은 처세술 중에서도 하질에 속한다. 이런저런 행사가 많을수록, 저게 다 내 일인데… 하면서 뒤에서 한숨을 쉬는 사람이 있다. 결국 일을 감당해내는 사람은 그들이다.

행사를 종교학의 용어로 바꾸면 의례(rite)가 될 것인데, 종교적 인간(homo religlosus)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의례다. 의례는 삶을 마디 짓고 새로운 관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지난(至難)한 삶을 살아내게 하는 동력이 된다. 다만, 호모 릴리글로수스에게 필요한 의례는 진정성과 경건함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의례는 저마다의 삶에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한다.

종교 의례라고 해서 모두 진정성과 경건함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종교를 지목할 것도 없이, 행사성 의례가 차고 넘친다. 사례를 들기가 낯부끄럽고 어떤 것은 누워 침 뱉는 일이다. 등(燈)이든, 돈이든, 호칭이든 간에 양적으로 따지고 서열을 매기는 행위는 대개 행사성이다. 의례의 행사성은 보편적인 문제였던지라, 빈자일등(貧者一燈)이라는 오래된 이야기는 그것을 경계한 일침이었을 것이다.

행사성 의례에 대해 전면적 부정으로 내지른 것이 선(禪)이다. 멀리 생각할 것도 없이 살불살조(殺佛殺祖)가 대표적이다. 교조(敎祖)를 대놓고 부정하는 선의 모습은 여느 종교들과 비교할 때 많이 낯설다. 이런 부정의 정신은 무조건적인 반감이나 거부가 아닐 것이다. “행사는 성대한데, 정작 주인공은 어디 있을꼬?” 하는 문제의식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런 물음 또한 행사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다시 짠해진다.

[선설(禪說)]

방거사(龐居士)는 일찍이 이곳저곳 불법(佛法)을 강의하는 곳을 드나들었는데 《금강경》 좋아했다. 어느 날 《금강경》 가운데 ‘나도 없고 남도 없다’[無我無人]는 대목에서 강의하는 이에게 질문했다.

-좌주(座主)께서는 이미 나도 없고 남도 없다고 말했는데, 그러면 누가 강의하고 누가 듣는 것입니까?

좌주가 대꾸하지 않자 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비록 속인이지만 믿고 나아가야 할 바를 거칠게나마 알고 있습니다.
-그래, 거사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거사가 게송으로 답했다.

-나도 없고 남도 없으니 멀고 가까움이 있을까. 그대에게 권하노니, 강의를 그만 두고 곧바로 참됨을 구하는 것이 좋지 않을지. 금강반야의 성품은 밖으로는 한 티끌조차 끊어버리니, 《금강경》의 ‘나는 이렇게 들었다’[我聞]는 말귀나 ‘믿어 받아들였다’[信受]는 말귀도 모두 잠시 빌려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네.

좌주가 게송을 듣고는 만족스러워 감탄하였다.

▲ 영역 방거사어록.
방거사는 중국 당나라 때 인물로 선불교사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재가(在家) 수행자다. 이름은 방온(龐蘊, ?∼808)이다.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드물지만, 옛날 선문에서는 독보적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선수행자로 자주 소개되었다. 마조(馬祖), 약산(藥山), 제봉(齊峰), 단하(丹霞), 백령(百靈) 등 당대의 쟁쟁한 선사들이 그와 동시대 사람들이었고 서로 만나기도 했다.

중국 선종이 마지막을 장식했던 명나라 말기의 이탁오(李卓吾) 등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방거사에 대한 경의를 아끼지 않았다. 주류에서 밀려났건 벗어났건 간에 그들은 똑같이 변방에 있었다.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목전에 둔 선 수행 현장에서 출가자와 재가자는 끝내 다르지 않을 것이지만, 방거사가 잊힌 까닭은 그가 끝내 속인으로 남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금강경》은 교학불교와 선불교의 가교 역할을 하는 서물(書物)이다. 끊음으로써 이어붙이고, 이어붙임으로써 끊어내는 묘한 역할이다. 방거사 뿐만 아니라 육조혜능에게서도 《금강경》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금강경》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문자로 되어 있으면서도 스스로 문자를 부정하고 문자가 가리키지 못하는 지점을 가리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경전읽기와 찬송은 불교뿐만 아니라 여느 종교에서도 중요한 의례다. 말씀을 읽고 배우고 익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구원의 길이다. 이렇게 경건하고 진지한 장소에서 방거사가 갑자기 묻는다. “누가 강의하고 누가 듣는가?” 다시 풀어보면, 웅장한 부처님 말씀은 있는데 정작 그 말씀을 말하고 듣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말씀을 위한 말씀이고 행사를 위한 행사 아니냐는 것이다. 살 떨리는 문제제기다.

선(禪)의 힘은 이렇게 물음을 던질 수 있는데 있다. 이 물음이 중단되거나 행사가 되면 선은 끝이다. 선이 화석화되는 모습이 오죽했으면, 만해 한용운 같은 이는 선외선(禪外禪)과 활선(活禪)을 말했을까. 선이 끝나면 삶도 끝난다. 선은 모든 개인에게 던지는 물음이고, 그 물음이 없으면 ‘나’ 또한 없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기획한 행사와 그 행사에 ‘동원된 나’만 남아 있을 뿐이다.

정월대보름날 새벽의 더위팔기는 앙증맞은 행사였다. 늦잠 자던 꼬마는 일찍 눈을 떴고, 아끼는 사람에게는 차마 내 더위를 팔지 못했다. 아무도 기획하지 않아도 겨울밤 들판에서 아이들은 불깡통을 돌렸다. 밤이 깊어져 불깡통을 공중으로 힘껏 집어던지면, 붉은 재를 쏟아내며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숯검정이 묻은 손을 바지에 쓱 닦아내고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지역구 의원과 단체장이 인사말을 하고, 용역 받은 단체가 농악을 하는 달집태우기 행사에 의례의 진정성과 경건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지시하고 기획된 행사에서 사람들은 출연자나 구경꾼으로만 남는다. 행사가 끝나면 사람들은 타다 남은 장작개비처럼 초췌한 얼굴로 서둘러 차에 오른다. 교통경찰의 호각소리와 경찰차의 경광등 불빛에 치여 대보름달이 찌그러진다.

모를 일이다. 사람의 삶이란 것이 늘 그냥 그런 행사였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언제부턴가 이상해진 것인지. 안쓰럽고 짠한 마음이 내가 별나서 그런 것이라면 그런갑다 하고 말 일이다. 하지만 명절날 며느리처럼 대개 그러한데 입 밖에 내지 않을 뿐이라면 작은 일은 아니다.

-박재현 동명대학교 불교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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