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止觀法門》
○ 外人曰 善哉願說充滿我意 亦使餘人展轉利益 則是傳燈不絕為報佛恩.

《지관법문》
○ 외인이 말하기를 “장하십니다. 원하옵건대, 지관법인 대승행법을 설법하여 저의 뜻을 충만케 하여 주시고, 저 뿐만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로 하여금 차례차례로 전파하여 이익을 줄 수 있다면 이것은 부처님 법등을 전하여 단절되지 않게 되는 바, 부처님 은혜를 보답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지관강해(止觀講解)》
● 善哉願說充滿我意 亦使餘人展轉利益

‘선재원설(善哉願說)’은 ‘훌륭하십니다. 설법해주시면 기쁘겠습니다.’라는 의미다. 여기서 ‘전전(展轉)’이란 공간과 시간에 걸친 두 의미가 있다. 가령 한사람으로부터 열사람, 열사람에게서 백사람에게 전해진다면 법이 보편하게 퍼지는 것이니 공간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 혹은 아버지와 아들의 경우와 같이, 서로 서로 번갈아 가며 전수하는 것은 미래에도 다함없이 설법하는 것이 되니, 시간적 측면으로 전파된 것이다. 이렇듯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전수된다면 그 이익이 실로 클 것이다.

● 則是傳燈不絕為報佛恩

불법(佛法)의 다른 표현은 부처님 마음의 등불이다. 법등의 전수[傳燈]가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되는 이유는, 부처님께서 평생 동안 설법하여 중생 제도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불법을 전하여 준다면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止觀法門》
○ 沙門曰 諦聽善攝為汝說之 所言止者 謂知一切諸法從本已來性自非有不生不滅 但以虛妄因緣故非有而有 然彼有法有即非有 唯是一心體無分別 作是觀者 能令妄念不流 故名為止 所言觀者 雖知本不生今不滅 而以心性緣起不無虛妄世用 猶如幻夢非有而有 故名為觀

《지관법문》
○ 사문이 말씀하셨다.
“자세히 살펴듣고 훌륭하게 이 법문을 포섭하여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한 마음자세를 갖추어야만 그대를 위해 비로소 지관법문을 설하겠다. ‘지(止)’를 말하자면 일체제법을 놓고 볼 때, 일체제법의 자성(自性)이 실제로는 있지 않음을 관찰하여 아는 것이다. 자체(自體)의 측면에서 볼 때, 제법(諸法)이란 불생(不生)이다. 인연 따라 나온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연에 따라 소멸할 일도 없다.

제법이 있다고 여기는 이유는 단지 허망한 분별인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래 그 본성에 있지 않은 것이 허깨비로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모든 법은 비록 있다할지라도 허망한 인연으로 있어, 실제로는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본체로 따지면 오직 이것은 진여일심(眞如一心)일 뿐이다.

진여일심, 이것은 무분별(無分別)이다. 즉 허망한 분별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제법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를 관찰하여 알아야한다. 이것이 바로 ‘지(止)’다. 그리고 이와 같이 제법을 관찰하는 이는 허망한 망념으로 하여금 마음 밖으로 흘러가지 않게 할 수 있다. 마음을 외부로 흐르지 않도록 정지시키는 것을 가리켜 바로 ‘지’수행이라 한다.

‘관(觀)’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의 근본 일심자리에서 볼 때, 비록 본래 제법이 일어나지도 않아, 현재 새삼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심성(心性)은 허망한 인연을 따라 일어난다. 그런데 허망한 인연의 모습이 세간의 쓰임새가 없는 것이 아니다. 허깨비가 실질적으로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 보면 이해가 쉬이 될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존재한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 바로 ‘관’수행이라 칭하는 것이다.”


《지관강해(止觀講解)》
● 諦聽善攝為汝說之
대사는 질문하는 이에게 ‘체청선섭(諦聽善攝)’이라 하였다. 여기서 ‘체청(諦聽)’이라는 말은 ‘실재를 살펴 지극한 일심(一心)으로 듣는다.’는 의미다. 만약 몸이 도량에 있다하더라도 망상(妄想)으로 어지럽게 얽매여 있다면, 이는 자세히 살펴듣는 바가 아니다.

