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前生)부터 이어진 불연(佛緣)

청담스님은 1902년에 경상남도 진주시 수정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은 성산이씨(星山李氏)이며 속명은 찬호(讚浩)이다. 그리고 법호는 청담(靑潭)이고 법명은 순호(淳浩)이며 올연(兀然)은 도호(道號)이다. 청담스님은 어려서부터 불연이 깊어서인지 개구쟁이같이 지내면서도 살생하는 것을 보면 말리면서 놓아주기를 좋아했고, 약자의 편에서 대변해주었으며 사색하기를 좋아했다. 청담스님은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출가(出家)하게 된다. ‘마음’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진주 호국사(護國寺)에서 포명(抱明)스님을 만나고 부터다. 이에 대한 인연관계를 ≪청담대종사전서(靑潭大宗師全書)≫권11 ‘청담대종사의 생애와 사상’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찬호는 어느 날 서장대(西臟臺) 기슭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목이 몹시 말랐다. 서장대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호국사에 가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목이 말라 수각에서 물을 마셨다. 한참 꿀꺽꿀꺽 마시고 있는데 한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더니 이렇게 물었다. ‘왜 사람이 물을 마셔야 하느냐?’ 그 때 찬호는 우두커니 서 있고 무어라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 포명(抱明)스님은 ‘나’를 찾고 ‘마음’을 찾아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설한다.

“갈증이 심했나 보군. 그러나 마음이 타는 것은 물로 식힐 수는 없지. 왜 불이 뜨겁고 물이 찬지 아느냐? 마음이 뜨겁고 얼음이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찬호는 포명스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 뜻도 모르고 마시고, 먹고, 보고, 듣고 하는 행동을 해오다가 스님의 설법을 고요하게 생각하면서 반성해보니 하나하나의 행동은 ‘마음’이 결정하고 ‘마음’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자신이 지니고 있는 마음의 당체는 어떤 것인가? 라는 화두(話頭)를 마음속에 항상 품게 되었다.

‘마음’을 찾는 수행을 위해 해인사(海印寺)로, 또 백양사(白羊寺)도 가보았지만 출가의 인연이 닿지 않았다. 청담스님은 유년시절의 친구 박생광 화백을 만나자 대뜸 입산출가의 방법을 물었다.

“혹 일본에 입산길이 열릴만한 사찰이 없느냐?”
“입산은 허락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일본이라서….”
“수도의 길에 가기 위해 불문(佛門)에 입문하는데 국경이 따로 있을 없지 않는가. 일본도 부처님 법을 받들고 우리나라도 부처님 법을 받드는 곳이 불교가 있는 곳 아닌가. 그러니 가는 길을 좀 모색해주게.”

박생광 화백의 주선으로 일본에 건너간 청담스님은 병고현(효고현) 적송촌의 운송사(雲松寺: 청담선사 관련 모든 저서에는 송운사로 되어 있으나 일본 병고현에 있는 임제종 학교법인 市川學院 이사장 多津大無 스님과의 2013년10월10일 일본 부사학원 고등학교에서 만나 확인한 바 송운사는 없고 운송사가 있는 것으로 필자가 확인함.)에서 아키모토준카(秋元淳稚)스님을 모시고 행자생활을 시작하였다. 청담선사는 ≪청담대종사전서≫ 권11, ‘청담대종사의 생애와 사상’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때 내 나이 24살 때인데 쇼운지에서 아키모토준가스님에게 득도를 했다. 내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5일 만에 다 외우니 노스님이 놀라는 것이었다. 기억으로 남는 것으로는 내가 손님께 어떻게 접대를 하는가를 물었을 때 “그것을 몰라 묻느냐? 보면 알지.”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하고 무안스러워 고개를 숙여 버렸지만 나는 스님의 그 말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보아라.’라는 한마디를 깨우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도 ‘마음’의 문제를 해결할 곳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일본의 스님들이 부부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일본에 머무는 것이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일본불교는 껍데기요, 형식의 불교, 내용이 없는 불교임을 감지하고 더 이상 일본에 머무를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 귀국하기에 이르렀다.”

청담스님은 포명스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이 불안할 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방법은 수행(修行)을 통하여 ‘마음’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26세(5월17일)에 옥천사(玉泉寺)에서 축발(祝髮)을 하였다. 청담선사는 앞의 책 권5 ‘마음의 노래’에서 출가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부처님 입던 옷을 나도 따라 입고 나니/ 세상 번뇌들이 갑자기 잊혀지고/ 삼계(三界)의 스승 된 듯이 몸이 가쁜 하여라./ 구조법의(九條法衣) 받들으니 거룩하기 그지없다./ 사생(四生)의 자부(慈父)되려 삼독(三毒)을 우선 끊고/고해(苦海)를 건너가려고 합장하는 그 자세/ 깁 조각조각마다 믿음으로 얽힌 자국/ 오리오리 맺힌 단성(丹誠) 걸치자니 두렵구나./ 해야 할 육도만행(六度萬行)이 앞에 가득하여라.”

청담스님이 비구계(比丘戒)를 수지(受持)할 때 지은 ‘찬복전의(讚福田衣)’의 시(詩)이다. ‘오리 오리 맺힌 단성(丹誠)’이나 ‘육도만행(六度萬行)이 앞에 가득하여라.’ 라는 등에서 초발심(初發心)의 의지와 원력(願力)이 느껴진다. 청담스님은 항상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걷겠다.’고 항상 강조할 만큼 출가에 대해 아주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후학들은 전한다. 청담스님은 출가의 기쁨을 시(詩)적인 노래로써 펼쳐 보이고 있다.

마음을 찾기 위한 위대한 결단

청담스님은 출가하여 ‘마음’ 공부를 하고 ‘마음’을 정화하여 평생 ‘마음’을 노래하였다. ‘마음’의 근원을 찾아 깨달음을 얻고 ‘마음법문’으로 대중을 교화하고 걸림 없는 ‘마음의 길’을 걷게 된 발심처(發心處)도 바로 ‘마음’이었다. 이것이 청담선사의 ‘마음철학’으로 자리 잡으면서 ‘마음선(禪)’이라는 독창적인 영역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 청담선사는 당시 ‘마음’에 대한 심경(心境)을 앞의 책 권1, ‘마음’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그 말을 들은 뒤부터 ‘마음’이란 말에 중치가 막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벙어리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가 토요일만 되면 다시 호국사로 그 마음을 들으러 갔다. 갈수록 미로와 같은 세계였다.”
포명스님은 한참 맹렬히 타오르는 젊은 청담스님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불을 지폈다. 이에 몰입된 청담스님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세속적 모든 청운(靑雲)의 꿈을 다 버리고 출가(出家) 수행자로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마음의 본처(本處)를 찾아 떠나는 청담스님의 마음세계는 은산철벽(銀山鐵壁) 같은 화두(話頭)로 채워졌다. 이러한 관문(關門)의 장벽을 무너뜨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열정이 생(生)의 전환점을 가져오게 되었다.
‘출가’. 그것은 청담스님뿐만 아니라 모든 출가 수행자들의 대전환이다. 자기변혁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는데 한걸음 앞서갈 수 있다. ≪능엄경(楞嚴經)≫에 ‘출가는 세속을 피함이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다. “자신이 깨닫지 못했으나 먼저 다른 이를 제도하는 것은 보살의 대비 원력이요. 자아를 완성한 다음에 능히 중생을 깨닫게 하는 것은 여래의 출현이다.” 《楞嚴經》第6, 大正藏 卷19, p. 131c. “自未得度先度人者菩薩發心 自覺已圓能覺他者如來應世”

출가의 근본목적이 사람들을 피해서가 아니라 중생들을 제도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이며 세속(世俗)을 떠난 것은 결코 중생들과 관계를 끊기 위해서가 아님을 설하고 있다. 즉 중생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출가는 고행(苦行)의 시작이다. 그간의 많은 인연(因緣)을 끊고 새로운 세계와 인연을 맺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전통적 유교 가정에서 천륜(天倫)을 끊어버리고 삭발염의(削髮染衣)함은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것이므로 보통의 마음으로는 되는 일이 아니다. 청담스님은 출가할 때의 결단을 앞의 책 권1 같은 편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 무렵 나는 벌써 그 인연의 끈이 얼마나 가늘고 허무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고, 가늘고 질긴 그 줄을 끊어버리는 일이 대오(大悟)로 행진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지름길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었다. 깨달음을 향한 정진은 이 초발심으로 시작되었다. 할애출가(割愛出家)하여 대오로의 대행진, 은산철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대신심(大信心)의 발로 앞에 어떤 장애물도 나타날 수 없었다.”