귀로 듣는 것은 문사수 3혜(三慧) 가운데 문혜(聞慧)에 해당된다. 모든 수행과 모든 공부는 바로 이 ‘문(聞)’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선섭(善攝)’의 ‘선(善)’은 뛰어난 솜씨를 뜻하고, ‘섭(攝)’은 거두어 포섭한다는 의미다. 일체 모든 망상을 전부 놓아버려야 한다. 마음을 포섭하여 듣는 것에 있어야 한다. 대체로 뛰어난 솜씨로 그 심념(心念)을 거두어들이고 포섭해야만 바야흐로 자세하게 살펴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혜(聞慧)가 아닌 사혜(思慧)다. 어떤 가르침을 문혜로 들으면 반드시 마음 속으로 이를 사고하고 정리한다. 이를 ‘사(思)’라 한다.

만약 사혜에 그치면 탁상공론에 머무르는 것이고, 문혜로 그친다면 세간에서 말하듯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반드시 수혜(修慧)를 포함한 3혜가 갖추어져야만 수행이 이루어진다. 능히 3혜가 빠짐없이 만족하게 갖추어져야 바야흐로 진실하게 법을 듣는 사람이다.

정리하면 ‘자세히 살피고 듣고 훌륭한 솜씨로 포섭하라[諦聽善攝].’는 경계하는 구절의 대목이다.

이어 ‘그대를 위해 설법해주겠노라[為汝說之].’라고 하였다. 말하는 이, 즉 대사가 설법을 허락하겠다는 말이다. 가령 살펴서 듣고 훌륭한 솜씨로 포섭하지 못하면, 문혜와 사혜를 빠짐없이 갖추지 못하게 된다. 이러할 때, 아무리 좋은 설법이라 할지라도 과연 어떤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한 까닭에 대사께서는 법을 청하는 이에 대해 짐짓 먼저 훈계하고 난 후, “그대가 그러한 자세가 갖추어지면, 설법하겠다.”는 허락을 나타내었다.

● 所言止者
일찍이 《중론(中論, 관사제품)》을 통해 용수보살은 게송으로 ‘중인연생법(衆因緣生法) 아설즉시무(我說即是無) 역위시가명(亦為是假名) 역시중도의(亦是中道義)’이라 언급하셨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하지관》・《수습지관좌선법요》・《관음현의》・《중관론소》․・《법화현론》・《이제의》 등의 여러 전적에 게재된 게송을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허망한 인연으로 일어나는 모든 법을
나는 그것은 바로 있는 그 자리에서 ‘공’이라 설명하네.
역시 있다고 해도 그것은 가법, 즉 거짓 제법이라 부르며
역시 (원래) ‘공’과 ‘가’가 둘이 아닌[아니기 때문에] ‘중도’의 의미라 말하네.

앞서 언급된 《대승지관》 본문의 문장을 용수보살의 게송에 근거하여, 다음 긴요한 세 줄로 나누어 보겠다.

첫째, 知一切諸法從本已來性自非有不生不滅
둘째, 但以虛妄因緣故非有而有
셋째, 然彼有法有即非有 唯是一心體無分別

● 謂知一切諸法從本已來性自非有不生不滅
먼저 첫 구절을 살펴보자. ‘지일체제법종본이래성자비유불생불멸(知一切諸法從本已來性自非有不生不滅)’의 구절 앞에는 전후 맥락을 살펴보건대 ‘마땅히 관찰하라’는 구를 넣어 법문을 익혀야 한다. 해석하면 ‘마땅히 관찰하기를, 일체제법이 종본이래(從本已來)로 그 자성이 스스로 있다하더라도, 실제로는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생불멸이다.’의 뜻이다.

‘위지일체제법(謂知一切諸法)’의 ‘지(知)’는 마땅히 ‘관(觀)’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주의하여 관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헤아리고 수행하는 바에 앞서 먼저 관찰해야만, 그것이 헛것임을 알아 비로소 망상이 정지된다. 여실하게 알고 여실하게 관찰해야 하는데, 만일 억지로 망상을 정지하고자 애쓴다면, 과연 어떻게 망상이 정지될 수 있겠는가.

이어 대사는 ‘일체제법(一切諸法)’이라 하였다. 이해를 심화하기 위해 먼저 이 말의 의미를 간략히 살펴보자.