청담스님은 어릴 적부터 비범한 이상을 가졌다. 즉 어떤 사항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그것을 해결하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정서적으로도 매우 감수성이 민감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청담스님은 봉고재(鳳輦齊)라는 한문 서당에서의 생각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나는 마당가의 볏짚에 작은 몸을 기대고 서서 무심한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보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흘렀다. 찬란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구름은 삽시간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버린다. 코끼리 모양으로, 젖먹이는 어머니 모양으로, 산 모양으로, 바다 모양으로…, 그토록 자유자재로 변하는 구름 모양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아니면 다만 흐르고 변한다는 구름의 형용이었을까. 어렸을 때의 일을 세세하게 생각해 낼 수는 없지만, 나는 구름의 변용에서 일종의 소년다운 감상적인 비애를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비애는 장차 나를 만드는 정서적인 원천이 아니었을까.”

청담스님은 어떤 환경에 부닥쳤을 때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반드시 감각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다. 구름의 움직임을 ‘마음’의 번뇌(煩惱)로 생각하고 이렇게 변하는 이유를 ‘마음사상’과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예리한 감수성과 문제의식은 나중에 일본의 지배에 대한 반항과 정화(淨化)운동의 인연으로 이어지게 된다.

무(無)자 화두 통한 용맹정진

청담스님은 우선 ‘마음’의 도리를 이론적으로 체계 있게 연구하기 위하여 서울 안암동 개운사(開雲寺) 강원(講院)에서 경전을 강의하고 있는 영호(映湖)대강백을 찾아가서 경(經)·율(律)·논(論) 삼장(三藏)을 공부하였다. 스님 스스로 대교과(大敎科)의 과정을 이수하면서 마음에 대한 깨달음을 가장 많이 얻은 경전은 ≪능엄경(楞嚴經)≫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평소에 ≪능엄경≫을 가장 소중히 하였다. 청담스님은 ≪정본수능엄경주석서(正本首楞嚴經註釋書)≫ 서문에서 ≪능엄경≫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예부터 십철(공자의 십대제자)과 같더니 참다운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서는 스스로 깨달아 아는 사람이 아직까지 없다. 스승을 만나는 길이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마음을 정직하게 가져야 하고 둘째는 계율이 정결해야 하며 셋째는 정성이 느껴 통해야 하니 이 세 가지가 원만히 이루어져야만 돈에 계합된다.”

강원(講院)교육을 마친 청담스님은 ‘마음’을 닦는 수행법은 참선(參禪)이라고 생각하고 덕숭산(德崇山) 정혜사(定慧寺)에서 당시 선지식이었던 만공(滿空)선사의 지도하에 선(禪)을 수행하였다.

철저하면서도 빈틈없는 수행과정은 후일 한국불교의 정화(淨化)를 위한 초석(礎石)을 다지는 힘이 되었다. 만공(滿空)선사를 만난 청담스님은 한국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울 길을 허심탄회하게 토론한다. 이때 만공선사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청담선사의 미래를 결정짓는 큰 지침(指針)이 되었다. 청담스님은 정혜사에서 사중(寺中) 소임을 보며 틈틈이 선방(禪房)에 들어 정진하며 ‘마음자리’ 참구에 몰두하였다.