가령 불교에서 5온, 6근, 6진, 12입, 18계 등과 나아가 10법계가 흔히 이야기되는데, 이 말들은 나와 아울러 남을 포함한 모든 인연화합의 존재를 가리킨다. 이러한 모든 것을 포괄하고 일컬어 제법(諸法)이라 한다. 다시 풀이하면 내적으로는 신심(身心), 외적으로는 세계가 일반적으로 인연화합 하는 법 등, 이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를 제법이라 지칭하는 것이니, ‘일체(一切)’라는 글자와 ‘제(諸)’라는 글자로써 포괄하여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일체제법은 표면적 측면에서는 찰나생멸하면서 한 순간도 정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를 살피지 못한다. 미혹하여 제법이 실제로 있다는 망상을 어지러이 일으킨다. 이는 큰 착오다. 반드시 그 근본, 다시 말해 일심(一心)으로부터 올바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대사께서 본문에서 말씀하기를 “일체제법이 종본이래로, 그 실체는 스스로 실재해 있는 것이 아니다[一切諸法從本已來性自非有].”라고 한 것이다.

생멸을 거듭하더라도 실체가 없어 본질적으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즉 제법은 불생불멸이다. 이러한 이치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불이공’에 해당한다. ‘색(色)’이란 우주자연 현상계가 원래 현재의 그 자리에서 허상이므로 ‘공(空)’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제법의 진실한 모습을 체득하여 망상을 정지한다. 즉 ‘공’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관법이 되는 것이니, 현상의 ‘가(假)’로부터 본질의 ‘공’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관법이다.

이는 “인연으로 일어나는 제법을, 나는 말하기를 바로 공이라 한다[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라는 용수보살의 게송 구절에 귀결된다. (※주-‘衆因緣生法’은 번역 상의 표현방식에 따라 ‘因緣所生法’)

처음의 중요한 이치를 반드시 알아야만 다음의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독자들께서는 부디 깊게 생각하고 헤아려주시기를 부탁드린다.

● 但以虛妄因緣故非有而有
다음 구절이다. 인연에서 일어나는 법은 원래부터 그 자성이 스스로 있다 해도 실재가 아니다. 그런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도, 눈앞에 나타나는 허망한 환상을 부정할 수 없다[虛妄因緣]. 허망한 환상으로 있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실제로는 있지 않는 것이다[非有].

‘단이허망인연고비유이유(但以虛妄因緣故非有而有)’를 풀어보면 ‘단지 망상이 허망한 분별인연 때문에, 실제로는 있지 않지만, 허깨비로는 있는 것이다.’는 뜻이다. 여기에 역시 ‘마땅히 알아야~’라는 말을 전제로 하여 풀이해야 한다.

허상이라 해도 현재 우리의 눈앞에는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대사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단지 제법이 있더라도 허망한 망상의 인연으로 있는 것이다[但以虛妄因緣]. 실제로 있는 것으로 여기더라도 이는 허깨비[幻]로 있는 것이다[非有而有].”라 하신 것이다.

본문의 ‘비유이유(非有而有)’란 ‘실제로 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의미다. 이는 허깨비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결국 방편으로 인연을 따라 ‘공’에서 가유(假有)인 현실로 깨달아 들어가는 관법이다. 이는 《반야심경》의 ‘공불이색’에 해당된다. 여기서 잠시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앞서의 ‘색불이공’은 속제가 진제와 다르지 않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공불이색’은 진제가 속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중론》에서 “역시 제법은 있다 할지라도 허깨비로 있기 때문에 그것은 거짓명칭이다[亦名爲假名].”는 구절에 해당된다.(※주-혹은 ‘亦是為假名’)

● 然彼有法有即非有 唯是一心體無分別(1)
앞서 꼽았던 구절 가운데 세 번째다. 이번 호에서는 간략히 뜻을 말하겠다. 본문에서 말하기를, ‘저 현실적으로 있는 제법은 있다 해도 실제로 있지 않고[然彼有法有即非有], 오직 진여일심의 모습일 뿐이다[唯是一心體無分別].’라고 하였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상응한다.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마땅히 저 모든 법은 허망한 인연을 따라 허깨비로 있는 제법이다. 그렇기에 있다 해도 실재가 아니다. 오로지 우리의 진여일심일 뿐이다. 우주 만유가 이러하다면 우리의 한마음 일심자리가 실상 우주와 중생의 본체이자 그 자체다. 여기에는 분별이 없다[然彼有法有即非有 唯是一心體無分別].”

문장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이어 설명하기로 한다. (계속)

-송찬우 중앙승가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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