이때 만공선사로부터 받은 화두는 조주(趙州)(778-897)선사의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였다. 청담스님은 스스로 다짐하기를 화두(話頭)를 참구함에 있어 혼침(昏沈), 산란(散亂), 방일(放逸)에 빠지지 않고 3시간 이상은 자지도 말고, 만약 깨치지 못하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진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경책(警策)하며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마음으로 정진하였다. 이후 마음을 찾기 위해 삼천리 방방곡곡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순례하면서 뼈를 깎는 고독한 수도행각(修道行脚)에 나섰다. 청담스님의 수도행각은 보통 범인(凡人)으로는 감히 넘겨볼 수도 없는 가혹한 시련이었다. 서울 개운사, 덕숭산 정혜사, 금강산 유점사, 오대산 상원사, 가야산 해인사 등을 누비며 수도하던 청담스님은 차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니면서 고행했고, 보름 정도 굶으며 용맹정진(勇猛精進)하기가 예사였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에 다 해진 누더기만 걸쳤던 스님은 들어앉아 인욕(忍辱)을 기르곤 했다. 정혜사 만공선사 회상에서 참선을 하고, 상원사의 적멸보궁(寂滅寶宮)의 백일기도를 마친 뒤에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지냈다. 영하 15도 20도의 강추위에도 방에 불을 때지 않고 내의를 입지 않은 채 맨발로 지내기를 10년 동안이나 하였다. 두타행(頭陀行)이란 행하기 어려운 고행(苦行)을 참고 견디며 행하는 수행법의 하나다. 의식주에 대한 탐착(貪着)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수행이다. 청담선사는 오전 한 끼만 먹기도 하고 벽곡(辟穀)하기도 했다. 청담스님은 오직 ‘무(無)’자 하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청담스님은 그 때의 심정을 역시 앞의 책 같은 편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세수하는 일, 변소에 가는 일 그리고 먹는 일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자리를 떠난 일이 없이 정진에 몸을 맡기었다. 무수한 시간이 지나갔으나 나는 동요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한 목적, 유일한 목적만이 내 앞에 있었다. 해탈(解脫)하는 일 그것이 바로 목적이었다. 욕심(慾心)으로부터, 욕망(慾望)으로부터, 기쁨과 슬픔으로부터의 해탈이 목적이었다. 모든 나로부터 벗어날 때, 모든 욕심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최후의 것, 가장 본질적인 것, 나는 내가 아니라는 큰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문 앞에 부동(不動)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목이 마르고 괴로움과 불편함이 잊혀질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이윽고 그 괴로움과 불편이 사라져갔다. 점점 ‘무(無)’의 경지로 들어갔다. 밥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앉아있어도 앉은 것 같지 않고, 오줌을 싸도 싼 것 같지 않았다. 하나의 정좌(定座)는 밥이고 정좌이면서 곧 ‘무’ 였다 … 그리고 밤의 어둠이 밀리고 밀린 끝에 아침이 오고, 창살이 햇빛을 가득 받아 타올랐다가 꺼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시간은 한달음으로 흐르고 있었고, 그런 가운데 아침과 저녁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선방의 수좌들 사이에서는 내가 견성(見性)했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만공선사도 견성했다는 인가(印可)를 해 주시었다.”

마음의 본성(本性) 깨달아

만공선사는 청담선사를 불러 문답하여 시험한 뒤 인가했다. 그리고 ‘올연(兀然)’이라는 도호(道號)를 주었다. 청담스님에게 내린 전법게(傳法偈)는 다음과 같다.

전야삼십봉 傳也三十棒 전한다는 것은 30방이요
수야삼십봉 受也三十棒 받는다는 것도 30방이니
봉야삼십봉 棒也三十棒 또한 30방의 방을
부여올연자 付與兀然子 올연선자에게 부쳐 주노라

청담스님은 만공선사로부터의 인가를 사양하였다. 하지만 청담스님이 오도(悟道)한 사실이 알려지자 결사적으로 강요한 도반(道伴)들에 의해 오도송(悟道頌)을 지었다.

상래불조둔치한 上來佛祖鈍癡漢 예부터 모든 불조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안득료지현변사 安得了知衒邊事 어찌 현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치겠는가
약인간아하소능 若人間我何所能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노방고탑경서망 路傍古塔傾西方 길가 옛탑이 서쪽으로 기울어 졌다하리.

이 후 금강산 마하연을 비롯 명찰을 찾아 여러 선원(禪院)에서 참선하며 마음의 본성(本性)을 확실하게 깨닫는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청담스님은 금강산에서 수도한 바 있는 포명스님에 의하여 발심하게 되어 출가한 이래 영호(映湖)대강백의 강맥(講脈)과 만공선사의 지도하에 견성을 하였고 이의 선맥(禪脈)을 이어 받으니 청허(淸虛)선사의 17대손이 되었고 백파(白坡)선사의 8대손이 되었다. 이와 같이 선맥과 법맥을 이은 청담스님은 대중들에게 ‘마음의 도리’를 가르치며 정신문화발전과 한국불교발전에 전력을 다 하였다.

-방남수 평택 청담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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